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6화>
기척도 없었고, 보이지도 않았다.
당하는 순간 즉시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몸이 축 늘어졌다.
‘젠장, 제기랄!’
이 순간 다시 한번 확신했다.
내가 느낀 불길함은 단순한 예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존재하는 데 대해서, 세계의 정수가 내게 보낸 경고였다.
눈동자조차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았다. 포기하지 못할 것들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는 절대로 안 된다. 이렇게 끝낼까 보냐?’
몸이 말을 안 듣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해법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그때 내 머리를 움켜쥔 것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차례 내 제안을 거절했다지?]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볼 수 없는, 마치 시스템 메시지 같기도 하고 단순한 떨림 같기도 한 소리였다.
예상대로 놈은 빌어먹을 관리자가 맞았다.
놈이 손을 움직여 내 얼굴을 자신과 마주 보게 만들었다.
드디어 얼굴은 보는군.
개자식! 빌어먹을 놈.
만악(萬惡)의 근원.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눈에 들어오는 놈의 모습을 살폈다.
영웅이 토해 놓는 붉은 보석과 같은 색깔, 같은 느낌의 기운.
그것이 모여 넘실거리며, 흩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관리자가 기어코 힘을 회복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영웅을 급하게 계속 보낼 때, 놈이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자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놈에게 필요한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 또한 동시에 느꼈다.
그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건만…….
‘1분만, 아니, 10초만 더 있었어도. 젠장!’
[굉장히 아쉬워하는 얼굴이군. 맞아, 아슬아슬했지.]
[네놈이 그 정도의 힘을 동원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게다가 정령왕을 죽여 버렸는데도, 굉장히 빨리 해결하고 이곳으로 올라왔더군.]
[너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 예측을 벗어나는 존재야. 특별해. 재밌기도 하고.]
관리자의 얼굴이 마치 웃는 것 같은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너한테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지. 내게 세계의 정수를 넘기면, 널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지.]
무슨 소리지?
비록 내가 패배하고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지금 상황은 관리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런데도 놈은 내게 협상을 제안하고 있다.
‘뭐 때문이지? 정말 저놈 말대로 내가 특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창조주를 속이고 뒤통수를 칠 정도로 음흉한 놈이다.
회귀 전 나를 내세워 정수를 모으게 한 것도 놈의 음모다.
[너무 고민할 것 없어. 네게 불리한 건 전혀 없는 제안이니까.]
[너는 너의 세상으로 가고, 나는 내 세상을 다스리는 거야.]
[아, 일행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원하는 만큼 같이 데리고 가게 해 주지.]
[이건 네가 그만큼 날 재밌게 해 줘서 얻은 특혜야. 기회라고.]
놈은 마치 진짜 내가 흥미로워서 그렇다는 듯 말하고 있지만, 저건 개소리다.
나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두 번째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와 있는 몸이다.
저런 사탕발림 따위 충분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
놈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자신의 예측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저런 제안을 한다고?
‘개가 웃을 소리지.’
그리고 그 개소리에서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놈은 완벽하지 않다.
분명히 놈에게 부족한 것이 있고, 그 때문에 내게 저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놈이 원하는 건 시종일관 한 가지였다.
세계의 정수.
‘역시…… 그런 건가?’
[자, 이제 입은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대답해 봐.]
놈이 태연한 척 말을 걸 때, 나는 확신했다.
‘나를 죽이면 내게서 정수를 온전히 추출할 자신이 없군.’
[계속 입 다물고 있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어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몇 명이나 데려갈 수 있지? 내가 살던 세계로?”
[글쎄, 원한다면 마음껏 데려가도 좋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정수를 내게 넘기고 나머진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협상하는 척 말을 걸어 놓고 놈이 떠드는 동안, 나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놈의 행동으로 보아, 놈이 내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옛 친구 님, 브레스 가능합니까? 안 돼도 어떻게든 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 해 볼게요. 그런데 도대체… 저, 저자는…….
나는 떨리듯 전해 오는 옛 친구의 말을 끊었다.
- 괜찮아요. 이놈이 바로 우리의 적입니다. 놈이 강하리란 것은 이미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신호하면, 곧바로 브레스를 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네놈,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군.]
붉은 기운이 분노한 듯 일렁였다.
상관없다. 오히려 놈의 조그마한 동요라도 내겐 천금 같은 기회가 될 테니까.
나는 마비가 풀린 입으로 놈에게 쏘아붙였다.
“이 쓰레기 같은 배신자 자식아. 네놈 때문에 내가 겪은 일이 있는데, 네놈한테 정수를 넘길 것 같냐?”
관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섬찟한 악의와 분노가 느껴졌다.
동시에 나는 옛 친구에게 뜻을 전했다.
- 지금입니다. 쏘세요!
고오오오오-
옥상 반대편 저 먼 곳에서 가공할 기운이 모여들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아-
초록색 빛줄기가 관리자를 노리고 쏘아졌다.
[이 하찮은 것들이!]
관리자가 브레스 쪽으로 손을 털듯이 휘저었다.
파스스스-
마치 모닥불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관리자의 손길에 닿은 브레스가 꺼져갔다.
그 순간,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인벤토리에서 엘파바의 얼음 폭탄을 꺼내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입으로 폭탄을 물고는 놈에게 뱉었다.
“퉤- 뒈져라!”
쩌저저저적-
얼음 폭탄이 코앞에서 터지며 주위가 얼어붙어 갔다.
순간적으로 관리자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얼음 폭탄의 위력 때문은 아니었다.
관리자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빗나가며 생긴 약간의 당황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얼음 폭탄은 내게도 피해를 끼쳤다. 몸이 얼어붙고 갑각이 갈라졌다.
그러나 내가 입은 피해는 곧바로 옛 친구에게 옮겨졌다.
스팟-
나는 즉시 계단 위를 향해 공간을 건너뛰었다.
일렁이는 차원문이 눈앞에 있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제기랄!’
내 몸은 조금 전부터 멈춰 있었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들다니, 죽여 인형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관리자의 손이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스러져 버렸다.
관리자가 뒤편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멀리서 폭음이 들리더니, 내 몸을 둘러싼 장갑이 벗겨진다.
- 옛 친구님, 옛 친구님!
대답이 없다.
죽은 것일까?
더 중요한 것이 있지만, 옛 친구의 안위가 끊임없이 머리에서 맴돈다.
이를 악물고 저항해 보려 했지만, 이를 악물 수도 없었고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내 몸은 다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내게 뭐가 더 남았지?’
코인이 모자라 영웅을 소환할 수도 없다.
인벤토리에 쓸 만한 아이템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세계의 정수?
아까부터 어떻게든 정수의 힘을 빌려 보려 했지만, 정수의 힘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이 있다면…….’
제발 지금 떠올라 주었으면.
상황을 타파할 무언가가, 제발 내게 있었으면…….
나는 간절하게 빌었다.
더 늦으면 세상이 멸망한다.
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고 만다.
타다다다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죽어라-!”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낯익은 폭음이 뒤따른다.
콰콰콰콰콰쾅-!
[버러지들부터 처리해야 이놈이 포기하겠군.]
관리자가 내 머리를 아까 전처럼 집어 들어 방향을 돌렸다.
달려오며 망치를 휘두르는 휴고가 눈에 들어왔다.
관리자에게서 뻗어 나가는 붉은 기운도 보였다.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세상이 느려져, 한 장면 한 장면 내 눈 속으로 전달되었다.
붉은 기운이 휴고의 망치에서 뻗어 나온 멸세폭의 기운을 녹여 버리고 휴고를 후려쳤다.
멀리 날아간 휴고는 구석으로 처박혔다.
온몸의 모든 핏줄이 터져 버린 것처럼 피를 흘려 대고 있었다.
‘안…… 돼……!’
내 생각조차 느려져 버린 것일까?
머릿속에서 울리는 절규조차 천천히 흘러나왔다.
휴고에게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휴고의 그림자 뒤에 숨어 따라오던 인영(人影)이 눈에 들어왔다.
루스는 휴고가 피떡이 되어 나자빠지는 순간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새하얗게 타오르는 양손을 관리자에게 내뻗었다.
콰르르르르르-
압도적인 화력이 쏟아진다.
언젠가 발록이 내뿜던 것보다 더 강한 화염이 관리자를 향해 날아간다.
저 정도면 다 태워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적이 관리자만 아니었다면.
놈이 신으로서 가졌던 힘을 되찾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팟-
허망하게도, 관리자의 단 한 번 손짓에 그 강한 불길이 사라졌다.
이제 저 빌어먹을 손이 다시 휘둘러지면, 루스도 휴고처럼 피를 뿌리고 쓰러지겠지.
예상대로 관리자의 손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루스는 쓰러지지도, 튕겨 나지도 않았다.
루스의 몸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이내 내 곁에서 나타났다.
마치 불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새하얀 루스의 몸이 부정형으로 일렁였다.
붉게 일렁이는 관리자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저 정도로 성장했었나? 저런 것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람, 뿌듯함, 걱정, 불안.
찰나의 순간 갖가지 감정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루스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움켜쥔 관리자의 팔을 잡아챘다.
파지지직-
하얀 불꽃이 붉은 기운을 불사르기 위해 노력한다.
‘안…… 돼……!’
다시금 온 세상이 느려졌다.
느리게 머릿속을 헤집는 절규와는 달리 순식간에 날아온 관리자의 반대편 손이 루스의 몸을 파고들었다.
콰직-
새하얀 일렁임이 잦아들고, 육신이 제대로 갖춰진 루스의 입이 움직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말하는 모양새는 수없이 보아 와서 익숙하다.
독순술 따위 따로 익히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
- 주인, 고마웠어.
- 나는 괜찮으니까.
터, 트, 려.
‘이 X발 X같은 관리자, 창조주 X발 놈들아!’
다 싫다.
개 같은 신 놈들.
남의 운명을 유린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된 것 아닌가?
내가 기어코 여기서 루스를 터트려야 하는 건가?
그러고도 세상을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진정 그러길 바라는가?
창조주든 누구든 좋으니 대답을 해 봐라.
그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루스의 입술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 제발.
그래, 알았다.
터트리마.
너를 터트리고 나는 신이 되겠다.
그래서 관리자를 쳐 죽이고, 세상을 지키고.
너를 되살리겠다.
‘환수 폭발.’
콰콰콰콰콰아아앙-!
루스는 불꽃처럼 폭발했다.
또다시 예측 불가의 상황에 관리자의 몸이 일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몸의 마비가 풀렸다.
내게 마지막 기회가 생겼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점멸.’
차원문은 점멸로 바로 뛰어들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차원문에 닿아 그것의 작용을 받아야 그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점멸로 이동하기 충분한 거리였지만, 그래서 나는 차원문 너머의 공간으로 단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내 손이 차원문에 가 닿았다.
흡력(吸力)이 느껴짐과 동시에 몸이 쑥 끌려 들어갔다.
팔꿈치까지 빨려 들어갔을 때, 내 몸이 다시 덜컥 멈춰 섰다.
[이 벌레 같은 것들이……! 이제 필요 없다. 그냥 죽어라!]
관리자는 진짜 화가 많이 난 듯, 내게 기운을 뻗으려 했다.
진짜 죽일 생각인지, 아니면 머리통이라도 잘라서 세계의 정수를 뽑아낼 연구라도 할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놈보다 더 화가 많이 난 것은 나다.
딱 그만큼, 내 손이 놈의 손보다 빨랐다.
놈이 내게 손을 막 휘두르기 직전, 강기공을 잔뜩 머금은 내 손이 먼저 휘둘러졌다.
콰지직-
파열음과 함께 피가 쭉 튀어 올랐다.
뼛조각이 나부꼈다.
내 왼쪽 발목을 구속하던 관리자의 손길이 내게서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내게 왼쪽 발목은 없었으니까.
강기공을 머금은 내 손이 내 왼쪽 무릎을 짓이겨 뜯어내어 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