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1화 (141/149)

 # 14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41화>

절벽과 낭떠러지 사이로 이어지는 바람의 정령계의 절벽 길은 어느 순간 더는 절벽 길이라 불리기 힘든 형태로 변한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길 한쪽 면에 붙어 있는 절벽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양쪽의 아찔한 낭떠러지 사이로 난 좁은 길.

그 끝에는 동그랗고 평평한 모양의 산봉우리가 있었다.

평소에 바람 소리만 요란하던 그 산봉우리 위에서 오늘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탕- 타탕-

정령계에 어울리지 않는 총성이 산봉우리 전체를 울렸다.

“그어어어…….”

이미 죽었으나 죽지 못한 자들이 움직이며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원념을 토했다.

“이게 무슨 악랄한 짓이냐!”

날카로운 인상의 마른 몸을 가진 청년.

백 년 전부터 정령왕 자리를 지켜 오고 있던 바람의 정령 플룸은 노성을 내질렀다.

어디선가 나타난 인간들, 그리고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탑이 바람의 정령계를 망치고 있었다.

아니, 잡아먹고 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위대하신 분의 현신을 위해 밑거름이 되어라.”

단조롭지만, 광기와 광신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대답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부리는 사악한 네크로맨서의 목소리였다.

서걱-

플룸은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달려드는 구울 한 마리를 처리한 후 다시 소리쳤다.

“위대하신 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정령계를 이리 침탈하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세상의 온당한 주인께서 그러하시겠다면, 정령계가 아니라 그 어느 곳이라도 그분께 모든 것을 바쳐야 마땅하니라.”

“이 미친놈!”

플룸은 광신도 같은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네크로맨서와의 대화를 포기했다.

투타타타타탕-

그때 구울과 시체 골렘 뒤편에서 총성이 연발로 울렸다.

총술사 시모 화이트의 공격이었다.

플룸의 주위를 휘감은 바람의 막이 맹렬히 회전하며 장막(帳幕)을 만들었다.

믹서기 같은 바람의 칼날이 총알을 산산조각 내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조각난 총알 속에서 시커먼 액체가 확 퍼져 나갔다.

사방팔방으로 흩날린 액체에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윽-!”

플룸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온 것은 그때였다.

‘독이다.’

정령왕의 정순한 기운으로도 정화되지 않는 지독한 독성 물질이 검은 액체에 담겨 있었다.

안 그대로 저 뒤편에 세워진 탑에 기력을 빼앗기던 플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대로는…… 정령계가 망한다.’

정령왕이라고는 하나 사실 플룸은 이곳 정령계의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한 가지 주어진 임무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른 정령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고 자란 정령계에 대한 애착만은 왕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강한 플룸이었다.

‘내가 소멸하더라도, 저놈들을…… 저 탑을 부숴야 해.’

그래야 정령계가 존속할 수 있다.

탑이 처음 나타났을 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놈들은 플룸의 손에 모조리 죽었다.

네크로맨서에 의해 다시 살아나 버렸다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적들의 남은 전력은 총술사와 네크로맨서였다.

‘실질적인 전력은 저 두 놈이야. 저 두 놈만 어떻게든 죽이면 돼.’

플룸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처럼 힘을 갉아먹히며 시간을 끄는 것은 절대로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비록 이곳이 플룸의 홈그라운드인 바람의 정령계일지라도 말이다.

플룸이 전력을 끌어 올리자 온 세상이 숨죽였다.

사방에 흐르던 바람의 기운이 모두 플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고, 산봉우리에 한 점의 바람도 불지 않는 시간이 짧게 흘러갔다.

그리고.

콰르라라라라라-

광풍이 산봉우리 위를 휘감았다.

플룸의 주위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주위를 감싸고 작은 회오리바람 수십 개가 생겨났다.

마치 왕을 호위하는 기사처럼.

플룸이 손을 내젓자 작은 회오리바람들이 기마(騎馬)로 돌진하는 기사처럼 적들에게 쏘아져 갔다.

그워어어어-

시체 골렘이 사지가 뜯겨 나가며 괴성을 내질렀다.

그 옆에 있던 황가수호대의 시체로 만들어진 좀비와 구울들은 소리 낼 틈도 없이 갈려 나갔다.

“반항이 거세군요.”

네크로맨서의 한마디가 있고 난 뒤.

콰콰앙! 콰콰아아앙-!

산봉우리 위의 시체들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강력한 폭발이 회오리바람의 힘을 상쇄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플룸이 입술을 짓씹었다.

‘어떻게든 한 놈이라도 처리한다. 그래야…….’

상황이 여의치 않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놈이라도 처리해야 그다음을 내다볼 수 있다.

플룸은 다시 한번 바람의 기운을 끌어들였다.

평소 바람의 기운이 가장 강한 이곳에서도 저 빌어먹을 탑 때문에 평소의 절반도 힘을 쓰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사력을 다한 정령왕의 저력은 강했다.

플룸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하늘로 치솟았다.

마치 무지개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휘어진 바람은 뒤편에서 총을 쏘던 화이트를 노렸다.

다양한 효과를 가진 총탄을 바탕으로 원거리에서 화력은 물론 지원까지 담당하는 영웅이 화이트였다.

그러나 화이트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방어력이 강하지 못하다는 것과 특별한 이동 스킬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화이트는 사력을 다한 정령왕의 공격을 피해 내지 못했다.

회오리바람이 화이트의 몸을 강타하는 순간, 살점이 튀고 피가 흩뿌려졌다.

“헉, 헉- 이제. 허억- 한 놈.”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플룸은 네크로맨서를 노려봤다.

정령계를 지켜 내겠다는 사명과 각오를 담고서.

하지만 플룸의 눈에 비친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방금 피륙이 찢어져 숨이 끊어졌던 총술사가 잿빛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 이상 죽지 않는 병사가 되어서 말이다.

“제기랄…….”

플룸은 절망을 느꼈다.

* * *

이 세계에 끌려오기 전 지구에서 나는 당연히 정전을 겪어 보았다.

갑자기 온 동네가 깜깜해져 버린 상황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밝음을 유지할 수 있던 현대인에게는 제법 큰 상실감을 느끼게 했었다.

그러나 정전으로 느낀 상실감은 지금 느낀 감정에 비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었다.

“대, 대장,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휴고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상이 꺼져 버리는 느낌은 정말 끔찍했다.

그 언젠가 수도를 집어삼키던 관리자의 끔찍한 마법보다도 더했다.

시야가 깜깜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산소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혹은 태양이 없어져 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바람의 정령계가…… 멸망했다.”

나조차도 조금 놀랄 정도로 딱딱한 음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느꼈던 끔찍한 감정이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묻어 나온 듯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정령들은 다 어떻게 된 거고요. 설마, 다 잡아 먹힌 겁니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휴고의 말대로 이곳엔 더 이상 단 하나의 정령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은 애초에 정령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곳에 정령이 완전히 사라지면, 지금처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기운이 멎는다.

더는 그 어떤 정령도 태어나지 않고, 성장하지도 못한다.

“그럼 표식은…….”

휴고가 말꼬리를 흐렸다.

절망감이 녀석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하지만 어느새 고개를 거세게 내저은 휴고의 눈빛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대장, 무슨 방법이 있지요? 대장은 해법을 알고 있지요?”

저 무한한 신뢰에 어떻게 보답해 주어야 할까.

나는 웃었다.

“물론.”

하지만 상황이 다급해졌다.

나도 바람의 정령계가 완전히 망해 버릴 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었다.

그럼에도 내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운이 좋았다. 아니, 창조주의 안배가 기가 막힌 건가? 이런 상황에 딱 맞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니.’

내게는 이 사태를 해결할 완벽한 해법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정령계가 망하는 것을 상정하고 준비된 방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내 손으로 정령계의 전원을 내릴 일이 없어 다행이군.’

창조주가 가르쳐 준 방법은 잔인했다.

정령왕의 시험을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경우.

그리고 정령왕의 성정이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어서 시험의 해법이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경우.

그때 창조주는 내 손으로 정령계의 모든 정령을 처치해도 좋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 경우에도 지금과 같이 정령계의 시스템이 정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꺼진 건 다시 켜면 되는 법이야.”

이 경우에는 부팅이라기보다는 포맷에 좀 더 가깝겠지만.

* * *

절벽 길을 열심히 달리며 조금 전 획득한 아이템을 떠올렸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아이템 추출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다급하게나마 아이템 추출을 시전했고, 결과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데모릭스와 원굉도에게서는 붉은 보석이 나왔지만, 아나투스에게서는 아이템이 드롭되었다.

[초기화 마법진 스크롤 로브(S. 의복)]

- 사용 시, 사용자의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초기화한다. 뛰어난 마법사에 의해 설계되었으나, 너무 복잡한 술식(術式) 탓에 크기가 몹시 커졌다. 들고 다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의복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긴 이름만큼이나 좋은 아이템이다.

단점은 단 하나. 스크롤인데 너무 커서 옷으로 만들어졌고, 그 결과 몸에 걸치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나야 뭐 인벤토리가 있으니 상관없지.’

내 스킬 중 재사용 대기 시간의 영향을 받는 것이 ‘천벌’ 정도밖에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게 로브를 입고 다닐 생각 따위는 없으니, 아이템은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옆에 있던 절벽이 사라졌다.

원래라면 더욱 세찬 바람이 불어와 마땅하겠지만, 이제 이곳에는 바람 한 점 없다.

하늘 다리 같은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윗부분이 평평하게 다져진 둥그런 산봉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생명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엄청 치열했나 보네요.”

산봉우리 위는 난장판이었다. 이곳저곳 파이고 부서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움푹 파인 바닥 틈에서 손가락만 한 물건을 하나 주워 들었다.

손가락만 한 물건은…… 손가락이었다.

혀를 차며 그것을 휙 던져 버리고 바닥을 좀 더 살피니,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이 많았다.

부서진 뼛조각, 떨어진 살점.

수많은 인간이 이곳에서 죽었다는 증거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런데 막상 주인을 찾을 수 있을 만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없었다.

“다 부서졌군.”

“제대로 된 시체가 진짜 한 구도 없네요. 수가 엄청 많은 것 같은데. 황가수호대겠죠?”

이곳에 이 정도 숫자의 인간이 있을 리는 없고, 인간의 형체를 한 고위 정령이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수는 불가능하다.

나는 휴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휴고가 내 뒤를 따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정도 흔적을 남길 정도면, 정령왕이겠죠?”

“그래, 정령왕도 아마 여기서 죽었을 거야. 영웅들의 시체는 없는 것을 보면, 놈들은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겠군.”

“…….”

“그만 가자. 여기서 더 할 일은 없다.”

산봉우리는 정령계의 끝이 아니었다.

외길이 뒤편으로 다시 이어져 있었는데, 아마 저기 어딘가에 엘리베이터가 있을 것이다.

다시 길을 따라 잠깐 나아갔을 때, 외길이 끝나고 자그마한 공터가 나타났다.

예상대로 그곳에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모처럼 인기척도 느낄 수 있었다. 영웅 둘이 느긋한 모습으로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비크, 그리고 음?”

[시모 화이트(SS. 언데드 총술사) - 화염탄, 관통탄, 빙결탄.]

나는 무기를 꼬나 잡는 휴고와 루스에게 작게 일렀다.

“총술사는 언데드다. 화염, 관통, 빙결탄만 쓸 거야.”

일행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에겐 오히려 나쁠 것 없는 상황이다.

언데드는 살아생전만큼의 스킬을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고통과 피로가 없다는 장점도 있지만 말이다.

검을 뽑아 들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화염이 넘실거리며 추는 순간, 나는 뛰쳐나가려 했다.

내 움직임을 막은 것은 목소리였다.

“정해수, 이제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 않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