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7화 (7/203)

■ 7. 서울로 가라! □

원장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실기 치기 전에 2달, 서울에 올라가라."

"원장선생님. 어차피 입시는 제가 준비 하는 것. 전 포항서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원장 선생님도, 수채화 선생님도 모두 실력 있으시고, 전 어디서나 열심히 할 테니까요."

"그래? 기껏 공짜로 받아준다는 학원 찾았는데."

"네?"

공짜라는 말을 듣자, 머리에 번쩍 빛이 들어왔다.

수능 끝나고, 실기 시험을 칠 때까지 2달 조금 안 되는 시간.

그 시간이 입시 미술 학원에겐 대목이었다.

겨울 방학 마지막 특강은 최소 300만원.

한국대나 종예대 같은 특수학교 특강은 때로 4~500이 넘어가기도 했다.

"고...공짜라고요?"

"그래. 내 친구의 선배가 홍대 나왔는데, 그 선배 친구가 홍대 앞에서 학원을 크게 하나 봐. 전화해서 사정 설명했더니, 자기 옛날 생각난다고 너 받아주겠단다."

친구의 선배의 친구면 남이란 소리였다.

원장 선생님은 아는 인맥을 모조리 동원해 이곳, 저곳 다 전화해 보신 것이다.

"주원아. 서울 가라. 입시는 기술이지. 그리고 거긴, 홍대생, 한국대생 현역 학생들이 강사로 있다. 최신 기술이지.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야. 가장 큰 건."

가장 큰 차이?

"학생들이야. 공기가 달라. 거긴 전국에서 한국대 가겠다고 작정한 녀석들만 모였지. 공부하기 싫어서. 그냥 그림이 좋아서. 대학 가기 쉬워 보여서. 그래서 학원 다니는 녀석들이 아니야. 자기 학원이랑, 자기 도시 정점 찍고, 돈 몇 백 내더라도 제대로 해보겠다고 작정한 놈들이 모인다. 그러니 거기 가서 배워. 여기랑 다를 거다."

아직 내 입시 미술은 완성이 아니었다.

한국대에 원서를 내는 것조차 도박인 상태.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나에게 걸어주셨다.

어쩌면 그리 큰 투자는 아닐지 모른다.

하루 오후를 들여, 여러 곳에 전화를 한 것.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인생이 걸린 투자였다.

"짐 싸라. 하루라도 아껴야지. 오늘 당장 떠나. 내일부터 당장 서울서 수업 들어."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대학 붙으면 해."

난 미술 학원에서 화구들을 챙겼다.

텅 빈 학원에 쓰레기통 옆에 한두 개 쓰레기가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던지다 실패한 모양이었다.

난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를 줍다 보니, 여기 저기 치울 곳이 보였다.

매일 깨끗이 청소 한다 생각했는데, 밝은 낮에 다시 보니 미흡한 곳이 많았다.

난 빗자루를 가져다 구석을 쓸었다.

"야, 이 녀석아! 그 놈의 청소! 됐으니까, 어서 가!"

그런 나를 보고 원장 선생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거의 1년.

내게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셨다.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원아."

"예."

"지난 1년간 여기서 하던 만큼만 해."

그렇게 난 학원에서 쫓겨나듯 나왔다.

* * *

아직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신문 배달.

난 수능 치는 날까지 배달을 하겠다고 했다가 강제로 하루를 쉬었다.

내가 혜성 아파트 단지가 배달량이 적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빠지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 고생한다.

그래서 인수인계를 마쳐야 그만둘 수 있었다.

난 소장님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대신할 사람을 구해 달라고 말했다.

"당장 가."

"예?"

"내가 신문 밥 30년 먹었다. 고작 아파트 단지 하나 해결 못할 것 같냐? 당장 서울 가."

"하지만."

"시끄러우니까 당장 가. 지금 두 달은 나중에 이십년 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당장 출발 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난 몇 번이나 소장님께 인사했다.

"시끄러우니까, 빨리 가라고!"

정말 당장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감자탕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잠깐 사정을 설명했다.

"나 모아둔 돈 꽤 있는 거 알지? 내가 짐 챙겨서 바로 서울 갈게요. 금방 다녀올게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가? 당장 잠은?"

"원장 선생님이 다 구해주셨어. 그럼 바로 출발할게."

그건 거짓말이었다.

집까지 구해주진 않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걱정이 끝이 없으니까.

다행히 난 중년의 회귀자.

서울에 묵을 곳이 많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난 그날 바로 서울로 가는 차를 탔다.

챙길 짐도 거의 없었다.

밤늦게 서울에 도착해, 학원 근처의 고시원에 숙소를 잡았다.

작은 창문이 달린 방이 한 달에 21만원이었다.

거기다 밥과 김치도 무한 제공이었다.

* * *

서울의 미술 학원.

역시 좋았다.

포항의 학원은 3학년 전부 합쳐서 20명이 되지 않았는데, 서울의 학원은 한국대반만 30명이 넘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실력이 있었다.

난 다음날부터 곧바로 수업을 들었고, 아이들끼린 금방 친해졌다.

"야, 너 논술은 어디 학원 다녀?"

"논술?"

난 중년의 아재.

신문도 많이 읽었고, 사회 경제 뉴스도 많이 봤다.

보고서도 자주 썼고.

그러니 논술은 기본 실력으로 칠 생각이었다.

"와, 이 통뼈 보소."

다른 녀석들은 논술 학원도 다니고 있었다.

미술 특강 학원비가 450만원.

거기다 논술 특강 학원비가 250만원이었다.

"이런 미친..."

입시가 아니라 돈시였다.

부자가 아니라 평범한 미대 입시생이 두 달 동안 기본으로 쓰는 돈이 700이었다.

'어, 그런데 저 녀석은??'

한국대반 30명 중 아는 얼굴이 있었다.

바로 김상조.

"저...저놈은..."

내 대학 생활을 굴욕과 열등감으로 채워주던 여러 악당들 중, 대장격인 놈이었다.

녀석이 딱히 나쁜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나쁜 놈이었다.

한국 정보대는 예술대가 특히 유명한 학교.

그 중 김상조는 한국 정보대 예술대의 정점을 찍던 녀석이었다.

나는 디자인과면서 서양화과 수업을 몇 개 들었고, 녀석은 서양화과와 디자인과를 복수 전공했다.

그래서 우린 유난히 자주 마주치곤 했다.

하지만 김상조는 나를 벌레 보듯 대했다.

'어쩌면, 내가 회귀해서 서양화과를 가겠다고 결심하게 된 일등공신일지도...내가 고마워해야 되나?'

상조는 소묘 실력이 탁월했다.

4B연필만으로 마치 사진을 그대로 옮기듯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길거리든 카페든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와, 완전 사진인데..."

"금손이네, 금손이야. 그림 천재다."

이런 찬사와 함께.

상조는 나중에 SNS스타가 된다.

그리고 성인대상 미술학원을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한번은 언젠가 강의실에서 상조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내가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들으란 식이었다.

"난 전과 제도가 왜 있는지 모르겠어. 우리 학교 예술대가 발전하려면 적어도 일반대와 예술대 사이의 전과는 막아야 한다고 봐. 입시도 완전 다른데. 그건 교칙의 구멍이야. 그리고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은 기회주의자들이야."

난 그때 전혀 반박하지 못했다.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난 신분 상승을 하고 싶었으니까.

난 그냥 못들은 척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무기력함은 지난 생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녀석은 그때 상조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어쩌면 지난 생 내내 나를 괴롭히고 좀먹었던 악의에 찬 운명 그 자체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것보다 네가 왜 한국대반에?'

상조는 이런 말도 했었다.

"난 한국대 서양화가가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해. 거기는 너무 아카데믹해. 그림은 분석하는 게 아니라, 직접 그리는 거잖아? 그러니 거기 실력은 점점 떨어지고, 말빨만 강해지지. 우리 학교는 달라. 우린 현장에서 뛰고, 직접 부딪히며 배우니까. 내가 그래서 우리 학교를 선택했지."

녀석은 자랑스럽게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너 임마....사실은 한국대 쳤었구나. 설마 둘 다 붙었는데 한국대 버리고 온 거였냐? 아니면... 한국대에 떨어지고 한국대를 증오하게 된 거냐?'

슬며시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에 한국대에 붙었는데 다른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 그랬다면 난 김상조를 진정한 예술 영혼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정답이야 몇 달 후에 알게 되겠지.

어쨌든 지난 생, 절대 넘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그림 천재가 실상은 좀 재미있는 녀석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녀석과 실력으로 붙어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무튼 잘 만났다, 이 자식아.'

* * *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어버버...

'그림을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난 신세계를 보고 말았다.

그게 옳은 세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고 말았다.

'이 사람들은....'

난 현역 홍대생 강사의 시범을 보고 경악했다.

'이 사람들은 그림을 외우고 있어...'

내가 아는 정물화는 사물을 보고 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강사는 시험에 자주 나오는 정물들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

정물화의 시험 시간은 3시간.

하지만 이 괴물 강사들은 마음만 먹으면 1시간에 그림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이래서 서울에 가서 배워야 한다고 했구나.'

사물을 보고 스케치하고, 그것과 닮은 색을 만들어서 색칠하는 게 정해진 순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사물을 보고, 오 이거네.

그게 다였다.

그리고 외우고 있는 색을 만들어 외우고 있는 형체에 색칠했다.

순식간에 믿어지지 않는 그림이 뚝딱 튀어나왔다.

"자, 내가 보여준 대로 하면 된다. 지금부터 간단한 시험을 시작한다. 시간은 2시간 반. 실전이라 생각하고 그리면 된다. 시~작!"

[ 잡생각 제거 ]

난 노력 코인까지 써가며 최선을 다해 그렸다.

그리고 이어진 평가에서 14등을 받았다.

'딱 중간이군.'

그리고 상조는 2등을 했다.

상조는 역시 그림을 잘 그렸다.

다만...

'야 이 새키야. 한국대가 아카데믹하다고 비난하던 놈이, 그림을 그렇게 외워서 그리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 분노는 회귀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분노였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1등은 군대까지 다녀온 복학생 형.

지금 지방대 미대를 다니고 있지만 한국대가 가고 싶어서 올라왔다고 했다.

"자, 매년 한국대 서양화과는 열 명 남짓 뽑는다. 전국에 우리 학원 같은 곳이 몇 군데나 있다고 생각해? 내가 아는 곳만 홍대에서도 열 군데가 넘는다. 여기서 1등을 해도 붙을까 말까다. 모두 분발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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