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3화 (13/203)

■ 13. 친구 한 잔 □

그 후 서양화과 1학년만 모이는 술자리가 있었다.

"원래 우리 과는 잘 안 뭉친대. 그러니까 처음 자리라도 같이 모여서 동기들 얼굴이라도 알고 지내자. 선배들도 몇 명 올 모양이야. 수요일 4시야!"

1학년 중 하나가 그렇게 일정을 잡았다.

나처럼 알바를 이유로 빠지는 사람도 많아서 낮부터 모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요일이 되었다.

난 4시에 딱 맞춰 갔는데, 벌써 술자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대가 공부만 한다는 거 뻥이었군.'

어쩌면 미대만 그럴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술이 조금 돌자, 시끌벅적해지고 모두 이야기에 바빴다.

그 중 최고 화제는 김태민이라는 녀석이었다.

26살짜리 장수 신입생이 가장 적극적으로 김태민을 까고 있었다.

"나는 소문 다 안 믿어. 눈으로 직접 봐야 믿지. 어렸을 때만 반짝하고 사라지는 사람이 한 둘이야? 내가 실력으로 제압해 줄게."

"오올, 패기 넘치는데요?"

"그런데 걔는 엄청 잘 생겼잖아요. 오빠는 얼굴에서 이미..."

"걔가 뭐가 잘 생긴 거야?"

나는 구석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홀짝였다.

대체 얼마만의 술인지.

"그런데 대체 태민이가 누구에요?"

동기라고 해도,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말을 높였다.

내 질문을 받은 동기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김태민 몰라? 김용철 작가 아들. 이번 서양화과 수석이잖아."

"와..."

한국대 서양화과 수석이라면.

하긴 한국대도 수석이 있긴 할 것이다.

"김용철 작가가 많이 유명한 가 봐요?"

"야, 너 미대생 맞아?"

그리고 김용철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장황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얼핏 그 이름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하지만, 전생에서 현업에 매달리며 미술 쪽 일들은 조금씩 잊게 되었다.

"그럼 김태민은 어딨어요?"

"오늘 좀 늦는데. 걘 좀 멋 대로니까 오늘 안 올지도 몰라. 그 놈은 특별하거든."

"특별해요?"

"넌 진짜 상식이 부족하구나. 태민이 그 녀석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유명했대. 한국대 안 오고 외국에 바로 나가려는 걸, 우리 과 교수가 가서 매달려서 붙잡은 거래."

나는 또 한 번 와, 라고 외쳤다.

'천재라는 사람들이 정말 존재하는 구나.'

나는 순전히 노력만 해서 이 자리에 있었다.

내가 재능이 없는 것은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인정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너 걔랑 같은 수업 듣잖아."

"그래요?"

"하...이 녀석. 이 놈도 어떤 의미로 대단하네."

나는 어린 동기들에게 일일이 관심을 가질 여유 같은 게 없었다.

아무튼 기초 서양화 수업을 같이 듣는 다고 하니 곧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을 듯 했다.

'천재에, 수석에, 유명 작가의 아들이라...거기에 미남까지.'

나랑 딱 정반대의 사람 같았다.

"어이, 현역."

그리고 내 앞에 날씬한 여학생 하나가 다가와 앉았다.

머리는 뒤로 묶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굉장히 영리해보였다.

나 같은 아재에겐 원래 이런 정석적인 얼굴이 예뻐 보이는 법이었다.

"유나, 한유나."

"안녕하세요."

"아니, 말 놔. 나도 현역이니까."

"아. 나는 이주원."

"알아. 너랑 김태민이랑 조금 더. 현역이 몇 명 없어서 이름을 봐 뒀지."

김태민이랑 같은 집합으로 묶이다니, 조금 영광이었다.

"사투리 쓰네. 넌 어디서 왔어?"

유나가 과일 안주를 먹으면서 물었다.

"포항."

"어? 거기 바닷가지? 나도 바닷가에서 왔어. 제주도."

포항이긴 하지만, 난 거의 바다는 못 보고 지냈다.

그래서 제주도와 동류의식을 느끼기엔 뭔가 부족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유나와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유나와 이야기하는 것은 꽤 편하고 즐거웠다.

같은 농담에 함께 웃을 때마다 유나는 이렇게 외쳤다.

"역시 바닷가 출신! 통한다니까."

'난 바다 거의 못 봤다니까...'

그리고 회귀자와 진심으로 생각이 통한다면 유나 역시 정상은 아닌 것이다.

아쉬웠지만 나는 알바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내가 갈 때까지 김태민이란 녀석은 오지 않았다.

'끝까지 안 나타나니까, 더 멋있어 보이는걸.'

"나 이제 가 봐야 해. 알바 있거든."

"어디서 일해?"

"구름 커피라고, 카페야."

교수가 붙잡았다는 과수석도 있다지만, 내게는 카페 알바가 대단한 성취였다.

그래서 자랑하듯 말했다.

"어? 구름 커피, 나 거기 알아. 내 자취방 바로 앞인데. 나도 알바 구하고 있었는데."

"늦었어. 내가 차지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유나에게 구름 커피가 얼마나 멋진 직장인지 자세히 설명해줬다.

"야, 너 거기 관둬라."

"싫거든."

"그럼 적어도 하루 한 잔 커피는 나한테 양보해."

어차피 구름 커피까지 날 보러 올 친구도 없었다.

"그 정도는 가능해. 그런데 며칠 지나서 와. 아직 우유거품이 서툴러서."

"약속한 거다."

* * *

며칠간은 카페에서 사장님과 같이 일했다.

내 근무 시간은 저녁 6시부터 밤 11시까지.

사장님 말대로 테이크아웃 하는 단골들 외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우리 집 커피가 좀 연한 가 봐요. 그래서 단골들한테는 말하지 않아도 그냥 샷 추가로 나가요."

회귀하고 나서 한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확실히 구름 커피의 커피는 맛이 없었다.

'학교 앞이라 값이 싸니까 나쁜 원두를 쓰나?'

처음엔 배우는 입장이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지런히 우유 거품 내는 방법을 배웠다.

"계속 해 봐야 늘어요. 천 잔쯤 하면 잘 할 수 있게 된데요."

"천 잔이나요? 그럼 우유를 얼마나 써야 하는 거죠?"

"우유는 걱정하지 말고 자주 연습해요."

바닐라 라떼, 카페 라떼, 카푸치노, 카페 모카.

카페 일은 힘 들지도 않고 무척 즐거웠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의 공동 작업실로 갔다.

자정이 넘어 작업실에 가면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마치 내 개인 작업실에 온 것 같았다.

'이 조용함에 중독되면 낮에는 못 오겠군.'

벌써 포토 리얼리즘 과제를 시작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포토 리얼리즘 정물화에는 사진의 느낌을 강조할 수 있는 소재를 많이 쓴다.

예를 들면, 사탕, 유리잔, 스테인리스 같은 것들.

표면이 매끄럽고, 빛나고, 물기를 머금은 것들이 사랑받는 소재였다.

사진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느긋하게 남들이 그린 그림을 하나씩 감상했다.

'모두들 인터넷에서 적당한 사진을 다운받아서 그리는구나. 그런데 과연 그거면 충분할까?'

포토 리얼리즘은 조금 이상한 장르의 그림이었다.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

그냥 사진으로 찍으면 될 것을.

거기엔 분명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조금 더 무식하게 해보자. 내가 직접 사진을 찍어 보는 거야.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사진 말고.'

그리고 모두들 소재가 비슷했다.

반짝거리는 것들.

솜씨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것들.

'어차피 나는 남들보다 시간을 더 쓸 수 있어. 그러니까 소재도 더 고민을 해 보자.'

나는 재능이 없었다.

그러니 남들만큼 하려면 몸을 더 피곤하게 굴려야 한다.

'난 남들보다 노력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절대 김태민이나, 김태민을 이겨 보겠다는 녀석들과 상대할 수 없었다.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겨우 상조를 꺾고 한국대까지 왔는데, 더 강한 놈들 때문에 새로운 열등감에 잡힐지도 몰랐다.

게다가 난 노력상점까지 있었다.

'노력상점까지 있는데, 남들보다 못한 그림을 그린다면...'

끔직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다음 날, 중고로 캐논 350D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목에 걸고 소재를 찾아 밖으로 나갔다.

* * *

조금 익숙해져서 카페에서 혼자 일하기 시작한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노력코인을 받기 위해 굉장히 열심히 일했다.

손님이 없으면 가게를 구석구석 청소했다.

그리고 하루는 용기를 내서 밤늦게 찾아온 단골손님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카페 커피가 맛있어요?"

한국대 여학생인 듯한 손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요?"

끄덕끄덕.

"아무 맛도 없어요."

"더블 샷으로 드린 것은 알고 계시죠?"

"네. 그런데 쓰기만 써요."

"그럼 왜 우리 카페에 와서 커피를 마셔요?"

"골목이라 가깝고, 값도 천원 싸고, 또 카페인은 확실하게 있는 것 같아서요. 새벽까지 공부해야 하니까."

역시 한국대.

공부를 위해 미각을 포기하다니.

"그리고 할머니가 굉장히 친절하셔서요. 이젠 저녁에 안계시나 봐요."

그런데 문제가 꽤 심각한 것 같았다.

카페에 오는 단골들 대부분이 비슷한 답변을 했다.

나는 의욕 충만한 아르바이트.

구름 커피도 좋았고, 사장님도 좋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문제점을 해결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녀가 찾아왔다.

유나는 내게 당당히 외쳤다.

"커피 받으러 왔다. 오늘 친구 한 잔 아직 남아있지?"

나는 씨익 웃으며 맛없는 커피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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