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공부는 교과서 위주로! □
그리고 2주 후.
드디어 성적이 발표되었다.
두둥.
언어영역 106점.
수리영역 69점.
외국어영역 55점.
탐구영역 79점.
무려 309점.
나는 반에서 4등을 했다.
내 마지막 모의고사 성적은 반에서 12등이었다.
무려 8계단의 상승.
특히 언어영역과 수리영역이 대박이었다.
'외국어와 탐구영역은 암기과목. 차근차근 성적을 올리면 돼. 언어와 수리도 완벽을 가하자.'
담임선생은 반의 성적표를 교실 뒤에다 붙여버렸다.
"자, 모두 자극받고 열심히 공부하도록. 특히 우리 반 주원이가 이번에 대박을 쳤다. 반에서 8등이 올랐고, 전교에서는 무려 55등이나 올랐어. 방학동안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 느껴지지 않나. 모두 박수!"
반 아이들의 부러움 반 응원 반 박수를 받자, 꽤 뿌듯했다.
하지만 더 뿌듯한 것은 창백해진 상철이의 얼굴이었다.
'녀석...후후후.'
상철은 혼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딱히 경쟁자로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심지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자기가 자발적으로 나에게 다가와 빅재미를 선사한 것이다.
절대 내 잘못은 없었다.
'고마운 녀석.'
학교의 석차나, 대학의 서열 같은 것은 긴 인생을 두고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철이는 나중에 시골 땅을 상속받고 부자가 된다.
하지만 난 자신이 있었다.
'노력 코인만 있다면...'
수능 뿐 아니라 앞으로 모든 인생에서 상철이를 앞서갈 수 있었다.
기회가 보이는 족족, 상철이를 짓밟아줄 생각이다.
"야, 이주원."
"어?"
역시, 내 예상대로 쉬는 시간 상철이가 살기등등한 시퍼런 얼굴을 하고.나를 찾아왔다.
난 생글거리며 맞아주었다.
"비결이 뭐야?"
"응?"
"너 혹시 과외 하냐? 좋은 선생님 있으면 소개 좀 해주면 안 돼? 같이 좋은 대학 가자. 너도 알잖아. 우리끼리는 서로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걸. 우리 경쟁 상대는 서울에 사는 고등학생들이야. 그러니까 좋은 정보 있으면 같이 공유하자. 그래야 같이 성장하지."
"과외는 받지 않아. 우리 집 가난한 거 알잖아."
"거짓말. 과외가 아니면 뭔데? 어떻게 언어랑 수리 성적이 갑자기 오르는데?"
난 빙그레 웃어줬다.
"정말 알고 싶어?"
"말해줘."
"잠을 푹 자고, 산책을 하고.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 오답노트도 작성하고."
상철이 녀석은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거의 사실대로 말해줬지만,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파이팅! 같이 성장하자!"
그렇게 친구를 격려해주곤 슬쩍 자리를 떠났다.
* * *
그리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나는 노력 상점을 꾸준히 잘 활용했다.
매일매일 30코인 가까이 벌어들였고, 그 중 5~10코인은 저축했다.
우리 학교는 매월 1회 사설 학원에 의뢰해 수능 모의고사를 치렀다.
10월, 11월 내 성적은 계속 상승했다.
그리고 12월.
나는 반에서 2등, 전교에서 4등을 찍었다.
우리 반 1등은 한국대 법대를 노리던 수재였는데, 12월 모의고사에서 나랑 겨우 6점 차 밖에 나지 않았다.
1등은 아니었지만, 나는 꽤 만족했다.
9월에서 12월.
두 달 조금 넘는 시간동안 학교에서 내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교의 상위권 녀석들, 이른바 HKY를 목표로 하는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곤 했다.
그런데 쉬는 시간마다 그들이 나를 찾아와 안부를 묻고, 같이 공부하자며 꼬셔댔다.
'재밌는 녀석들.'
필요하면 친해지고, 필요 없으면 멀어지고.
그런 것들이 어른들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하자만 고등학교에서도 엄연히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들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잘나봤자 어린 아이들일 뿐이었고, 나는 그런 가짜 친구보다는 내 목표가 더 소중했다.
그리고 HKY 모범생들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구석에서 부들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상철이는 덤으로 생긴 꿀잼이었다.
상철이는 최근 의예과 출신 과외 선생을 구했다던데 성적이 시원하게 오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열심히 하라고.'
난 상철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진심을 담아 생긋 웃어주었다.
여기까지 나는 내 1차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12월에는 3학년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진학 상담을 받았다.
* * *
"뭐? 상급 진학반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성적에 따라 반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편법을 쓰고 있었다.
수업은 정상적인 반에서 듣고, 야간 자습과 보충수업만 성적에 따라 상급 진학반을 꾸렸다.
상급 진학반은 전교에서 50명을 뽑아 HKY대 전용 심화 학습을 시켰다.
상급반은 아침 6시 반에 등교해 밤 12시 반까지 자습과 보충 수업을 받았다.
살인적인 코스였는데, 그럼에도 학부모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니, 주원아. 네가 요즘 성적이 수직 상승하고 있어. 이 성장세만 유지하면 네가 전교 1등도 할 수 있어. 우리 학교 전교 1등이면 알지? 한국대 법대, 한국대 경영대, 어디든 원하는 과에 갈 수 있는 거야."
모르겠다.
나는 두 번째 인생이다.
그런데 고작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까?
법과 경영이 과연 내가 두 번의 인생을 투자해 공부할 만큼, 내게 중요한 것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선생님. 저는 계열을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뭐? 제정신이야? 이제 와서? 문과에서 이과로 가면, 수학 2도 다시 배워야 하고, 과학도 다시 해야 하고. 지금은 이제 늦었지. 그리고 선생님이 까놓고 말하는데, 우리나라 이공계는 미래가 없어. 아니, 너 설마 의대가려는 거야? 그런 거야?"
지난 생에 나는 서울의 한 국립대학교에 겨우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학교는 일반과는 성적이 낮은 편인데 이상하게 예술대 계열만 성적이 높고, 취업이 잘되는 학교였다.
그래서 예술대 학생들은 같은 학교의 다른 과 학생들을 무시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전과를 했었지.'
나는 발악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간판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2학년까지 높은 학점을 받고, 또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예술대 디자인과로 전과를 했다.
내게는 일종의 신분 상승이었다.
'하지만 그게 악몽이었지.'
정식 입시 미술을 겪지 않은 나는 디자인과의 수업을 따라갈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동기들은 전과라는 편법을 써서 들어온 나를 대놓고 무시했다.
물론 안 그런 녀석들도 있었지만, 난 결국 학교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어.'
힘겹게 수업을 따라가면서 나는 내가 그림 그리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졸업하고 나서는 취업이니, 생계니 해서 그림에서 손을 놓게 되었지만, 그래도 평생 그림을 가슴에 지니고 살았다.
어쩌면 지난 생에 잠깐 내가 진짜 노력했던 시기였고, 또 진심으로 행복했던 시기였다.
"선생님. 저는 예체능계로 가고 싶습니다."
"어, 그래. 예체능계라면. 뭐?? 예체능? 이 미친, 미친놈아! 인문계 전교 4등이 예체능! 너 지금 이 성적만 유지해도 연고대, 교대 다 갈 수 있어! 그런데 예체능? 예체능? 미친놈아. 예체능은 쉬운 줄 알아? 걔들 어려서부터 실기를 얼마나 빡세게 하는데!"
그래. 빡센 것.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정말 미치도록.
숨이 넘어가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멀리서 앞서가는 이들을 죽도록 달려서 따라잡고 싶었다.
'공부는 이만하면 됐어.'
난 이미 전교 4등.
고작 점수 1~20점.
수능 10문제를 더 맞추려고 고3, 1년을 머리 싸매고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절대 노력이 아니야.'
노력은 가슴이 뛰어야 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어야 진짜 노력이 가능했다.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번 생은 어설프게 디자인 같은 거 하지 말고, 서양화과를 지망해보자.'
그렇게 결심을 굳혔다.
난 우리나라의 취업 현실과 고3 입시 전략의 열변을 토하는 선생님 앞에서 생글생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 주었다.
"임마! 너! 네가 잘난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교사 20년 하면서 너 같은 학생들을 수 없이 봤어! 걔들 다 학교 찾아오면 뭐라는 줄 알어? 왜 그때 선생님 말 안들었나, 땅을 치고 후회 한 대. 너 예체능이니 뭐니 헛바람 빼고, 그냥 선생님 시키는 대로 무조건 상급 진학반 들어가!"
"아뇨. 선생님. 저 이제부터 미술학원 다닐 겁니다. 정규 수업 외에 보충과 자습은 전부 빠지고 싶습니다."
"너! 나랑 장난하는 거야? 내일 당장 어머니 모시고 와!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지!"
결국 진학 상담은 어머니 소환으로 끝났다.
* * *
어머니는 새벽 1시에 집에 들어오신다.
지친 몸을 이끌고.
그리고 아침 7시까지 주무신다.
난 새벽 4시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항상 잠든 서로가 깨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니 평일엔 아주 잠깐 엄마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난 그날 새벽 1시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다.
약간 피곤했지만 버틸만했다.
1시를 조금 넘어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아직 안 자고 뭐했어? 신문 배달 가려면 일찍 자야지."
"괜찮아요. 가끔은."
내가 신문 배달을 시작할 때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셨다.
집이 워낙 가난하니까.
그리고 하루 1시간 정도는 별 문제 없다고 내가 잘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내 성적이 폭풍 성장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조금씩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아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엄마, 사실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일단 이리와 봐요. 어깨 주물러 줄게. 어깨 주무르면서 이야기하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내 앞에 앉았다.
딱딱하고 좁은 어깨.
어머니가 나이 드는 이유 절반은 내게 책임 있었다.
"엄마. 나 데리고, 아무것도 없이 이혼할 때 무섭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렀고, 나중엔 다른 여자까지 생겼다.
어머니는 이혼의 조건으로 나의 양육권을 요구하셨는데, 아버지는 쉽게 승낙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선택한 사실을 평생 감사하게 여겼다.
"무서웠지. 직장 생활이라곤 결혼 전에 잠깐 한 게 다인데. 나이는 먹었고. 애는 어리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지금이야 식당에서 당당하게 일하지. 그때는 아는 사람 만날까봐 식당에서 고개 푹 숙이고 다녔어."
"그렇게 무서운 데 어떻게 나를 데리고 나왔대요?"
"널 거기 두고 오면 네 아빠랑, 새 엄마랑,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얼마나 고생할까 걱정 되어서. 어떻게든 버텨내면 너 하나야 키울 수 있겠다 싶었지.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내가 다 이겨내야지 싶었지."
"엄마. 고마워요."
"고맙긴"
됐다.
감동은 여기까지.
어머니의 감정을 충분히 이끌어냈으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야 했다.
"엄마. 저 믿죠?"
"무슨 소리야?"
"저 제가 알아서 용돈도 벌고, 성적도 올렸잖아요. 집 청소도 하고, 아침도 짓고."
"그래. 대견하지."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지 말래요.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무조건 내가 틀렸다고 하면서. 그럼 엄마는 내 편을 들어야겠죠?"
"그..그렇지?"
"좋아요. 선생님이 엄마 모시고 오래요."
그렇게 약간의 소란을 겪은 후, 결국 나는 상급반 보충에 빠질 수 있었다.
"미대? 그런데 미술 학원비 비싸지 않아? 혹시 신문 배달한 게 그거 때문이야? 학원비가 얼마야?"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으셨다.
"내가 다 알아서 할 게요. 엄마는 걱정하지 말아요."
난 그렇게 장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