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7화 (147/149)

 # 14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7화>

순간 관리자 놈의 놀란 표정이 보인다.

붉은 기운으로 이뤄진 얼굴로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니…….

그만큼 놈이 크게 당황하고 또 분노했다는 증거일 터.

내가 놈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쓰아압-

그리고 이내, 아찔한 느낌과 함께 내 몸이 차원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정신을 잃은 채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한쪽 무릎 아래로는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피는 멎었고 ‘초재생’에 의해 뼈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

초재생…….

루스가 떠올라 버렸다.

‘빌어먹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니다. 아직은 좌절할 필요가 없다.

기회는 분명히 남아 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털었다.

마음을 조금 추스르고 나자 주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방은 예전에 창조주를 만났던 곳과 비슷했다.

다만 훨씬 넓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넓긴 한데 얼마나 넓은지 가늠이 안 되었다.

하얀색인 벽과 바닥과 천장은 어떨 때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고, 어떨 때는 하루 종일 달려도 도달하지 못할 것처럼 멀어 보였다.

온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물리 법칙에서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오긴 왔군.’

창조주의 길 안내가 틀리지는 않았다.

기어코 나는 상위 관리 차원에 도착했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창조주는 이곳에 도착하면 내가 할 일을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구우우우우웅-

그때 내 몸속 어딘가에서 작은 진동이 시작되었다.

진동은 차츰 진폭을 키워 갔고, 한쪽 발로 버티지 못한 나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크윽…….’

몸이 거세게 떨리는 바람에 무릎이 바닥에 쓸려 고통이 밀려왔다.

몸만 떨리는 게 아니다.

바닥이, 천장이, 벽이.

상위 관리 차원이라 불릴 이 공간이 모조리 내 몸과 공명하여 떨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가 이 공간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세계의 정수가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건가?’

막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강력한 기운이 몸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신성하고 큰 기운이 흘러나와, 내 몸을 통과해 사방으로 뻗어 가는 느낌이었다.

쥐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던 세계의 정수가 상위 관리 차원과 만나 원래의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다.

잘려 나간 무릎이 강한 기운에 자극받아 미칠 듯이 아프고 가려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무릎이 재생(再生)되었다.’

내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완전(完全)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몸이 완벽한 상태를 되찾았음에도 세계의 정수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나라는 존재가 상위 관리 차원과 합일(合一)되고 있었고, 그것은 내게 압도적인 쾌감을 느끼게 했다.

“아아…… 아…….”

내 입에서 무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지, 나도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라로프…….’

내 눈은 새하얀 벽 어딘가를 향해 있었는데, 왠지 라라와 리첼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무언가를 걱정하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리첼의 옆에는 전직 물의 정령왕이 함께였다.

‘옛 조상의 기운을 빌려오는 기술이 정령술과 비슷하다더니.’

아마 그래서 인간계로 놀러 간(?) 물의 정령왕이 리첼의 곁에 머무는 듯했다.

옆으로 눈동자를 돌리자, 이번에는 진형기가 보였다.

그는 특유의 정치력 덕분인지 이미 서쪽 연합 국가의 수장들과 섞여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발언하는 모양새가 당당한 것이, 제법 권한이 있어 보였다.

‘역시, 저 자식을 서쪽으로 보내길 잘했군.’

아마 어떻게든 잘 살아남으리라.

진형기도, 그가 이끄는 플레이어들도, 그리고 서쪽 연합 국가의 사람들도.

다시 눈동자를 움직였을 때 보인 것은 엘프들이었다.

길잡이 에임든과 그 손녀인 아슬라가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스탄 백작이 이끌고 온 제국인이나, 남쪽 도시 국가의 시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피난 중이었다.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더 깊이.

숲을 따라 피난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더 깊은 곳, 동굴 속에는 드워프가 열심히 굴착 작업 중이었다.

동굴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위기 상황이 오면 엘프나 인간까지 동굴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잘하고 있었구나.’

한동안 직접 신경 쓰지 못했는데, 모두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편안하다.’

스르륵 잠들어 버릴 것처럼 나른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아까 전부터 정신을 놓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눈이 막 감길 듯한 상황에서도 내 감각은 더 넓게 퍼져 갔다.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대륙 깊은 곳까지 눈길이 닿았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생물들, 몬스터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가듯 보였다.

‘세상이…… 생각보다 더 넓었구나.’

두 번의 삶 동안에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녀석들과 함께 유유자적 여행 다닐 수 있는 날이…….

‘아!’

갑자기 찬물에 빠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온 세상을 굽어보고 있던 내 시선이 급히 어딘가를 비췄다.

그것은 어느 건물의 넓은 옥상 위였다.

그곳에 엄청나게 큰 거북이가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옛 친구님.’

그 충만한 생명력으로도 더는 버틸 수 없는 상처가 옛 친구의 몸 곳곳에 보였다.

그리고 옥상 어느 구석에 휴고가 구겨진 채 처박혀 있었다.

‘다행이다.’

휴고의 상태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죽어도 진작에 죽었어야 할 부상이었지만, 운 좋게도 나가떨어진 곳이 피 웅덩이였다.

‘정말 다행이다.’

또다시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아……!”

입이 열리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자 정신이 확연히 깨어났다.

내 눈길은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붉은 핏방울에 고정되어 있었다.

“루스!”

몸이 절로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여전히 내 눈에 옥상 정원의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전처럼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고개를 내저어 정신을 다잡으며 사방을 살폈다.

그러자 새하얀 벽이 다시 눈에 들어왔고, 옥상 정원의 모습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큰일 날 뻔했다.’

내 정신이 세계의 정수와 상위 관리 차원에 동화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대로 잠들었다면, 나는 이제까지의 일은 모두 잊고 세계를 유지하는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또 나를 구해 줬구나.’

핏방울이 되어서도 루스는 나를 도와주었다.

이제는 내가 녀석을 되살릴 차례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원하던 신격을 이미 얻었음을.

물론 아직 창조주처럼 시간을 되돌리거나 세상을 창조해 내지는 못한다.

그만한 권능을 발휘하려면 세계의 정수를 오롯이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쓸 수는 있게 되었다.’

이제 세계의 정수는 내 의지에 반응해 힘을 빌려준다. 오염을 정화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쓸모없던 때와는 달라졌다.

이제 길고 긴 과정이 끝나고, 열매를 맺을 순간이 왔다.

* * *

나는 여전히 보고자 하면 온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느끼고자 하면 어디든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맑아진 정신으로 다시 살핀 결과, 좀 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을 깨달았다.

“느리군. 1초도 안 흐른 것 같아. 이런 식으로 관찰하고, 관리하고 있던 거였어.”

처음에는 미처 몰랐지만, 온 세상이 마치 멈춘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옛 친구도 아직 살아 있었고, 휴고도 이 상태라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관리자도 여전히 끊어진 내 발목을 움켜쥔 채, 차원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자꾸 눈에 밟히는 루스의 핏자국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계획한 일을 시작했다.

‘계약.’

스킬을 발동했다.

세계의 정수가 반응하며 내게 기운을 전한다.

스킬 ‘계약’이 정수의 기운을 품고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대상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계약’이 성립합니다.]

[‘넬도르’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라넬디드’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넬리언’과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

세상 곳곳에서 내게 손길을 내밀어 왔다.

[‘라라’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리첼’과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

[‘아델 바두르’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게 동참해 왔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혹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엘프들을 기를 쓰고 살린 것도, 스탄 백작을 만나 제국인들을 규합하도록 한 것도.

플레이어와 서쪽 국가 사람들을 몬스터 지대로 피난시킨 것 역시도 다 지금을 위한 포석(布石)이었다.

내가 굳이 각 집단의 영도자들과 고집스럽게 계약을 맺으려 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창조주와 내가 세운 계획은 세계의 정수를 이용해 온 세상을 대상으로 ‘계약’을 시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계약에 적극적으로 응하도록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내가 각 집단의 영도자들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이날을 위해서…… 다들 열심히 해 주었군.’

[‘아돌’과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그루트’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누크’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

계약 성공을 알리는 수많은 메시지가 전해져 왔다.

멈춘 듯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메시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끝없을 것 같던 메시지가 기어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내 마음속으로 수많은 목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 해수 씨, 보고 싶어요. 힘내세요. 아자, 아자!

- 으하하, 해수. 악신인지 뭔지 후딱 처리해 버리게. 이 몸이 인정한 전사인 자네라면 할 수 있네. 얼른 끝내고 한잔해야지?

……

- 구원자님, 감사합니다. 부디 힘을 내 주십시오.

- 정해수 플레이어, 고맙고 미안하네. 자네에게만 너무 큰 짐을 맡긴 것 같아 계속 마음에 걸리는군.

……

- 정 형, 요즘 왠지 감이 좋소. 다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흐흐, 파이팅하시오!

……

나를 응원하는 지인들의 목소리가 이어졌고.

- 다, 당신이 구원자님이신가요? 부디 우리를 악신으로부터 지켜 주세요.

- 구원자님, 탑이 아빠를 잡아갔어요. 아빠를 구해 주세요.

……

내게 염원(念願)하는 기도가 들려왔다.

이제 내가 그들의 응원과 기도에 대답할 차례였다.

나는 텅 빈 손목을 바라보며 세계의 정수가 내뿜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진작에 사라졌던 팔찌가 손목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창조주의 마지막 힘을 받은 이 팔찌는 정수와 반응해 딱 한 번 능력을 발휘한다.

“전이.”

스킬을 사용하자, 팔찌가 황금빛을 내뿜으며 빛났다.

팔찌에서 가느다란 기운이 흘러나와, 나와 ‘계약’한 대상들을 향해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스킬 ‘도끼술’이 전이됩니다.]

[스킬 ‘합성’이 전이됩니다.]

[스킬 ‘회복’이 전이됩니다.]

……

[스킬 ‘가속’이 전이됩니다.]

[스킬 ‘어획량 증가’가 전이됩니다.]

……

[스킬 ‘피리 연주’가 전이됩니다.]

……

수많은 스킬들이 내게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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