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9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나는 차분하게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령왕님, 아까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 노즈도름 님이 상대한 드라코리치도 악신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내가 노즈도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자 정령왕이 반응을 보였다.
사실 재앙은 창조주가 만든 것이지만, 굳이 사실대로 말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적당히 각색하여 재앙을 퍼트린 것은 악신이며, 세상을 멸망시킬 목적이었다고 설명해 나갔다.
완벽한 진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야기 말미에 덧붙여…….
“노즈도름 님이 살아 계셨다면,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악신에 맞섰을 겁니다.”
“……!”
여전히 말없이 생각에 잠긴 정령왕이었지만, 표정은 전과 확연히 달랐다.
아련한 그리움과 더불어 사명감 같은 것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나는 설득의 종지부를 찍고자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했다.
“정령왕님,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노즈도름 님이 생명을 바쳐 지킨 세상입니다. 이대로 망하지 않도록…… 부디 도와주십시오.”
“알……았어요. 제가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네요. 그분이 진정 중요히 여긴 게 뭔지 잘 알면서…….”
드디어 정령왕의 수락이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발생한 난관이었지만, 결국 해결해 냈다.
감정을 자극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방식은 좀 치졸할지도 모른다.
정령왕의 마음의 상처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세상을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저 녀석들을 살리는 일이고.’
나는 휴고와 루스를 생각하며 마음을 굳건하게 다지고, 정령왕에게 ‘계약’을 시전했다.
이윽고 정령왕과의 계약이 완료되고, 그에 따른 설명까지 간략히 끝이 났다.
“감사합니다, 정령왕님. 이제 저희는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도 땅의 정령계를 대표해 감사드릴게요. 부디 하시는 일 꼭 이루시길 빌어요.”
그렇게 땅의 정령왕과 작별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 * *
한참을 달려 엘리베이터에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보자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보일 장면은 어떤 것일까?
‘예상이 빗나가면 좋겠건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휴고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대장, 무슨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 하십니까?”
“잠시 휴식하자.”
내 말에 휴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베이터까지 서둘러 달려와 놓고 이제 와 휴식을 취하자니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먼저 자리에 앉으며 이유를 설명해 줬다.
“아마, 다음 층은 상황이 안 좋을 거야. 언제 전투가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조금이라도 쉬고 진입한다.”
말과 함께 식량 자루를 꺼내 일행에게 전하고, 나도 간단히 요기를 시작했다.
내 말 때문인지 휴고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하지만.
“밥이다-! 밥, 밥, 밥!”
식량 자루를 받아 들고 콧노래를 부르는 루스의 목소리에 딱딱하던 휴고의 표정이 풀렸다.
그 모습에 나도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많이들 먹어라.”
“응, 주인도 많이 먹어!”
“맛있게 드십시오.”
루스 덕분에 짧은 휴식 시간이 한결 즐겁게 흘러갔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바람의 정령계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예상대로군, 쯧.’
생명체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밖으로 나오며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지만, 기운 한 점 느껴지지 않는 건 여전했다.
“대장, 여기도 탑의 침공을 받았나 봅니다.”
“그래, 서두르자.”
나는 짧게 대답한 후 앞장서 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길은 하나뿐이었다.
아니, 길이 아니라 걸어갈 수 있는 방향이라고는 한 방향뿐이었다.
“후우- 아찔하네요.”
휴고가 옆을 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폭이 십 미터도 안 되는 길옆으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는데, 구름이 가리고 있어 높이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떨어지면……. 좋은 꼴은 못 보겠군.’
낭떠러지 반대편은 아득하게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 또한 시야가 닿는 곳 끝에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정확한 높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점멸을 거듭하면 올라갈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럴 의미가 없겠지.’
결국 이런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 끝에 중요한 게 있다는 소리다.
결국 이 길 끝에 정령왕이 머무를 장소나 엘리베이터가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중국 어딘가 있다는 잔도(棧道)가 연상되는 절벽 길을 따라 우리는 뛰듯이 걸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위태롭게 느껴졌지만, 걷는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황가수호대나 영웅들의 기운마저도.
‘이놈들……. 대체 어디까지 간 거지?’
하지만 분명히 이 길 위에는 황가수호대와 영웅들이 있다. 이곳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바로 놈들 때문일 테니까.
부디 그들이 정령왕에게까지 닿지 않았기를 바라며 나아가길 한참.
가도 가도 길은 이어졌고,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 하나의 정령도 만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휴고의 표정이 굳어 갔다. 아마 거울을 본다면 내 얼굴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속보를 유지할 때였다.
길이 직각에 가깝게 꺾였다.
별생각 없이 모퉁이를 돌아서려 할 때, 무언가 강한 기운을 품고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절벽 때문에 시야가 제한되는 바람에 알아차리는 게 한발 늦었다.
나는 발가락에 힘을 줘 걷던 몸을 억지로 멈추며, 양팔을 뻗어 뒤따르던 휴고와 루스도 멈춰 세웠다.
콰아앙-!
내 앞을 지나쳐 간 것이 허공에서 폭발하며 그 여파가 훅 밀려들었다.
강력한 오러를 담은 원거리 공격이었다.
“적이다!”
내 외침에 일행의 발걸음이 멈추고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절벽 모퉁이 탓에 적의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슬쩍 고개를 내밀려 하면 다시 원거리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건…… 어딘지 낯이 익은 수법인데.’
다만 지금 우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공격은 내 기억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은 이쪽이 다가가기 힘든 만큼, 상대도 우리에게 닥쳐들기 힘든 지형이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를 들킨 상황이니 정찰이 먼저 필요했다.
“영웅 놈들인 것 같다. 일단 내가 보고 올 테니, 대기하고 있어.”
휴고와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낭떠러지 위쪽 허공을 향해 점멸을 사용했다.
세찬 바람이 귓가를 스쳐 가는 동안 재빨리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절벽 길을 완전히 가로막은 성벽이었다.
‘데모릭스의 짓인가? 아주 작정하고 진을 쳤군.’
단단한 성벽이 온 절벽 길을 꽉 틀어막고 있었다.
그 위에 대포를 비롯한 각종 화기가 장착된 것으로 보아, 준비 기간이 꽤 길었던 듯했다.
나는 조금 더 무거워진 마음으로 성벽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영웅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데모릭스(SS. 요새 전문가) - 축성(築城), 마력 대포, ……필멸의 대포.]
[아나투스(SS. 마도진법사) - 마법 함정, 회복 마법진, ……이동 방해 마법진.]
성벽 위에 올라선 두 영웅이 먼저 눈에 띄었다.
재빨리 나머지 공간을 살피자 성벽 아래에 또 다른 이름이 보였다.
[원굉도(SS. 권왕(拳王)) - 일권파천(一拳破天).]
‘역시 저놈이었군.’
좀 전 모퉁이에서 나를 노리고 날아온 공격은 원굉도의 기술이었다.
갑옷도 무기도 없이, 단아한 의복을 입은 초로의 노인, 원굉도.
놈이 할 줄 아는 것은 단 하나, 그저 주먹을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그에 걸맞게 ‘간파의 막’이 보여 주는 놈의 정보에는 단 하나의 스킬만이 존재했다.
일권파천(一拳破天).
최상급의 공격력과 마찬가지 수준의 방어력을 가능케 하는 사기적인 스킬이다.
지금 놈이 그러하듯이, 몸에 두르면 갑옷을 입은 것 이상의 방어력을 제공한다.
게다가 근거리, 원거리의 제약도 비교적 없다시피 한다.
그냥 휘두르거나, 채찍처럼 길게 뻗어 내거나, 대포처럼 쏘아 댈 수도 있다.
주먹을 한 번 휘둘러 하늘을 부순다는 광오한 이름에 걸맞은 스킬이었다.
‘강기공의 완벽한 상위호환이기도 하고.’
아마 회귀 직후에 원굉도를 소환해 일권파천을 뺏어 올 수 있었다면, 굳이 강기공을 얻겠다고 보리스를 쥐어 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놈들의 면면은 파악했다.
비록 적이 유리한 진형을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나, 수는 셋. 충분히 뚫을 수 있다.
그러다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왜 셋밖에 안 되는 거지? 게다가 이번에는 황가수호대도 먼저 나타나지 않았군.’
의문은 길게 가지 못했다.
콰아앙-
내가 점멸로 허공에 나타났음을 드디어 인식한 원굉도가 일권파천을 갈겨 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일행에게 돌아가기 위해 다시 점멸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망설이다가, 결국 점멸의 방향을 바꾸었다.
‘확인해야 해.’
스팟-
몇 번의 점멸을 거듭해 성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막 성벽의 위로 이동하려고 점멸을 사용한 순간.
파직-
투명한 막이 나를 허공에서 가로막았다.
둔중한 충격이 울렸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던 일이라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젠장, 황제 놈이 썼던 기술이군.’
황제가 성벽 앞에 펼쳐 두었던, 점멸을 방해하던 보호막이 이곳에도 시전되어 있었다.
[아나투스(SS. 마도진법사) - 마법 함정, 회복 마법진, ……이동 방해 마법진.]
아나투스의 스킬창 마지막에 표시된 이동 방해 마법진.
저것이 계속 거슬려 실험해 본 것인데, 안 좋은 예감이 여지없이 맞아 들어갔다.
이동이 가로막혀 허공에 정지한 나를 노리고 원굉도의 공격이 다시 날아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절대불변을 펼쳤다.
콰앙-!
일권파천의 기운이 튕겨 나갔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점멸을 사용해 원굉도의 앞으로 이동했다. 정찰의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굳이 이대로 순순히 빠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적이 셋밖에 안 되는 데다가, 그중 둘은 후방 지원형에 가깝다.
내가 원굉도를 상대하는 동안, 휴고와 루스도 비교적 안전하게 전장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셋밖에 없는 꿍꿍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그런 생각으로 원굉도에게 검을 휘두르며 휴고에게 합류하라는 목소리를 전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발밑이 빛났다.
퓨슈슈슈슛-
내가 서 있던 바닥에서 얇게 벼려진 마법 칼날이 소나기처럼 쏘아졌다.
‘제기랄!’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재빨리 뒤쪽으로 점멸했다.
공간을 건너뛰는 짧은 순간에 칼날이 스쳐 가며 팔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마법 함정. 원굉도가 앞에 나와 설치는 이유가 있었어, 쯧.’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마법 함정이었다.
아마 원굉도까지 폭발에 함정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칼날이 발사되는 형식으로 설치한 듯했다.
어쨌든 나는 그대로 들이받으려는 마음을 접고 뒤로 물러났다.
내가 돌아오자 휴고가 내 팔의 핏자국을 쳐다보며 물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대충 보니 성벽이 세워진 것 같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공격이 내게 쏠린 틈을 타 몰래 살펴본 모양이었다.
“아주 작정을 한 것 같다. 성벽 위에 마력 대포도 잔뜩 있고, 성 앞에는 마법 함정이 깔려 있어. 점멸로 단번에 넘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어서 보호막의 존재와 원굉도의 전투 스타일 등을 일행에게 설명해 나갔다.
내 말이 끝나자 휴고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어 왔다.
“그런데 왜 세 명뿐일까요? 이제까지 정령계에서는 계속 다섯이었지 않습니까?”
“이유는 모르겠다만,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저렇게 거창하게 진을 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놈들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당연히 우리에게 좋은 일은 아닐 터.
눈앞의 놈들이라도 빠르게 처치하는 것이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보호막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대장?”
황제와의 싸움에서 충분히 겪어 봤기에 어떤 식의 공격이 보호막을 상대로 유용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워젤의 해일처럼 아주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공격을 한 번에 집중시켜야 해.’
그것도 다가가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마법 함정과 원굉도 때문이다.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코인을 확인해야겠군.’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남발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써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쓰려고 아껴 놓은 코인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