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2화 (12/203)

■ 12. 알바 □

사실 화가가 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난 그냥 그림이 좋고, 그림에 관해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열등감도 약간.'

전생의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미대생이었고, 그 꼬리표가 평생 따라 다녔다.

'그걸 지우고 싶었어.'

그런데 얼추 해낸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난 분명 명문대 미대생이니까.'

순전히 내 힘으로 해냈다고 하기엔 조금 찔리지만, 그래도 내가 해낸 것은 맞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열등감은 이제 그만. 새 목표를 찾자.'

물론 힘들게 들어온 대학이다.

그리고 동경하던 서양화과.

학교는 열심히 다닐 생각이다.

'하지만 이젠 뭔가를 더 해야겠지.'

두 번째 목표를 정할 시간이다.

난 어차피 하루에 30시간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충분히 두 개의 삶을 병행할 수 있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의무야. 두 번째 삶이니, 두 배로 치열해야 한다.'

어쩌면 그게 노력상점의 존재의 이유일지 몰랐다.

내 두 번째 목표.

바로 돈이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힘들게 일하고 있지. 그리고 두 번째 삶마저 돈에 쫓겨서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진 않아.'

그래서 일을 구할 생각이었다.

'과외나 미술 학원 강사 같은 그런 재미없는 알바는 관두자고.'

나는 알바인 동시에 미래의 나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전생에서 제일 부러웠던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고 돈도 잘 버는 사람들이었다.

'내 분야이면서, 돈도 되는 것.'

먼저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사진.

사진이라면 지금 전공인 서양화와도 잘 맞고, 또 전생의 전공인 디자인과도 잘 맞았다.

전생의 내 경력과 합치면 몇 가지 돈 벌 궁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당장은 힘들어. 사진으로 돈을 벌려면 차근차근 준비해야 해.'

그래서 한 학기동안 사진 수업을 들으면서 준비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1학기 동안 놀 수는 없지.'

다행히 마침 또 하나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돈이 안 되는 것은 알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뭔가 근사해 보이잖아.'

사실 카페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의 로망이었다.

커피 향기 가득한 좁은 카페.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단골손님.

잔 위에 그림을 그리고, 남는 시간엔 책을 읽고.

'본격적인 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라고 생각하자.'

전생에서도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시골 출신 남학생에겐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카페라면 왠지 여학생 위주로 뽑을 것 같은 느낌.

남학생이라면 잘생기고 세련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이미지라면 카페보단 숯불갈비집 같은 곳이겠지.'

하지만 두 번째 생이다.

하고 싶은 건 다 해 볼 생각이다.

'1학기는 카페에서 일해 보자.'

그렇게 작은 목표를 세웠다.

* * *

그리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기초 서양화 1.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은 모두 14명.

장수생이 많고, 낙제한 복학생들도 같이 듣는 수업이라, 학생들의 나이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 중 남학생은 나까지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젊고 준수하게 생긴 서진석 교수가 들어왔다.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내 수업은 그렇게 빡센 수업이 아닙니다. 하지만 계속 느슨하게 수업했더니 살짝 지겨워져서 올해부터는 빡세게 나가볼까 생각합니다."

"아앙, 교수님! 교수님만 믿고 들어왔는데."

교수와 사이가 좋은지 몇몇 선배들이 우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서진석은 아랑곳 않고 수업을 진행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입시 미술만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틀을 벗어나서 이 수업에서 진짜 서양화의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제 수업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주제를 내주면, 여러분은 그림을 그려오고. 그럼 다 같이 그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 됩니다. 그림 그리고, 이야기하고, 그게 제 수업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서진석은 한 학기 동안 자신의 수업 계획을 이야기했다.

"첫 과제는 포토 리얼리즘입니다. 인간의 그림과 카메라의 기술, 둘 중 어느 쪽이 더 진화가 빠를 까요? 그림이 갖는 한계를 넘기 위해 카메라가 발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그림의 장르가 다시 생겨났습니다.

그게 바로 포토 리얼리즘이죠. 원래는 첫 주부터 과제를 내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라고 이번 과제는 특별히 첫 주부터 말씀드리는 겁니다."

포토 리얼리즘은 말 그대로 사진처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리얼리즘 회화와는 살짝 차이가 있다.

사실처럼 그리는 것과 사실을 찍은 사진을 그리는 것의 차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서진석 교수는 몇 가지 극사실주의 회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차이는 무시해도 됩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소재를 선택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포토 리얼리즘을 해석해서 그림을 제출하면 됩니다. 시간은 3주. 기교가 필요한 그림인 만큼 서둘러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입시 미술과는 다릅니다. 포토 리얼리즘이라는 장르 안에서 모든 것을 여러분이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그럼 좋은 작품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빡센 과제가 내려졌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은 사실상 기교의 정점.

지금의 내게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노력.'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 지어졌다.

노력은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차피 사진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과제에 의욕이 불탔다.

'좋아, 제대로 한 번 멋진 그림을 그려보자고.'

* * *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학교 근처 카페 몇 군데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

그 중 한 곳에서 나를 뽑겠다고 했다.

"원래 우리는 여학생 위주로 뽑거든요. 그런데 한국대 생이라기에 면접을 보고 싶었어요. 인상이 좋네요. 일도 빨리 배우겠죠? 언제부터 일할 수 있죠?"

나 역시 내가 한국대 생이란 것을 은근히 이용하긴 했다.

그런데 살짝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예전의 나 역시 학교와 직장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 받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더 좋은 기계 부품이 된 느낌?'

하지만 뭐, 세상이 원래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짜리 꼬마도 아니고, 일일이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었다.

근사한 카페였고, 학교에서도 가까웠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한군데 더 면접을 봤다.

카페 이름은 구름 커피.

한국대 자취 골목의 아담한 거리 카페였다.

"어서 와요."

환하게 웃어주는 노부인이 나를 맞았다.

"장사를 잘 모르고 무턱대고 시작해서 카페에 손님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알바를 쓸 형편도 되지 않는데, 딸이 다시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저녁엔 내가 손주를 봐야 해요."

카페 사장님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내가 면접 보러 온 건데...'

마치 내가 사장님을 면접 보는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은퇴했고, 전부터 꿈이었던 카페를 시작했다고 했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혼자 있으면 더 빨리 늙으니까, 또 예전부터 해보고 싶기도 했고..."

카페는 작고 예뻤다.

"내가 오전부터 저녁까지 하고, 학생이 저녁부터 밤까지 해주면 되요. 손님도 별로 없어서 일하기 힘든 점은 없을 거예요."

'사장도 없이, 나 혼자?'

이거야 말로 내가 원하던 알바였다.

카페 체험을 해보고 싶어서 알바에 지원한 거였는데, 딱 내 목적에 맞는 곳이 나타난 것이다.

'큰 카페는 시스템에 맞춰 일하니까, 카페의 일부 밖에 배우지 못해. 하지만 이런 작은 카페라면 내가 모든 일을 다 맡아 해야겠지.'

내가 이상한 건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점이 더 기대되었다.

"혼자서 마감까지 해야 해서, 너무 어린 사람은 뽑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학생은 뭔가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까, 듬직하네요."

사장은 내가 말을 낮추라고 해도 계속 높임말을 썼다.

친절하고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아직 채용된 것도 아닌데, 충성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카페를 한 번 둘러볼래요?"

테이블 세 개짜리 작은 카페였다.

그런데 특이하게 주방이 있었다.

주방에는 냉장고며, 오븐이며 있을 건 다 있었다.

"여기 전 주인이 브런치 같은 것도 팔았나 봐요. 하지만 나는 장사가 잘 안 돼서 브런치는 관뒀어요."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원래 카페는 조각 케이크나 빵 같은 간식들도 같이 팔곤 했었다.

하지만 이 곳은 쿠키 몇 종류가 전부였다.

"동네 빵집에서 가져와서 팔아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그것도...장사가 잘 안되니까 다 버리게 되더라고요. 마진도 낮고. 그래서 유통기한 긴 쿠키만 놔두고 다 빼버렸어요."

재미있는 곳이었다.

'뭔가 허술해. 그런데 느낌이 좋아. 마치 내가 부지런히 굴면 그 만큼 장사가 잘 될 것 같은 기분?'

"사실 여긴 저녁 시간에 문을 열어봤자 남는 것도 없어요. 그래도 단골이라고 찾아주는 사람도 있어서 문을 닫기도 그렇고. 그냥 마감할 때 문 잘 잠그고, 단골손님들한테 인사만 잘 해주면 돼요. 할 수 있겠어요?"

꼭 하고 싶었다.

"만약 여기서 일하게 되면, 주원 학생은 커피를 마음껏 마셔도 돼요. 그리고 하루 한 잔 친구한테 커피를 줄 수 있어요."

무한 커피라.

원래 미대생의 피에는 카페인이 흐르는 법이었다.

게다가 친구까지 무료로 한 잔이라니.

빨리 친구를 사귀어야 할 것 같았다.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습니다."

"같이 잘 해봐요."

그렇게 나는 완벽한 알바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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