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3화>
루스 때와 비슷했다.
정령 또한 황가수호대의 기운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영웅에게서 나온 붉은 보석을 꺼내 정령에게 내밀었다.
“아, 이거라면 될 것 같아요.”
정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보석을 받아 들었다.
다시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영웅에게서 나온 보석들이 하나씩 정령에게로 넘어갔다.
이윽고 보석이 바닥을 보일 무렵.
휘이이잉-
사방에서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어느 순간 회오리를 이루며 정령의 주위를 강하게 맴돌았다.
이윽고 두꺼운 바람의 장막이 정령을 감쌌다.
압도적인 스탯으로도 그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번쩍-!
다시 푸른빛이 한 번 번쩍이더니, 이윽고 정령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의 머리는 사라지고, 남자아이의 얼굴이 그곳을 대신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렇게 성장했어요.”
정령은 예의 바른 태도로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이제 네가 정령왕이 된 거냐?”
“네, 이제 제가 바람의 정령왕이에요.”
최소한의 자격만 갖춘 상태다 보니 다른 정령왕들에 비해 굉장히 약했지만, 어쨌든 정령왕이기만 하면 된다.
내 입장에서는 표식만 받으면 되니까.
“아저씨는 인간이신데 이곳에 계신 걸 보면, 표식이 필요하신 거죠?”
정령왕이 되면서 지식을 주입받은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을 곧장 꿰뚫어 보았다.
옆에서 휴고가 ‘아저씨’라는 단어에 실소를 터트리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무시하고 정령왕에게 대답했다.
“그래, 시험을 시작하자. 시간이 없다.”
정령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또 오래 걸리면 곤란한데.’
내가 미간을 찌푸리려는 찰나, 정령왕의 입이 열렸다.
“지금 이곳에는 갓 태어난 정령들만 있어요. 저를 도와 정령들을 돌볼 상급 정령을 하나 만들어 주세요.”
썩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다. 어렵지도 않고.
그러나 시간이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었다.
‘연기충천부도 써 버렸고. 반지의 스킬도 다시 사용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령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는지 방법은 아니까, 저한테 보석만 주시면 시험을 통과한 거로 해 드릴게요.”
“그게 가능해?”
“네, 가능할 것 같아요.”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정령이 말을 덧붙였다.
“상급 정령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시험을 내리면 되죠.”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어째 막 태어난 녀석이 정령왕 중 제일 똑똑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기에 곧바로 인벤토리를 뒤져 남은 붉은 보석을 모조리 꺼내 정령왕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정령왕은 한동안 보석의 기운을 느끼더니,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이제 시험은 통과했어요.”
그와 동시에 자그마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왔다.
손을 통해 청량한 기운이 밀려들어 오더니, 가슴 어림에 자리 잡는 것이 느껴졌다.
“고맙다.”
머리를 잘 써 방법을 생각해 낸 것도, 빠르게 시험을 통과시켜 준 것도 눈앞의 작은 정령왕 덕분이었다.
그 덕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으니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아저씨가 정령계를 다시 살려 내 주셨잖아요. 저를 성장시켜 주시기도 했고.”
정령왕이 되면서 내가 정령계를 재가동한 것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면 다 해 드릴게요.”
정령왕이 방긋 웃으며 한 대답 덕에 나도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나와 계약해 줄 수 있을까?”
“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정령왕은 가타부타 설명도 요구하지 않고 내 제안을 수락했다.
- 대장 말을 엄청 잘 듣는군요. 꼭 조카 같습니다, 흐흐.
휴고가 웃으며 목소리를 전해 왔지만, 무시하고 정령왕에게 집중했다.
- 아, 이렇게 하는 거였군요. 이제 알겠어요.
의사소통 방법을 설명한 후, 앞으로 해 주어야 할 일은 이야기하는 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막 떠나려 할 때, 정령왕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저를 성장시켜 주신 것도, 이곳을 되살려 주신 것도요.”
그 말에 내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여물지 못한 정령왕이었지만, 정령계에 대한 책임감은 몇몇 다른 정령왕들보다 나았다.
루스의 말에 따라 한 선택이 옳았던 것 같았다.
“그래, 나도 계약해 줘서 고맙다. 또 보자.”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정령왕과 짧은 작별을 끝으로 우리는 다시 달렸다.
마지막을 향한 엘리베이터로.
* * *
“저희도 타도 됩니까, 대장?”
마지막 엘리베이터 앞에서 물어 온 휴고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바로 상위 관리 차원으로 연결되지는 않을 거야.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지.”
그리고 그 문은 표식을 가진 자만이 통과할 수 있을 터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휴고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걸로 끝일까요?”
그 말에는 불안함과 근심이 담겨 있었다.
이제까지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관리자의 힘이 거의 다 회복되어 간다는 증거가 이곳저곳에서 보였으니까.
당연하게도 놈이 내가 상위 관리 차원으로 편히 들어가게 둘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무슨 일이 있든 버티고 버텨서 살아만 있어라. 내가 세계의 정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다 해결될 거야.”
“……예. 대장만 믿습니다.”
잠시 마음을 다잡은 휴고가 애써 웃으며 내게 대답해 왔다.
“괜찮아, 주인. 다 잘될 거야. 나만 믿어.”
그때였다.
루스가 소매를 잡아당겨 온 것은.
“그래, 너만 믿는다.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루스 덕분이지.”
“히히.”
해맑게 웃는 녀석을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나는 엘리베이터 문을 노려보며 그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리고 보이는 엘리베이터 밖에는, 하나의 정령계가 통째로 들어갈 만큼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옥상이군요?”
마치 빌딩 옥상에 조성된 옥상 정원을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흐응, 공기가 좋아!”
이어 들려온 루스의 말이었는데, 진짜 공기의 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네 가지 정령계의 기운이 모두 충만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마득히 먼 맞은편에 설치된 계단이었다.
옥상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계단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대장, 저기 차원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휴고의 말대로 그 계단의 끝에 차원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쯧. 굳이 저렇게까지 만들어야 하나?’
정령계를 빌딩처럼 만들어 놓더니, 상위 관리 차원으로 가는 차원문은 ‘천국의 계단’이라도 된 양 높다랗게 만들어 두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창조주의 악취미를 욕하려다가, 창조주가 겪었을 고독을 생각하고는 그만두었다.
그런 걸 길게 생각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고.
그렇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양손을 옆으로 뻗어 따라 나오려던 일행을 멈춰 세웠다.
‘역시 그냥 보내 줄 리가 없지.’
아니나 다를까, 은신해 있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습이 완전히 보인 것은 아니었고, 대신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란슬롯(SS. 검의 주인) - …….]
[발라딕 바간(SS. 일인성체) - …….]
[시모 화이트(SS. 총술사) - …….]
[데모릭스(SS. 요새 전문가) - …….]
[쿠틸(SS. 정령술사) - …….]
……
‘간파의 막’에 의해 영웅들의 이름과 스킬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줄줄이 떠오르는 놈들의 수는 어림잡아도 수십은 되어 보였다.
회귀 전과 후에 내가 소환했었던 영웅은 물론, 아예 본 적이 없던 놈들까지 나타나 있었다.
게다가 영웅들 주변에 황가수호대도 새까맣게 깔려 있었다.
‘이 정도의 병력을 보낼 힘이 있었던 건가?’
회복이 끝났으면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아직 힘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 병력을 보냈다면.
‘관리자에게 기운이 남아돌거나, 여기가 아니면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몇 가지 추측이 떠올랐지만, 진실이야 중요치 않았다.
‘어쨌든 저놈들을 처치해야 저곳으로 갈 수 있겠지.’
높은 계단 끝, 하늘에 닿을 듯 만들어진 차원문을 흘끔 살피며 생각했다.
‘그냥 들이받아서는 승산이 없다.’
가진 전력을 모두 사용한다.
그러고도 도움을 받아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는…….
‘아니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가만히 멈춰서 있자, 숨어 있는 놈들 사이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은신이 간파당했음을 놈들도 눈치챈 것 같았다.
“이거 눈치가 빠르군.”
목소리와 함께 숨어 있던 놈들의 면면이 드러났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적들의 모습에 휴고와 루스가 움찔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앞서 입을 열었던 목소리, 란슬롯이 다시 말했다.
“우리의 모습을 봤으면 알겠지. 위대한 분께서 곧 힘을 되찾으시고 세상에 축복을 전하실 것이다. 그러니 정수를 곱게 바쳐라.”
란슬롯은 얼토당토않은 말투로, 마찬가지의 내용을 지껄였다.
하지만 나는 되쏘아 주기보다는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뭐지? 나를 살려 줄 건가?”
“당연하지. 위대하신 분께서는 한없이 자애로우시다. 네가 그분께 정수를 바치고 충성을 다한다면 당연히 그분께서 너를 어여삐 여기실 것이다.”
관리자가 만들어 낸 인형이나 할 미친 소리였지만, 나는 화내는 대신 다시 놈에게 말을 걸었다.
“어여삐 여긴다느니, 그런 추상적인 대답으로는 모르겠는데. 구체적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말해야 나도 좀 더 긍정적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겠어?”
“이 건방진 놈이! 감히…….”
란슬롯이 분노를 토해 내려 할 때, 나는 놈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그럼 그냥 확 다 터트리고 죽어 버린다? 그럼 정수고 뭐고 다 사라지는 거야!”
사실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죽었을 때 정수가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모른다. 창조주에게 들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이 미친놈! 무슨 헛소리냐? 정수에 문제가 생기면, 네놈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아니야, 나랑 정수는 운명 공동체라고. 정수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소리야. 그러니 네가 협박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슬슬 시간을 끌기가 벅찼기에 나는 아무 말이나 대충 떠들었다.
놈들도 내 의도를 지금쯤이면 알아차렸으리라.
- 준비됐어요.
다행히 기본적인 준비는 끝났다.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나?’
란슬롯이 검을 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다른 영웅 놈들도 속속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다.
수백 명의 황가수호대도 눈빛을 빛내며 새빨간 오러를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나는 겉으로 들리지 않게 소리쳤다.
- 지금입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시전한 스킬 ‘물’에 의해 허공에 물방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물방울에서 워젤이 튀어나왔다.
네 가지 기운이 모두 충만한 곳이다 보니 대량의 물이 없어도 워젤이 나타날 수 있었다.
다행히 지닌바 힘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워젤이 나타나는 순간, 반지 ‘정령의 숨결’에 내장된 스킬을 사용했다.
워젤의 기운이 순간 증폭되었고, 물방울은 해일이 되었다.
고오오오오-
거대한 파도가 허공에서 생겨나 영웅들을 덮쳐 갔다.
각종 방어막과 성벽 등이 생겨나 해일을 막아섰다.
채앵- 콰지직-
영웅들이 만든 방어 기술들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렸다.
‘몰아붙인다!’
워젤의 해일이 강하지만, 이것으로 놈들을 끝장낼 수는 없다.
기회가 왔을 때, 놈들에게 최대한 타격을 줘야 한다.
- 랜덤 영웅 소환 (9091300/1000000)
다행히 내게는 아홉 개의 강력한 폭탄이 있었다.
나는 해일이 휩쓸고 간 방향을 살폈다.
워낙 넓은 옥상이었던 탓에 해일의 범위가 미치지 못한 곳도 많았고, 그쪽에는 여지없이 영웅들이 몸을 피해 있었다.
‘랜덤 영웅 소환.’
당연히 내 소환 마법진이 생겨난 곳은 그런 곳들이었다.
가운데를 가로지른 해일을 피해 양쪽으로 나뉜 영웅의 무리.
그곳에 양쪽에 세 개씩 소환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소환은 즉시 이뤄졌고, 영웅들의 혼란이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고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환수 폭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