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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천재 미대생-6화 (6/203)

■ 6. 제안 □

연합시험이 끝나면 학원장들은 소묘에 점수를 매겼다.

내가 받은 점수는 B.

남들에겐 대단하지 않은 점수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B.

나는 B라는 점수를 얻기 위해 한 번의 생과 두 달의 겨울 방학 특강을 견뎌냈다.

난 연합시험에 참여하고, 점수를 받았단 자체만으로 큰 보람을 느꼈다.

내게는 소중한 B였다.

시험이 끝난 후, 학원장들은 다른 학원 학생들의 그림을 감평했다.

"아마,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학생 같네요. 선도 서툴고, 화면 정리도 부족하고. 그런데 명암은 정확하네요.

형태도 정확하고. 배운 대로 착실히 그린 그림. 지금 B를 주긴 했지만, 기본이 탄탄한 그림이 원래 마지막까지 더 성장하는 법입니다.

입시가 아직 1년 남았으니까, 열심히 그리도록 해요."

내게 공부나 하라던 그 원장이었다.

'1년 만에 절대 미대 못 간다 그랬었지.'

내가 이겼다.

난 그렇게 생각하고 혼자 뿌듯했다.

그렇게 겨울방학 특강과 함께 연합 시험도 끝났다.

"야, 오늘은 고기 뷔페 가자! 2시간 풀로 먹어보자고!"

특강이 끝나서 학원생들끼리 회식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연필과 필통을 챙겼다.

학원에 돌아가 새벽까지 다시 그릴 생각이었다.

역시 B로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

'저녁은 샌드위치로 간단히.'

고기 뷔페 2시간이면 4 노력 코인을 모을 수 있다.

4 노력 코인이면 [숲 속 산책]이 2번이고, 목욕하는 비너스 누님을 2회나 볼 수 있다.

'고기 따위 필요 없어.'

그렇게 연합 시험장을 나오는데 누가 날 불렀다.

"오랜만이네."

'저 사람은?'

두 달 전 나를 거절했던 첫 번째 미술학원장이었다.

다른 학생과 형평성을 고려해 받아줄 수 없다던 그 사람이었다.

"너 그림 많이 늘었더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 그랬을 것 같더라. 수능 성적도 높은 거 보니까, 원래 성실하고 머리가 좋은 놈이었구나."

"아닙니다. 그저..."

"머리 좋은 놈이니까, 바로 말할게."

"네?"

"나 홍대 나왔다. 서양화과."

"그러십니까?"

"너네 학원은 그냥 개인 미술학원이고, 우리 학원은 전국 체인이야."

"그래서요?"

"나도 포항서 미술학원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하면 서울이랑 지방이랑 수준 차이가 커.

너 정도 성적이면 한국대도 찔러볼 수 있고, 종예대도 넣어볼 수 있고, 그림만 받쳐주면 전국 어디든 다 찔러볼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학원 와라."

오호..

뜻밖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형평성 때문에 안 된다고..."

"니가 우리 학원 청소하면서 다니면, 사람들이 형평성을 따지겠지. 장학생으로 와라. 그럼 누가 알겠냐. 너 학원비 면제 해줄게. 포항에선 우리 학원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가고 싶은 마음은 물론 조금도 없었다.

학원비 겨우 2~30만원.

겨우 그것 때문에 나를 믿고 무려 B까지 이끌어준 원장 선생님을 배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제안은 계속 들어봐야지.

재밌으니까.

"그리고 수능 끝나고 실기 칠 때까지 두 달 동안, 서울의 본점에 보내줄게. 거기서 두 달 합숙하면 실력이 크게 늘 거다. 그게 다가 아니야. 우리 학원 체인에서 한국대랑 종예대 합격하면 장학금도 준다. 너네 학원도 장학금 주냐?"

오호.

장학금까지.

미술 학원에서 한국대나 홍대, 종예대 같은 명문대에 합격하면 두고두고 홍보할 거리가 생긴다.

다만 이렇게 노골적인 학생 빼가기는 드문데, 이 학원장이 오늘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선생님."

"그래. 말해 봐."

"죄송합니다. 전 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결정짓지 말고. 너 꽤 늘었더라. 당장은 괜찮겠지. 하지만 앞으로는? 언제까지 그 학원에서 배울 건데? 난 서울에서 학교 나왔지만, 너네 원장은 아니지. 서울도 가 본 사람이 가는 거야."

후우.

나는 가볍게 숨을 뱉었다.

"선생님, 그만 하시죠."

"뭐? 뭐라고?"

더 이상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난 짐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괜히 장난스레 그와 대화를 길게 끌었다가 원장 선생님에 대한 불쾌한 언급까지 듣고 말았다.

우리 원장 선생님은 내게 기회를 준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원장 선생님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나를 믿어준 분.'

최선을 다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남들은 힘들다고 말하는 고3.

하지만 난 무척 즐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 대학 전공에 대한 기대가 컸다.

서양화과.

난 지난 생에 디자인을 전공하며 서양화과 수업을 몇 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서양화과는 서양화를 그리는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서양화과를 전공하면 세상을 보는 나만의 눈을 갖게 된다.

그러니 서양화를 전공하면 세상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난 그렇게 믿었다.

내 전부를 짜내서 노력하겠다는 나의 결심.

그리고 사기적인 초능력인 '노력 상점'.

그 두 가지를 최대한 빨아먹으려면 세상을 보는 눈이 필요했다.

게다가 서양화를 전공하는 것은 내 지난 생의 꿈이기도 했었다.

그러니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입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보너스가 생겼다.

매일 노력 코인을 모으고, 상점을 꾸준히 이용한 결과, 드디어 노력상점이 [레벨 2]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동시에 몇 가지 추가 상품이 생겼다.

[ 압축 잠 진한 맛 : 가격 15코인, 1시간 수면으로 6시간 수면의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

'좋은데?'

좀 비싸긴 하지만, 수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 전신 스트레칭 : 가격 3코인, 전문 트레이너의 도움으로 구석구석 스트레칭한 효과를 가집니다. ]

이것도 괜찮았다.

3코인이면 자주 쓰게 될 것 같았다.

[ 바닷가 산책 : 가격 2코인, 숲 속만 산책하기 지겨우셨죠? 이젠 바닷가 산책입니다. 계속 레벨을 올리면 더 다양한 산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이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난 [숲 속 산책]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도 좋아했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막상 바다 보러 가기엔 힘든데....이것도 맘에 들어.'

[ 밝은 눈 : 가격 1코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 눈을 안마해 피로를 풀어줍니다. 시력 보호 효과가 있습니다. ]

오오...

화가는 눈의 직업.

이것 역시 맘에 들었다.

난 화가가 될 거니까.

하긴 세상에 눈을 쓰지 않는 직업은 없을 것이다.

[ 엉덩이 축소 : 가격 2코인, 아주 미미한 정도로 엉덩이가 축소되며 탄력이 생기고 힙업됩니다.. 자주 사용하면 더욱 효과가 커집니다. ]

엇? 이것은?

대박이었다.

난 성장기의 청소년.

환경에 맞춰 신체가 자연스레 변형되어 성장한다.

보충 수업에, 뎃생 수업에...

난 하루에 최소 10시간을 의자에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그래서 절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난 오리 궁둥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엉덩이는 남자의 생명.

'결심했어. 여기엔 코인을 아끼지 말자. 매일 2코인씩 엉덩이를 줄여나가자. 아름다운 엉덩이를 가질 때까지.'

나는 잘생기지도 않았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근육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니 절대, 엉덩이만은 잃을 수 없었다.

* * *

그리고 석고 소묘 외에 정물 소묘와 수채화도 배웠다.

내 원래 지망학교는 한국 정보대.

그냥 그럭저럭 국립대였다.

하지만 이번 생은 그곳만 시험 치기에는 내 수능 성적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도 어마무시한 한국대 서양화과에 원서를 넣기로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답게 한국대 서양화과는 입시가 까다로웠다.

보통 다른 서양화과는 수능, 내신, 실기 1개.

이게 다였다.

하지만 한국대는 논술, 수능, 내신, 실기1, 실기2.

게다가 시험 유형이 얼추 정해져 있는 다른 학교와 달리 매번 이상한 문제를 냈다.

그러니 다양한 실기를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나는 1년을 준비했고, 드디어 11월 수능이 끝났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림에 쏟고, 수능은 항상 기본만 준비했는데 성적이 꽤 잘나왔다.

그래봤자 미대 입시에서는 큰 이익을 누리진 못하지만.

* * *

수능 다음 날.

수험생들은 3일 동안 학원을 쉬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하지만 난 혼자 미술 학원에 나갔다.

매일 6시간 노력해야 능력이 유지되는 까닭도 있었지만, 난 그림 그리는 일이 즐거웠다.

서양화과라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도 꽤 즐거웠다.

끼이익.

응?

학원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안에서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라도 오셨나?'

난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 선생님이 전화 통화를 하고 계셨다.

학원이 조용해서 난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예, 제가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저희 학생 중에 이번에 수능을 잘 본 친구가 한 명 있어서요. 소묘도 꽤 착실하게 배웠고, 수채화도 기본은 합니다. 그래서 2달 동안 서울에 올려 보낼까 하는데....예. 아무래도 이 녀석이 학원비가 부담스러운 모양이라....아, 그렇군요. 네.."

원장 선생님은 서울의 유명 미술학원마다 전화를 해서 특강 수강료 교섭을 하고 있었다.

"예, 실기를 조금만 다듬으면 한국대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예, 그렇지만 그렇게 비싼 가격은 무리 일 것 같습니다. 예, 물론 저희 입장에서는 공짜가 제일 좋지요. 하하하."

원장 선생님은 내 칭찬을 하고, 가격 교섭을 하고, 특강 내용까지 전부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난 아버지라면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던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또 믿고 의지할 만한 형이나, 친구도 딱히 만들지 못했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는 아예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은 달랐다.

난 학원비도 내지 않고 다니는 중이었는데, 날 위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가격을 흥정하며 자신을 숙이고 있었다.

몸이 어려서 그런 것인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원장선생님이 아버지처럼, 형처럼, 선생님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내 꿈을 찾아서 입시를 준비했을 뿐인데, 누군가 내 노력을 믿고 응원해 주고 있었다.

'그래, 한국대. 좋아. 한 번 제대로 붙어보자.'

내 원래 목표는 한국 정보대.

한국대는 붙으면 좋고, 떨어져도 그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날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남은 시간은 약 두 달.

'좋아. 그동안 모아온 노력 코인을 아낌없이 뿌려주지.'

새 목표는 언제나 날 설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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