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7화>
나는 불의 검을 채찍처럼 길게 늘인 후, 횡으로 크게 휘둘러 데스나이트들을 후려쳤다.
‘꼭 파괴할 필요는 없다.’
목표는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는 데스나이트들을 내 근처에 닿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검날은 네 기의 데스나이트 중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콰아아앙-!
네 기의 데스나이트가 한꺼번에 튕겨져 날아갔다.
나는 놈들이 튕겨 나간 자리로 레오비크와 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자 레오비크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솟아나라.”
그러자 뼛조각들이 조립되어 장벽이 되었다.
순식간에 겹겹이 앞으로 가로막는 뼈의 바리케이드를 향해, 나는 불의 검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멸세폭.’
콰콰콰콰쾅-!
뼈의 장벽이 바스러지며 레오비크에게로 향하는 길이 일직선으로 뚫렸다.
‘바람의 걸음’ 덕에 등 뒤를 떠미는 바람의 힘을 받으며, 나는 최고의 속도로 놈에게 쇄도했다.
놈의 놀란 얼굴이 확대되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천벌’을 사용하며 왼손을 들어 올려 놈을 겨누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원혼의 거울.’
물 흐르듯 연계되어 두 스킬이 발동된다.
손에서 검푸른 광선이 쏘아진 순간, 나는 놈을 처치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정확한 조준에 충분한 위력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때때로 빗나가기 마련이고, 모든 것은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법이다.
광선이 막 발사된 순간, 내 앞으로 무언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새하얗게 폭발했다.
콰콰콰아아앙-!
광선과 폭발이 부딪치며 압도적인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나 역시 충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크윽.”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나는 밀려나는 몸을 억지로 멈추지 않고 뒤로 점멸을 사용해 물러났다.
저 앞을 뚫고 들어가 레오비크를 마무리하는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폭발은 거세었다.
뒤로 두 번 공간을 건너뛴 후에야 나는 폭발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화끈한 통증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뜨거운 것이 배를 따라 흘러내려 무릎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굳이 상처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가슴에서 초재생의 부산물인 수증기가 쉴 새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득-
나도 모르게 절로 이가 갈렸다.
이렇게 되면 당장 레오비크를 처치하자고 달려들 시간이 더는 없다.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크뤼거를 상대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휴고가 위험해진다.
이제 휴고를 도와야 할 때였다.
그런데 희소식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쿠틸이 루스의 불길에 온몸이 타들어 가며 단말마를 토했다.
스탯이 흡수되는 것으로 보아 쿠틸이 죽은 것이 확실했다.
‘됐다!’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휴고를 돕는 일은 루스에게 맡기면 된다.
그리고 그 틈에 내가 레오비크를 처리하면, 길었던 싸움을 끝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루스에게 신호하려는 찰나, 뜻밖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레오비크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타나라.”
공간을 찢고 한 기의 시체 골렘이 더 모습을 드러내더니, 레오비크의 지시하에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의 끝에는 정령왕이 있었다.
순간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니 다른 장면도 확인되었다.
원래부터 존재하던 시체 골렘도 상대 중이던 진흙 골렘을 뿌리치고 정령왕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시체 골렘은 진흙 골렘의 공세에 몸이 부서지면서도 정령왕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설마?’
강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나는 재빨리 눈을 돌렸고, 내 공격에 튕겨 나갔던 데스나이트들은 파괴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놈들은 정령왕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막아야 해.’
레오비크의 속셈이 손바닥처럼 읽혔다.
여전히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점멸을 반복해 정령왕의 근처로 이동해 갔다. 그동안에도 시체 골렘과 데스나이트는 정령왕에게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늘어나라.’
잔뜩 마력을 흡수한 불의 검이 길게 늘어졌고, 나는 그것을 채찍처럼 횡으로 휘둘렀다.
‘걸려라, 제발!’
길게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검날이 시체 골렘과 데스나이트를 얼추 감싸 안았다.
‘멸세폭.’
검날에서 폭발이 일었다.
굳이 다 파괴되지 않아도 좋다.
정령왕에게 다가가는 것만 막으면 족하다 생각하며 나는 간절히 폭발이 일어난 곳을 응시했다.
‘제기랄!’
그러나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체 골렘 한 놈이 폭심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곧장 정령왕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정령왕이 흙의 창을 만들어 시체 골렘을 공격했다.
콰직- 콰지직-
흙의 창이 연신 시체 골렘의 가슴을 꿰뚫었지만, 놈은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기어이 정령왕의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콰콰콰콰앙-!
시체 골렘의 몸이 폭탄이 되어 정령왕을 덮쳤다.
정령왕이 폭발에 휩쓸려 대번에 뒤로 나동그라졌다.
분지 가장자리까지 굴러간 정령왕의 몸에서 피 대신 땅의 기운이 줄줄 흘러내렸다.
푸욱-
“크아아악-!”
그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루스의 클로가 레오비크의 가슴을 관통하여 배로 튀어나와 있었다.
곧이어 클로에서 불길이 솟구쳐 레오비크를 몸 안에서부터 태워 버렸다.
이번에도 스탯이 흡수되며 레오비크의 죽음을 증명했다.
“루스-! 휴고를 도와!”
나는 레오비크의 죽음을 확인한 즉시 루스에게 소리치며 정령왕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루스가 합류하면 휴고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정령왕의 생사였다.
내가 다가갔을 때, 정령왕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정령왕을 들어 상체를 무릎에 올렸다.
그러자 정령왕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해수…….”
정령왕은 그 한마디를 내뱉고 정신을 놓아 버렸다.
‘나를 알아?’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깜짝 놀랐지만, 거기 정신 팔 여유는 없다.
나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정령왕을 살릴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 포션이 필요하고, 또 뭐가 있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정령왕에게 끼얹었지만, 별로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정령이라 그런지 아니면 상세가 너무 위중해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포션으론 안 돼.’
나는 인벤토리를 더 뒤지다가 붉은 보석을 발견하고 그것을 꺼냈다.
그리고 정령왕의 입을 벌려 억지로 밀어 넣었다.
보석이 목을 따라 넘어가는 것이 보였지만, 정령왕은 여전히 정신이 들지 않았다.
그에 다시 인벤토리를 뒤져, 황가수호대의 것만이 아니라 영웅에게서 추출된 보석도 꺼내 먹였다.
그런데도 정령왕의 상세에는 차도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해.’
고민하던 차에 인벤토리에 보관 중이던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연기충천부(然氣衝天符)(S. 소모품)]
나는 즉시 부적을 꺼내 들어 사용했다.
그러자 부적에서 땅의 기운이 솟아나 정령왕에게로 흘러들었다.
‘되었나?’
다행히도 이번에는 정령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면서 상처에서 줄줄 흐르던 기운이 조금씩 멎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나는 한 가지 방법이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령의 숨결(S. 반지)]
정령술사에게 얻은 이 반지에는 정령의 기운을 북돋는 능력이 있었다.
‘사용.’
반지에서 기운이 흘러나와 곧바로 정령왕에게 향했다.
‘되었다!’
드디어 정령왕에게서 새어 나오던 땅의 기운이 멎었고, 상처도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다.
‘역시 기운을 주입하는 게 답이었어.’
정령이다 보니 육체의 구성이 인간과 달랐고, 포션으로는 애초에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크아악! 빌어먹을 놈들!”
그때 뒤쪽에서 포효성이 들려왔다.
크뤼거가 분노를 토해 내고 있었다.
원래 컸던 놈의 몸이 반 배 정도 더 커져 있었다.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고, 혈관이 피부를 뚫고 나올 듯 꿈틀거렸다.
‘광폭화 상태로 접어든 건가?’
저 상태가 되면 크뤼거의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 모든 변화에는 장점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크뤼거의 변신은 더 높은 신체 능력을 주는 대신 회복력을 앗아 간다.
회귀 전, 크뤼거가 변신하면 회복 능력을 갖춘 영웅들이 전담하여 놈을 지원했었다.
하지만 지금 놈은 혼자다.
‘죽여 주마.’
나는 정령왕을 조심스레 눕혀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휴고에게 말을 걸었다.
- 휴고, 맞부딪치지 마. 놈은 변신하면 회복 능력이 사라지는 대신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 예, 대장.
차갑게 가라앉은 휴고의 대답이 들려왔다.
시종일관 위태로운 싸움을 해 왔음에도 녀석은 냉정함을 잃고 있지 않았다.
‘많이 컸군.’
나는 피식 웃으며 크뤼거의 뒤로 접근해 갔다.
불의 검이 마력을 받아 넘실거렸다.
* * *
“끄어억-!”
쿠쿵.
피 끓는 소리를 토해 낸 크뤼거가 쓰러졌다.
루스의 불길에 온몸에 화상을 입고 내게 한쪽 팔이 잘린 크뤼거는, 기어코 때를 기다리던 휴고의 멸세폭에 심장이 터지며 절명했다.
“잘했다.”
나는 짧지만 진심을 담아 휴고에게 말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휴고가 잘 버텨 주었기 때문에 이번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
휴고가 씩 웃으며 작게 고개를 숙였다.
“주인, 나는, 나는? 나도 혼자서 두 놈이나 처치했잖아!”
루스가 강아지처럼 촐랑거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당연히 잘했지.”
“히히. 근데 주인, 나 배고픈데.”
인벤토리에서 식량 자루와 함께 마지막 남은 용암 파편을 꺼내 주었다.
녀석이 막 음식을 흡입하기 시작할 때쯤,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령왕이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나는 식사에 열중한 루스를 내버려 둔 채 휴고와 함께 정령왕 쪽으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정령왕은 바닥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보는 정령왕의 모습은, 이번에도 인간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푸근하군.’
땅의 정령왕은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던 물의 정령들과 달리, 품이 넓어 보이는 중년 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정령왕도 할 말이 있는 듯 내 쪽으로 자세를 돌렸다.
나도 당연히 정령왕에게 용무가 있다.
특히 이번 정령왕에게는 ‘표식’과 ‘계약’ 이외에도 새로운 용건이 있었다.
‘아까 분명히 내 이름을 말했었지.’
내 이름을 입에 담았으니, 다가가면 자연스럽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까?
예상대로 가까이 가자 정령왕의 입이 열리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정해수 님.”
“저를 아십니까? 그리고…… 당신이 땅의 정령왕, 맞습니까?”
“아, 저를 알아보지 못하셨군요. 저는 또 저를 알아보고 도와주시는 줄 알았네요.”
“……?”
내가 여전히 의문 섞인 표정을 유지하자 정령왕이 말을 계속했다.
“하긴 인간계에서는 모습이 많이 달랐으니 알아보지 못하실 수도 있겠네요. 저는…….”
정령왕은 꺼내기 힘든 단어를 억지로 말하듯 잠시 망설이더니, 기어코 말을 이었다.
“노즈도름 님과 함께 있던 땅의 정령이에요. 당시에는 제 상태가 좋지 못했었고, 모습도 많이 달랐죠.”
“아……!”
나는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노즈도름의 드래곤 레어에서 내가 처치했던 땅의 정령이 있었다.
정령은 육체가 파괴되기 직전에나마 재앙의 기운에 저항하였고, 내게 노즈도름을 부탁하며 죽어 갔다.
그리고 노즈도름이 재앙에서 회복된 후, 다시 인간계로 소환되었었고.
‘드라코리치와의 싸움에서 땅의 정령이 함께 있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드라코리치의 결계 안에 끌려 들어갔을 때는 분명히 없었다.
내가 탄성을 터트린 후 생각에 빠지자, 땅의 정령이 말을 이었다.
“아 참, 제가 정령왕이 맞아요. 노즈도름 님과 계약이 끊어진 후 다시 정령계로 돌아오게 되었었는데, 어쩌다 보니 정령왕이 되었네요.”
왠지 처량해 보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군요. 노즈도름 님의 일은 안됐습니다.”
정령의 표정과 말투로 보아 둘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노즈도름의 마지막을 함께한 사람으로서 유감을 표했다.
“안 그래도 그 일에 관해서 부탁이 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노즈도름 님의 마지막에 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알겠습니다.”
시간이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렇지만 서두르는 티는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날의 일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분의 희생이 없었다면, 세상은 진작에 재앙에 뒤덮여 버렸을 거예요.”
“그랬군요. 역시 좋은 분이라니까. 그래도 살아 계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정령왕의 말은 차츰 잦아들어, 마지막에 가서는 흐느낌처럼 들려왔다.
그냥 조용히 기다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