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6화>
크뤼거 외에도 세 명의 영웅이 더 있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이번 생에도 만나 본 놈들이었다.
‘정령술사 쿠틸, 네크로맨서 레오비크, 얼음 마녀 엘파바인가.’
미친 듯이 날뛰는 크뤼거의 옆에는 크뤼거보다 더 큰 존재가 진흙 골렘과 싸우고 있었다.
‘저건 시체로 만든 골렘인 것 같은데.’
레오비크의 스킬임이 분명한데, 내가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인간은 물론 각종 몬스터의 사체까지 엮어서 만들어진 시체 골렘은 여러 기의 진흙 골렘에 둘러싸여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시체 골렘 옆에 다양한 속성의 정령들이 떠다니며 진흙 골렘과 정령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정령술사의 수작이었다.
다만 소환한 정령들이 정령왕과 격의 차이가 심한 데다가, 이곳이 땅의 정령계이다 보니 유의미한 타격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정령왕에게는 별 피해를 입히지 못하지만, 우리에겐 그렇지도 않겠지.’
정령술사를 눈여겨보는 중에 엘파바가 만든 수십 개의 얼음 창이 정령왕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정령왕의 발치에서도 흙으로 된 창이 생겨나 쏘아져 나갔다.
파가가각- 콰각-!
얼음 창과 흙의 창이 허공에서 맞부딪쳐 부서졌다.
여러 영웅의 파상공세에도 정령왕은 선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의 분지가 땅의 정령계에서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인 듯했다.
흙의 정령왕은 그 기운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진흙 골렘을 만들어 여태껏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홈그라운드라 잘 버티고 있긴 한데…….’
하지만 그것도 무한하지는 않을 터.
그 증거로 전장의 진흙 골렘 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새로 만들어지는 숫자가 파괴되는 수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거들어야겠군.’
나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타깃을 물색했다.
가장 위협적인 놈, 그러면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놈으로.
‘저놈이다!’
대상을 정한 후, 휴고에게 곧바로 합류하라는 말을 마음으로 전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삐에에에에엑-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괴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그곳을 돌아보는 순간, 내 머리 위로 새파란 빛이 솟아올랐다.
‘젠장-!’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점멸을 사용, 자리를 옮겼다.
푸슈슈슛-
내가 사라진 자리로 연이어 날카로운 것이 내리꽂혔다.
그것은 날짐승의 깃털이었는데, 하늘에 떠 있는 다섯 번째 영웅에게서 발사된 것이었다.
놈을 확인한 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왠지 네 명밖에 안 보인다 했더니, 쯧.’
조인(鳥人) 웅기베.
놈은 크뤼거와 같이 수인족 중의 하나로, 새처럼 날개와 깃털을 가지고 있다.
클래스는 멀리 보는 자.
깃털을 화살처럼 날리며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것이 놈의 전투 방식이었다.
‘하필 저놈이……. 덕분에 인식 교란이 무용지물이 되었군.’
웅기베는 딱히 강한 공격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같은 원거리 영웅인 마위니나 화이트에 비해 화력이 한참 모자란다.
그러나 놈만이 가진 강점이 있었는데, 바로 은신 계열 스킬을 모두 꿰뚫어 본다는 것이었다.
‘징표에 당했다.’
지금 내 머리 위에 떠오른 푸른빛은 놈의 스킬 중 하나인 사냥의 징표였다.
당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 숨든 웅기베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머리 위로 솟은 푸른빛은 굉장히 눈에 잘 띄어서, 꼭 웅기베가 아니라도 정체를 숨기기는 힘들었다.
‘기습은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목표는 변함없다!’
이전처럼 기습으로 두어 명 처리하고 시작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처음 생각한 목표는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곧이어 합류할 휴고와 루스가 위험에 빠지지 않을 테니.
나는 거듭 점멸을 사용하여 엘파바에게 다가갔다.
이미 사냥의 징표 때문에 영웅들은 모두 내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엘파바는 내가 빠르게 접근함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입술의 모양만으로도 무슨 주문을 사용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심장을 움켜쥐는 손이군.’
이미 같은 상황을 몇 번 겪어 보았다.
놈의 대응은 이전과 똑같았다.
과정이 같으니 결과도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콰직-!
불의 검에서 뿜어진 멸세폭이 엘파바의 머리를 단숨에 터트려 버렸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엘파바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리라 여겼고, 덕분에 손쉽게 놈을 처치할 수 있었다.
엘파바의 죽음에 내가 쾌재를 부르는 순간.
콰아앙-!
폭발과 함께 내 몸이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크윽-!”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고개를 연신 내저어 희뿌연 시야를 회복했다.
그제야 내게 충격을 가한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령이다. 정령을 폭발시킨 거야!’
내가 엘파바를 처치하는 사이 쿠틸의 정령이 내게 접근했고, 내게 붙어 폭발한 것이다.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새로운 정령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점멸.’
곧바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곳 역시 계속 머무를 수는 없었다.
퓨퓨퓨퓨퓻-
다시 한번 점멸을 사용함과 동시에 내가 있던 자리로 웅기베의 깃털이 내리꽂혔다.
위기감이 느껴졌다.
‘혼자는 힘들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연이어 공간을 건너뛰며 휴고와 루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동시에 정령왕 쪽을 살폈다.
정령왕이 당해 버리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정령왕은 선전하고 있었다.
특히 쿠틸이 정령을 터트리는 모습에 분노했는지, 흙의 창을 잔뜩 만들어 쿠틸에게 날리고 있었다.
콰콰쾅-!
하지만 흙의 창은 정령왕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쿠틸이 소환한 정령들이 몸을 던져 흙의 창을 대신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령왕이 더 분노해 창을 쏘아대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쿠틸에 시선을 뺏긴 틈에 진흙 골렘을 다시 만드는 데에 소홀했고, 그 탓에 급격히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크뤼거와 시체 골렘이 미친 듯이 날뛰며 진흙 골렘을 부수었기 때문이었다.
정령왕을 도우러 가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빌어먹을 웅기베. 저놈부터 어떻게든 해야 해.’
허공에 뜬 놈에게 움직임을 모조리 간파당한 데다가, 놈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으니 행동에 제약이 극심했다.
이를 바드득 갈고 있는데, 때마침 기다리던 휴고와 루스가 도착했다.
루스는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상대를 찾았다.
내게 달려드는 정령을 향해 양손을 내뻗으며 불길을 쏘아 낸 것이다.
콰르르르르-
속성을 막론하고, 쿠틸의 정령들은 루스의 불을 이겨 내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그러자 안색이 창백해진 쿠틸이 다시금 정령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저쪽은 맡겨 두면 되겠고.’
루스는 정령을 폭발시키는 쿠틸의 공격에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화력 때문에 정령이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
웅기베의 깃털도 루스의 불길을 뚫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휴고에게 있었다.
‘이곳엔 피가 거의 없어.’
손쉬운 황가수호대는 이곳에 없다.
게다가 적들 중에도 정령술사와 네크로맨서 등, 피를 보기 힘든 클래스들이 포진해 있다.
‘끽해야 엘파바에게서 흐른 피가 다군.’
걱정하고 있는데, 휴고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함부로 달려들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시선이 새로 등장한 루스와 휴고에게 끌린 상황.
이때를 노려야 한다.
나는 흘끔 하늘을 쳐다봤다.
웅기베가 루스에게 깃털을 날리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내 쪽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점멸.’
곧바로 공간을 건너뛰며 놈에게 다가갔다.
한 번의 점멸로는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던 웅기베가 내 모습에 비릿하게 웃었다.
곧 웅기베의 몸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졌다.
놈의 몸 주위로 마력으로 만들어진 깃털이 만들어졌다.
쎄에에엑-
수천 개의 깃털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허공을 빼곡히 수놓았다.
‘아예 근처로 다가가지 못하게 할 속셈이냐.’
하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놈의 스킬은 알고 있었고, 놈이 저렇게 대처할 것이란 것도 예상했다.
나는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공중에서 뒤쪽으로 물러났다.
내가 후퇴하자 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도 속으로 웃고 있었다.
웅기베의 뒤쪽, 놈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
하나의 마법진이 빛나고 있다.
잠시 후 마법진의 빛이 사라지고 허공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리고 텅 빈 발아래를 인식하고 놀라 경악성을 내뱉었다.
“어? 어억-!”
놈은 반사적으로 앞에 있는 웅기베을 껴안으려 했다.
그리고 경악성에 놀란 웅기베는 곧바로 뒤로 돌며 깃털을 쏘아 내었다.
하지만 두 놈의 모든 행동은 무의미했다.
‘환수 폭발.’
콰콰콰아앙-!
소환된 놈의 몸이 터지며 폭탄이 되었다.
놀라 뒤돌아선 웅기베는 반응조차 못 하고 폭발에 휩쓸린 채로 추락했다.
나는 떨어지는 놈을 따라 연이어 공간을 건너뛰었다.
그리고.
서걱-
빈사 상태에 있던 웅기베의 머리가 불의 검에 잘렸다.
“후우.”
웅기베를 마무리한 후 바닥에 내려선 나는 짧은 한숨과 함께 전황을 살폈다.
하지만 한 놈을 처치했음에도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저놈이 어째서 살아 있는 거야?’
멸세폭에 머리가 터졌던 엘파바가 버젓이 살아서 정령왕에게 얼음 화살을 날려 대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다시 한번 엘파바를 살핀 나는 곧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데드잖아!’
레오비크가 스킬로 엘파바를 되살려 낸 것이다.
물론 언데드인 만큼 생전의 모든 기술을 사용하지는 못하는지, 엘파바는 얼음 창만 날려 대고 있었다.
‘이러다 기껏 죽인 웅기베까지 살아나겠군.’
결국 레오비크를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싸움을 끝낼 수 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짧게 주위를 살폈다. 일행의 안위에 문제가 없다면, 곧바로 레오비크를 노릴 생각이었다.
루스는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시종일관 쿠틸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쿠틸은 정령을 대신 희생시키며 연신 도망만 다니고 있었다.
‘저쪽은 걱정할 것 없고.’
고개를 돌려 휴고를 바라보았다.
휴고는 어느새 진흙 골렘을 내팽개친 크뤼거와 맞붙고 있었다.
상황이 넉넉한 루스와 달리 휴고는 연신 밀리는 양상이었다.
아무래도 피의 군주가 발동되지 않는 것이 휴고에게 치명적인 듯했다.
‘위험하다. 오래 버티기 힘들겠어.’
이제껏 쌓아 온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휴고에게 남은 시간이 길어 보이지 않았다.
장점이었던 파괴력도 회복력도 모두 크뤼거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고를 돕는 것과 최대한 빠르게 레오비크를 처치하는 것.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짧은 순간 수많은 고민이 스쳐 갔다.
양쪽 다 리스크가 있었다.
그러나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상황은 급변했다.
“크아악-!”
루스의 공격을 버티지 못한 쿠틸이 기어코 불길에 당했다.
당장 죽을 상처는 아니었지만, 고통스러운지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레오비크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더 이상 동료를 잃으면 놈들도 전력에 구멍이 너무 커진다.
지금도 언데드인 엘파바는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놈들도 셋밖에 살아남지 못한 것이다.
다급해진 레오비크가 엘파바에게 손짓하자, 엘파바가 쿠틸을 돕기 위해 나섰다.
엘파바는 루스에게 얼음 창을 대량으로 뿌려 대기 시작했다.
쿠틸을 끝장내기 일보 직전이던 루스는 불길의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콰르르르- 치이이익-
폭음이 일며 얼음 창이 불길에 녹아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주위가 자욱한 수증기로 뒤덮였다.
레오비크의 손발이 바빠졌다.
엘파바를 조종해 루스를 공격하고, 시체 골렘은 정령왕과 싸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꾸준히 재생산되는 진흙 골렘을 생각하면 시체 골렘도 계속 유지 보수하거나 새로 생산해야만 했다.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진 레오비크는 자신의 안위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기회였다.
‘빠르게 레오비크를 처치한다.’
만약 한 번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 그 즉시 휴고를 돕는다.
마음을 정한 나는 즉시 점멸로 공간을 건너뛰어 가며 레오비크에게 향했다.
자욱한 수증기가 한동안 레오비크의 눈을 가려 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결국 놈이 나를 발견했다.
내 의도를 눈치챈 놈이 주문을 외었다.
크르르.
괴성과 함께 놈의 주위로 네 기의 데스나이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안광을 빛내며 레오비크의 앞을 막아섰다.
‘데스나이트 따위…….’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놈들이 언제든 폭탄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