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미녀들의 고향 □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고, 숙소는 기숙사에 합격했다.
대학을 가는 일이 큰일처럼 여겨졌는데, 생각보다 싸게 먹혔다.
내 통장엔 인테리어 현장에서 일한 돈과 여기저기 받은 용돈들을 합해 삼백만원 조금 넘는 돈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100만원을 주셨다.
어머니 돈은 받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어머니가 제발 100만원이라도 받으라고 하셨다.
"난 정말 아들 하나 공짜로 키운 기분이야. 이 돈이라도 가져가. 서울에 혼자 살다 보면 갑자기 돈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그래서 내 통장엔 400만원, 꽤 거금이 들어 있었다.
미대가 돈이 많이 들긴 하겠지만, 난 건강한 몸이 있다.
앞으로 어머니 신세는 절대 지지 않고, 이 돈을 잘 불려나가 생활할 생각이었다.
* * *
드디어 서울.
아직 많이 추웠다.
나는 짐가방을 들고 기숙사의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응?"
처음엔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
아직 겨울인데 런닝 셔츠만 입은 근육질 남자가 혼자 아령을 들고 있었다.
'사체과인가?'
나를 발견한 녀석은 아령을 내려놓고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이번에 입학한 컴공과 김한철이라고 해."
컴공이라니.
내가 아는 컴퓨터 천재들과는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안경도 쓰지 않았고, 사교성도 좋아보였다.
듬직한 체구가 멋있다기 보다는 일 잘하는 돌쇠 같았다.
"어...그래. 나도 신입생. 이주원이야. 그런데 안 추워?"
"추워. 추워 죽겠어. 그런데 운동할 땐 이렇게 근육을 보면서 해야 하거든. 너도 나랑 같이 운동할래?"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쿠웅.
그리고 또 한 명이 들어왔다.
이번엔 호리호리한 몸에 안경.
정말 공부 잘하는 한국대생처럼 생겼다.
"너희들이 이번 신입생인가? 반갑다. 난 국문과 4학년 이형원이다."
원래 기숙사는 고학년 한 명, 저학년 두 명 그렇게 배정했다.
"저는 컴공과 김한철.."
"망했군. 너는?"
"저는 서양화과 이주"
"예쓰! 드디어!"
형원이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드디어! 기숙사 생활 3년 만에 드디어! 드디어 같은 방에 미대생이 들어왔다! 무슨 과라고?"
"서양화입니다."
"다시 한 번!"
"서양화과입니다!"
"그래, 서양화! 넌 이제부터 이 방안에서만 서양화과다. 이 기숙사에서는 앞으로 컴공인 척 한다. 알겠지?"
"예?"
"한철아, 얘는 이제부터 컴공이다."
"예?"
"예로부터 서양화과는 한국대 미녀들의 고향이다. 다른 기숙사 놈들에게 나눠줄 서양화과는 없다. 우리가 독점한다! 그러니 이 녀석은 앞으로 컴공인 척 해야 한다."
"그...?"
그때 한철이도 내 손을 붙잡았다.
"넌 이제 컴공이다."
"그래, 외쳐. 난 이제 컴공이다!"
"난 이제 컴공이다!"
"더 크게!"
"난 컴공이다!"
"그런데 선배님, 정말 서양화과가 미녀들의 고향입니까?"
한철이 진지하게 물었다.
"선배는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불러."
"예, 형."
"국문과가 서울이라면, 서양화과는 우즈베키스탄이다."
"그 정돕니까? 그럼 컴공은?"
"컴공은...됐다. 주원이라고 했나."
"예, 형."
"앞으로 컴공이라고 하면, 기숙사에서 아무도 널 귀찮게 안 할 거다. 형은 너만 믿는다."
"주원아. 나도 너만 믿는다."
그렇게 정신없이 스타트를 끊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도 싫지 않았다.
한국대라고 내가 너무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시끄럽고 멍청하게 환영해주는 게 너무 편했다.
고등학생일 땐, 회귀한 직후이기도 했고, 또 버거운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쉽지 않았다.
이젠 두 번째 삶에도 익숙해졌고, 대학 생활을 좀 즐기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두 사람과 친해지고 싶다고 마음먹었지만...
기숙사에서 첫날 밤.
우린 형원이 들려주는 여러 경험담과 음담패설, 연애 주의사항 등을 들으며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 * *
'연애 좋지.'
난 지난 생에 연애에서도 실패했다.
첫 아내는 삼십 대 중반에 소개로 만났다.
벌써 늦은 나이였고, 그녀도 나도 결혼에 대한 압박이 컸다.
그래서 서둘러 결혼했다.
서로 많이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맞춰 가면서 살면 되겠지, 아이가 생기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음의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고 아이도 생기지 않았다.
처음엔 아이가 생기는 게 희망이었다.
아이가 생기면 남들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나중엔 아이가 없는 게 다행으로 여겨졌다.
우린 이혼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아내도 두 번째였고, 나이도 있는 만큼 아이는 갖지 않기로 합의했다.
'처음엔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린 결혼을 한 게 아니라, 그저 같이 살기 위해 동맹을 맺은 것뿐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것은 언제든 필요할 때 헤어질 수 있는 준비에 불과했다.
우린 딱 그 정도로만 친했다.
그래서 나는 연애나 감정에 지쳐있었다.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다시 젊은 육체를 갖게 되었는데, 사랑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조심스러웠다.
'이젠 절대, 남들이랑 비슷하게 살려고 연애하진 않을 거야.
그냥 열심히 살다가, 계속 열심히 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옆에 같이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어. 그리고 같이 꿈을 쫓는 거지.'
난 그렇게 결심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떡해. 애 좀 봐. 귀 빨개졌어. 너무 귀여워!"
"귀 만져 봐도 돼? 귀 뜨거울 것 같아!"
"어...그...그..."
다음 날.
난 여자 선배들 앞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 * *
1학년은 수강 신청을 할 줄 몰라서 2학년 선배들이 수강 신청을 도와주기로 했다.
'미녀들의 고향...진짜였어....'
"안녕, 난 이수진이야. 주원이 너 현역이구나? 오올, 현역 드문데."
현역이란 재수를 하지 않고 고3에서 곧바로 들어왔단 의미였다.
실기와 이론, 두 배로 입시를 준비하고 경쟁이 치열한 만큼 한국대 서양화과에는 현역은 몇 없었다.
"넌 현역이니까, 앞으로 그냥 누나라고 불러. 내가 수강신청 도와줄게. 뭐야? 너 긴장했어?"
나이를 먹고 나서 회사에서도 젊은 여직원은 피했다.
서로 불편하니까.
업무 외에는 불필요한 이야기는 가능한 하지 않았다.
친해지고 싶어도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예의를 차린 웃음뿐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회귀해서 돌아온 곳도 남고.
그러니 이렇게 젊은 여자랑 이야기 해 본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어머 얘 좀 봐. 너 혹시 수진이한테 반했니?"
이수진은 전통적인 미인이라기보다는 뽀얗고 귀엽고, 눈웃음이 반달이고 아무튼 미녀들의 고향의 첫 주민이었다.
"아, 어떡해, 귀여워라!"
귀엽다니!
대체 누가 누구를 보고 귀엽다고 하는지.
나는 중년 아재의 영혼을 가진 회귀자였다.
하지만 회귀자 노릇도 적성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 같다.
"어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입만 열면 말문이 막혔다.
미술학원에서도 여학생은 많았다.
하지만 여대생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이수진에 대해 설명하자면.
웨이브가 들어간 갈색 단발에, 뽀얀 피부 위에 옅은 파우더, 분홍색 입술. 귀걸이가 찰랑이는 귓불. 그 아래 솜털....
"어 그게......"
"얘 또 말 더듬어!"
"아, 어떡해, 긴장했나봐."
아무튼 나는 그렇게 21살짜리 여자들한테 잔뜩 귀여움 받았다.
* * *
"자, 이제 장난 그만치고 수강신청하자. 일단 기초서양화1, 서진석 교수님이네. 운이 좋네."
"좋은 분인가요?"
"응. 젊은 분인데, 벌써 인정받고 그림도 잘 팔리시는 분이야. 목소리도 좋으시고, 여러 가지 잘 가르쳐주는 교수님이야."
그리고 난 수진의 도움으로 몇 가지 과목을 담았다.
"1학년 1학기엔 교양 필수 신청하고 나면 네가 고를 수 있는 과목이 몇 개 없어. 혹시 생각해둔 과목 있어?"
"저, 사진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진? 하긴. 그림 그리려면 사진이 필요하긴 하지."
서양화과는 여러 종류의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항상 정물만 그릴 수 없으니까, 인물이든 풍경이든 사진은 필수였다.
"음...'사진의 이해'라는 과목이 있긴 한데 2학년 과목이야. 지금 들으면 학점 따기도 힘들고, 동기들이랑 수업도 좀 꼬일 거야."
"그런가요?"
"그럼 수강신청 하지 말고, 청강할래?"
"네?"
"교수님한테 말씀드리면 허락해주실 거야. 김진기 교수님 유명해서 다른과에서도 청강생 많이 오거든. 미리 배워두면 좋을 거야."
청강이라.
꿀정보를 얻었다.
"네, 그럼 사진의 이해는 청강을 하겠습니다."
"나도 그 과목 들으니까, 청강할 때 꼭 내 옆에 앉아. 내가 밥 사줄게."
"네...넵."
그렇게 수강신청도 하고, 청강 정보도 얻고, 예쁜 선배와도 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