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8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령왕의 안색이 차츰 나아졌다.
몸을 회복한 정령왕이 시선을 내게로 향하며 물었다.
“정해수 님, 이곳에 오셨다는 것은 표식을 얻기 위함이겠죠?”
“예,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만, 일단 표식이 최우선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것을 그냥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고요?”
“예, 알고 있습니다. 다만 사정을 배려해 주실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안 그래도 최선을 다해 쉬운 방법을 궁리 중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으로 시험을 대신하고 싶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어서…….”
그렇게 말하며 정령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넉넉지 않아 그러니, 빨리 시험을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정령왕은 한참이나 고민하는 듯했지만, 도통 시험을 내지 못했다.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 보였다.
‘이거 배려해 달란 말을 괜히 한 건가? 부담돼서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시간이 계속 헛되이 흘러간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던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아차 싶었다.
‘이런……! 해야 할 일도 끝내 놓지 않고 멀뚱히 있었군.’
나는 여전히 고민 중인 정령왕에게 말했다.
“잠시 편하게 생각하고 계십시오. 저는 할 일이 있어 잠깐 주위를 둘러봐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부담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정령왕이 어딘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는데,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녀올 동안 부디 적당한 시험을 생각해 내야 할 텐데…….
‘하긴 지금 남 신경 쓸 때가 아니지.’
나는 얼른 빼먹은 일을 하러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크뤼거의 주검.
심장이 터져 죽은 놈의 큰 몸뚱이에 아이템 추출을 사용했다.
“꽝이네요.”
언제 따라왔는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휴고가 혀를 차며 아쉬워했다.
붉은 보석이 나왔기 때문인데,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것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 뒤에도 레오비크와 쿠틸의 순으로 아이템 추출을 해 나갔지만, 연신 붉은 보석만 나왔다.
“운발이 다 되었나? 우리 대장이 이럴 리가 없는데…….”
옆에서 휴고가 뭐라 구시렁거렸지만, 무시한 채 나는 웅기베의 시체로 다가갔다.
이번에도 보석이 나오면, 이번 전투에서는 특별한 소득이 없는 셈이 된다.
‘엘파바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으니, 추출은 이게 끝이군.’
특별히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왠지 마음을 졸이게 되었다.
“제발, 제발! 터져라!”
옆에서 혼자 이상한 주문을 외는 휴고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됐다. 언제부터 이런 것에 의존했다고.’
영웅을 죽여 아이템을 얻는 것은 애초부터 계획에 있던 일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스킬을 얻게 되었고, 얻은 김에 사용하고 있을 뿐.
‘아이템 추출.’
마음을 편히 먹고 웅기베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그런데.
‘뭐야? 왜 없어?’
붉은 보석이라도 나와야 마땅한데,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어? 대장, 스킬 쓰신 것 맞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요?”
휴고의 눈에도 보이는 것은 없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아이템 추출’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더 이상 추출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들려왔다.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루스가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 저거 아니야?”
루스의 손끝은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자 휴고가 끼어들었다.
“루스, 땅바닥이 어떻게 아이템이냐? 가서 먹던 용암 사탕이나 더 먹으렴.”
“이 돼지가-!”
곧이어 루스가 휴고를 정겹게 구타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루스가 가리킨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바짝 다가가자 바닥에 떨어진 것이 보였다.
반짝.
살짝 빛을 반사하는 그것은 엄지손톱만 한 얇고 투명한 막이었다.
‘렌즈인가? 이게 왜……?’
조심스럽게 주워 들자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간파의 막(膜)(S. 악세서리)]
- 조인족(鳥人族) 왕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 옛 선조 중 경지에 이른 자의 망막을 벗겨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감춰진 것을 파악하는 권능이 담겨 있다.
“헉! 대장 그거 설마 콘택트렌즙니까? 그런 게 아이템으로 다 나오네요.”
장난이 끝났는지 다가온 휴고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러게, 별것이 다 나오는구나. 근데 제법 쓸 만해 보인다.”
말과 함께 간파의 막을 휴고에게 내밀자 녀석이 아이템 설명을 읽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곧 다시 내게 되돌려 주었다.
“대장이 착용하십시오. 저는 렌즈는 영…….”
말은 저렇게 해도 내가 쓸 만한 아이템에 욕심낸 적이 한 번도 없는 휴고였다.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간파의 막을 눈으로 가져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음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렌즈는 이내 눈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렌즈를 착용하고서 휴고에게로 시선을 다시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휴고 바란(???. 플레이어) - 멸세폭, 피의 군주.]
‘이게 무슨……?’
갑자기 휴고의 머리 위로 정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읽은 휴고가 의아한 말투로 물어 왔다.
“대장, 왜 그러십니까? 아이템에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문제는 없다. 그런 게 아니고…….”
나는 휴고에게 아이템의 성능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오, 상당히 좋네요. 스킬이 보인다니. 안 그래도 영웅들이 더 높은 상태로 진화하면서 잘 모르는 스킬들이 있었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자세한 스킬 설명까진 안 나와.”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이름만 알아도 유추할 수는 있잖습니까, 하하.”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시체 폭발’이니 ‘얼음 창’이니 하는 것들은 얼마나 직관적인가.
‘심장을 움켜쥐는 손’ 같은 스킬도 최소한의 단서는 주어지고.
뜻밖의 소득에 흡족해하며 정령왕에게 돌아가려는 찰나, 멀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가가 주워 들자, 익숙한 설명창이 떠올랐다.
[대형 얼음 폭탄(S. 소모품)]
- 얼음 마녀 엘파바가 자신의 기운을 모아 제작한 마법 폭탄. 사용 시 주위에 강력한 냉기의 폭풍을 일으킨다.
“엇, 그거 얼음 폭탄 아닙니까? 근데 엘파바는 터져 죽었을 텐데…….”
휴고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나 또한 비슷한 심정이라 곰곰이 고민해 본 결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에 죽였을 때, 그냥 드롭된 모양이다.”
“헉, 그렇군요. 완전 대박인데요?”
녀석의 말대로였다.
‘운이 좋군.’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정령왕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정령왕의 모습을 본 순간, 좋았던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아직도 못 정한 건가?’
정령왕은 여전히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하도 심각한 표정이라 다른 고민이 있나 의심될 지경이었다.
‘별수 없군. 내가 좀 도와줄 수밖에.’
나는 정령왕 쪽으로 다가가며 할 말을 골랐다.
“정령왕님,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게……. 미안해요. 마음이 조금 복잡해서, 마땅한 방법을 아직 떠올리지 못했어요.”
역시 노즈도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혹시 제가 좀 도와 드려도 될지……?”
“……?”
정령왕은 뜻밖의 상황에 의문을 표하며 나를 쳐다봤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보신 영웅들은 그들만 오지 않았습니다. 놈들은 황가수호대라는 하수인 무리와 기이한 성능을 가진 탑을 대동하고 다니는데…….”
내가 탑이 끼치는 해악에 관해 설명해 주자, 정령왕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오면서 확인했습니다만, 문 근처의 하급 정령들이 크게 상했습니다. 그것의 회복을 제가 맡는 것으로 시험을 대신함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거 좋은 의견이군요. 그럼 시험은 그것으로 하죠.”
내가 막 일어나 걸음을 옮기려는데 정령왕이 지나가는 말로 물어 왔다.
“시험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아시네요?”
“아, 이미 비슷한 시험을 물의 정령계에서 겪었습니다.”
“이미 다른 정령계를 다녀왔던 거군요! 그곳에는 별일 없었나요?”
다른 정령계에 대해 이 정령왕은 관심이 많은 듯했다.
나는 정령왕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동안 내 마음에는 무거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불의 정령계에선 마법진이 발동하기 전에 처리했다. 물의 정령계에선 중간 정도 위치에서 라블라를 도와 처리했었고.’
그리고 이곳 땅의 정령계에선 기어코 정령왕이 있는 곳까지 영웅들이 침범했다.
그렇다면 남은 바람의 정령계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후우…….”
“왜 그러세요, 정해수 님?”
“아닙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정령왕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지만, 나는 제대로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딱히 정령왕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봐야 좋을 것도 없고 말이다.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여차하면…… 창조주가 일러 준 방법을 실행한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방법.
어쩔 수 없이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겠지만, 바람의 정령계가 내 예상대로라면…….
‘됐다. 더 생각하지 말자.’
자꾸만 흘러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정령왕이 탄식을 터트렸다.
“아…… 이럴 수가.”
주변에 한 줌의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수심에 잠긴 정령왕을 내버려 둔 채, 나는 작업을 진행했다.
붉은 보석을 이용해 정령의 기운을 북돋는 일.
이미 물의 정령계에서 한 번 해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일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잠시 후, 일이 무사히 끝났고 정령왕이 밝아진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말 고마워요, 정해수 님. 당신이 아니었으면 회복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예요.”
“아닙니다. 다 시험의 일환이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얼른 표식을 드려야겠군요.”
딱히 재촉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빨리 준다니 나쁠 게 없지.
정령왕이 손을 뻗자 이윽고 세 번째 표식이 내게 흘러 들어왔다.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았다.’
대장정의 종막이 눈앞이다.
하지만 다음 층으로 향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감사합니다, 정령왕님.”
“아니에요. 시험을 치르고 정당하게 획득하신 거잖아요. 오히려 제가 여러모로 고마워요.”
나는 정령왕에게 마주 웃어 보이고는 다음 용건을 꺼내었다.
“혹시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순간 정령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은…… 정령술사가 아니지 않나요?”
목소리도 이제까지에 비해 건조하다.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는 못했기에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히 설명했다.
“그런 종류의 계약이 아닙니다. 계약한다고 해서 특별한 제약이 생기거나, 종속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정령왕은 여전히 경직된 표정으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더 자세한 설명을 해 나갔다.
“지금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신이 인간계에 강림했습니다. 놈은…….”
내가 왜 표식을 얻으려 했는지 그리고 계약이 왜 필요한지, 또 앞으로 무슨 일을 해 주었으면 하는지까지 전부 설명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령왕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뭐지? 왜 이렇게 거부감을 느끼는 거지?’
딱히 손해 볼 것은 없는 일일 텐데?
애초에 ‘계약’에 최전선에 나와 싸워 달라는 뜻은 없다.
게다가 인간계뿐만 아니라 정령계도 침범당한다는 것을 불과 얼마 전에 직접 겪은 정령왕인데…….
도통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쭉 지켜보던 휴고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 대장, 그런 이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 ……무슨 말이냐?
휴고는 정령왕에게 티 나지 않게 무표정을 유지하며 내게 계속 말을 전했다.
- 예전에 드래곤 레어에서 느낀 것인데, 노즈도름 님과 저 정령의 유대가 굉장히 깊어 보이더군요. 혹시 그 때문에 다른 사람과 ‘계약’하는 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아닌지…….
휴고의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개는 느낌이었다.
좀 전에 노즈도름의 최후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느꼈지만, 정령왕이 노즈도름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굉장히 깊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령왕의 감정이 큰 폭으로 요동치는 것을 느꼈었다.
‘이유를 모르니 설득이 될 리가 없지. 그럼 이제 이유를 알았으니 그에 맞는 방법을 써야겠지?’
나는 정령왕이 눈치채지 못하게 휴고에게 감사를 표한 후, 다시 정령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