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5화 (5/203)

■ 5. 미술학원 □

전생의 내가 다닌 학교는 한국 정보대학교.

수능을 쳐서 문과로 입학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를 마련해 디자인과로 전과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정식으로 입시 미술을 치르고 당당하게 서양화과로 입학할 생각이었다.

'기다려라. 그림 좀 못 그린다고 날 무시하던 녀석들. 학교에서 만나 실력으로 눌러주마. 후후후. 내가 입학하는 것만으로 네 놈들 한 명은 탈락이구나. 후후후.'

그렇게 전의를 불태웠지만, 몇 가지 소소한 문제가 있었다.

첫째. 입시 미술은 시간이 걸린다.

탁월한 재능이 있지 않은 이상 1년 만에 만족할 만한 실기력을 갖추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하지만 난 노력 코인이 있지.'

그러니 잠 안자고 버티면서 악착같이 배워야 한다.

노력은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둘째. 입시 미술의 학원비였다.

지방이라 학원비가 많이 싼 편이었지만, 그래도 부담이었다.

내가 신문배달로 버는 돈은 고작 13만원.

하지만 몇 군데 알아본 결과 학원비는 제일 싼 곳이 한 달에 25만원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 후퇴는 없다. 오직 직진!'

나는 내 12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다섯 부 복사했다.

다섯 부 복사한 이유는 우리 집 근처에 입시 미술학원이 다섯 군데였기 때문이다.

나는 한군데씩 학원을 찾아갔다.

"선생님, 입시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오, 어서 와요."

처음은 그렇게 환영받으며 시작했다.

학원비가 비싼 만큼, 학생들은 귀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학원장들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여기, 제 성적표가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수능 성적은 최상위권입니다. 제가 미대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습니다. 제가 학원 청소도 다 하고, 잔심부름도 다 하겠습니다. 최저 시급으로 고용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남은 학원비는 제가 대학생이 된 후에 갚겠습니다."

난 고등학생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받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게...말이죠. 난 학생 받아주고 싶은데...형평성 문제랄까. 다른 학생들이 알게 되면 큰일이거든요. 그런 비밀은 감춰지지도 않죠. 안되겠네요. 미안합니다."

"솔직히 말할게. 1년 동안 아무리 그려봤자, 대학 갈만큼 실력 안 나와. 네가 그림 천재면 모를까. 너 천재야? 아니지? 그럼 그냥 공부나 계속해. 공부 잘하네."

그렇게 집에서 가까운 두 곳에서 거절을 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난 이번에도 성적표를 내밀고, 똑같은 레퍼토리를 뱉었다.

"보시다시피 제 수능 성적은 우수합니다. 제 실기만 만들어주시면, 제가 청소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나머지 학원비는 꼭 대학가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 째 학원장은 내 성적표를 받아들고는 한참 쳐다봤다.

"그나저나 공부를 엄청 잘하네."

"그냥 열심히 했을 뿐입니다. 그림은 더 열심히 그릴 자신이 있습니다."

"어째서?"

"네?"

"어째서 자신이 있지?"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이렇게 잘하는데, 좋아하는 그림이라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학원장은 피식 웃었다.

"좋아한다고 믿고 시작했다가 잘 안 풀리게 되면 싫어지는 경우도 많아."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전생에도 몇 번 꿈 비슷한 것을 찾아 모험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래도 조금은 열심히 살았었네.'

디자인과에 간 것도 그랬고, 또 여러 가지.

하지만 열심히 시도하다가도 결과가 나쁘면,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돌아섰다.

그렇게 버려진 꿈이 한 트럭일지도 모른다.

결국 완벽한 꿈이란 없는 지도 모른다.

가끔 꿈이 싫어지더라도, 힘껏 끌어안고 보듬으며 지켜내야 하는 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림 그리는 게 싫어지더라도 계속 억지로 좋아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버렸다.

학원장이 또 한 번 피식 웃었다.

"두 달 줄게."

"네?"

"학원 청소랑, 화장실 청소까지. 쓰레기 버리기까지 전부 네가 해. 대신 남은 학원비 나중에 갚고 그럴 필요는 없어."

학원장이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신."

"네?"

"딱 두 달이야. 보통 한 달만 가르쳐도 얘는 그림으로 된다. 안 된다. 답이 나와. 그래도 넌 특별히 두 달 줄게. 어떻게든 노력해봐. 대신 두 달 되는 날, 네 그림 보고 영 안 되겠다 싶으면 말해줄게. 그때는 깨끗이 포기하고 하던 공부마저 해."

두 달.

내가 그림 천재가 아니라는 것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 충분히 겪어 봤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천재가 아닌 게 아니라, 거의 둔재에 가까웠다.

나는 그저 그림 그리는 일을 아주 좋아할 뿐이었다.

'과연 두 달 동안 난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히려 기뻤다.

두 달 동안 미친 듯이 그림 그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뛸 정도로 기뻤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한 번 해봐."

그렇게 학원비 문제를 해결했다.

* * *

그리고 겨울방학 특강이 시작되었다.

9시에 학교에 가서 보충 수업을 마치면 오후 3시.

물론 상급 진학반은 밤까지 계속 자율학습을 했다.

하지만 난 3시에 학원에 와서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면 난 혼자 남아 다시 그림을 그렸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면 새벽 2~3시.

한 시간 정도 학교 공부를 정리하면 신문 배달을 갈 시간이었다.

배달을 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5시 언저리.

그럼 두 시간 정도 [압축잠]을 이용해 잘 수 있었다.

3교시 마치고 도시락을 까먹으면 점심시간에도 1시간 [압축잠]을 쓸 수 있었다.

[압축잠] 덕분에 살인적인 일정에도 잠은 충분히 잘 수 있었다.

정말 노력 상점은 내게 꿈같은 기적이었다.

미술 학원은 줄 긋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소실점과 원근법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아그리파를 그리기 시작했다.

3시간 안에 석고상 하나를 그려내야 했다.

빛과 그림자를 해석하고, 형태와 양감을 잡아내야 했다.

운명의 3시간.

공교롭게도 [잡생각 제거]를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젤위에 종이를 얹고, 4B연필을 준비한 후,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다.

그럼 세상이 고요해지고, 나와 아그리파와 종이, 그리고 연필 움직이는 소리만 남았다.

난 원장선생님이 들려준 방법들을 복기하며 사각사각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3시간이 끝나면 꿈에서 깨듯 4B를 내려놓았다.

그럼 내 앞에 아직은 미숙한 아그리파가 담겨 있었다.

"좋구나."

"네?"

"딱히 그림에 소질이 있어 보이진 않아. 손도 느리고. 눈도 그저 그래."

원장 선생님은 살벌하게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자세가 좋아."

"네?"

"입시 미술은 결국 기술이야. 굳이 재능이 있을 필요가 없어. 그저 열심히 그리는 방법을 외우면 돼. 너 같은 애들이 결국 잘하게 될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합격이다."

그렇게 미술 학원에 들어간 지 한 달 반이 된 날.

겨울 방학 특강이 끝날 무렵, 나는 원장 선생님께 학원을 계속 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날 새벽 학원이 반짝반짝 미끄러질 만큼 깨끗이 청소를 했다.

* * *

그리고 겨울 방학 특강이 끝나는 마지막 날, 포항의 4개 학원이 모여 연합 시험을 쳤다.

연합 시험이란 실제 입시와 똑같은 조건에서 타 학원생들과 같이 그리며 실력을 비교하고 현장의 분위기를 익히는 자리였다.

나 역시, 겨우 2달짜리 초짜이긴 했지만 예비 3학년으로 연합시험에 참석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비공식이지만, 내 데뷔 무대.'

그런데 아는 얼굴이 둘 있었다.

"어, 저 사람들은?"

바로 나를 거절했던 학원장 둘이었다.

그들의 학원도 연합 시험에 참여한 것이었다.

딱히 그들이 잘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전의가 끓어올랐다.

'당신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지.'

시험 과제는 비너스였다.

나는 이젤을 세우고 자리를 잡았다.

학생들은 분주히 각도를 재고, 연필을 움직였다.

후우..

나는 짧은 숨을 뱉었다.

그리고 [ 잡생각 제거]를 사용했다.

솨아아아아...

주위가 고요해졌다.

넓은 미술 학원에 나만 남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품.

노력 코인을 지불하고, [숲 속 산책]을 사용했다.

잠깐이지만 푸른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르르륵.

어디선가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옅은 안개를 걷고 숲속을 달려가자 작은 샘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비너스가 나풀거리는 얇은 천 한 조각만 걸치고 풍만한 몸을 씻고 있었다.

"비너스!?"

비너스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 주위로 아름다운 빛이 흩어졌다.

사각사각.

짧은 꿈에서 깨어난 후, 난 미친 듯 연필을 놀렸다.

비너스의 형태를 뜨고, 명암을 잡고, 빛을 산란해 멋을 부렸다.

세상엔 오직 나와 비너스만 있었다.

"자, 시험 종료!"

난 꿈에서 깨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수가.

내 앞의 도화지에는 이제껏 내가 그린 모든 그림 중 가장 아름다운 비너스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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