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4화>
나는 정령왕이 내린 시험의 오류를 정확히 되짚어 주었다.
“예, 저는 다음 정령왕에게 다시 시험을 받아야겠죠. 그래야 표식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맞아요. 구원자님 말씀이 다 맞아요. 그러니 언니는 제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워젤이 기세등등하게 정령왕을 타박했다.
하지만 정령왕은 고집을 꺾을 기색이 없었다.
‘어차피 어떤 논리를 들이밀더라도 정령왕이 고분고분하게 정령왕 자리를 유지하려 들지는 않을 거야.’
그러기엔 정령왕의 태도가 너무 단호했다.
정령왕으로 지내는 것에 완전히 질려 버린 태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예상대로, 곧 정령왕의 반발이 이어졌다.
“그럼 난 그냥 나 혼자 인간계로 갈래. 얼마 놀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더라도, 일단 가고 싶어. 내가 인간계로 가면, 누가 되었든 자연스럽게 다음 정령왕이 되지 않겠니?”
“언니, 그렇게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할 거야? 진짜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라고!”
워젤이 거세게 반발했지만, 내가 봤을 때 정령왕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데.
‘차라리 정령왕을 인간계로 보내 버리고 워젤을 정령왕으로 만들면……. 최소한 표식을 얻기는 수월해지겠지.’
나는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워젤 님, 잠시 진정해 보세요. 정령왕님도 들어 보시고요.”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정령왕님을 인간계로 보내고, 워젤 님이 정령왕이 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오, 좋아요. 역시 말이 잘 통하시네, 호호.”
“구원자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신나 하는 정령왕과 달리 워젤은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워젤에게 조곤조곤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워젤 님, 제가 표식을 전부 얻으면 세상의 위기는 끝이 날 겁니다. 워젤 님이 인간계에서 저를 도울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씀이지요.”
“…….”
“정령왕님은 인간계로 가시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도 확고하고……. 그러니 차라리 워젤 님이 정령왕이 되셔서 제가 표식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구하는 데 일조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워젤은 말없이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워젤, 구원자님 말씀이 다 맞아. 그러니 어서 구원자님 말씀에 따르렴.”
정령왕은 언제 봤다고 나를 꼬박꼬박 구원자라 부르며 워젤을 설득하고 있었다.
‘설득인지, 약 올리는 건지 모르겠다만.’
정령왕의 행동에 괜히 역효과가 날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워젤의 입이 열렸다.
“제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워젤 님은 이미 충분히 희생하셨잖아요. 이곳에서 제게 표식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 됩니다.”
관리자와의 마지막 전투가 있겠지만, 내가 신격을 얻는다면 어차피 그것은 누가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은 아닐 것이다.
“그럼 알겠어요. 구원자님 말씀대로 할게요.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말씀해 보십시오.”
“언니가 인간계에 갔다가 그 탑에 화를 당할까 봐 걱정이 되네요. 저번에 보니 주위에 사악한 정령술사도 있더군요.”
워젤의 말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다.
특히 소환 영웅 중 정령술사와의 싸움을 직접 겪어 본 워젤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터.
약한 정령체로 인간계로 내려간 정령왕이 정령술사에게 제압이라도 당하면 곤란한 일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정령왕이 인간계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줘야 하겠군.’
그 방법이야 조금 전에 어느 정도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그 전에 정령들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정령이 인간계로 내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에는 한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라블라가 대답해 왔다.
“정령술사와 계약을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죠. 그게 아니면, 물의 기운이 강한 곳에서 그 기운을 이용하여 육체를 만들 수도 있고요. 이건 상위 정령은 되어야 가능한 방법이지만요.”
“그것 말고는 없습니까? 워젤 님이 제 요청에 따라 제 옆으로 이동해 오신 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는 안 되는 겁니까?”
“그것도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일단 대상의 주위에 물의 강한 물의 기운이 필요하고, 대상도 강한 마력을 갖추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그 힘을 바탕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라블라가 빠르게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대상에게 정령이 따로 자신의 기운을 새겨 둬야 하고요. 그래야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니까요.”
라블라의 말을 정리하자면, 물의 기운과 강한 마력이 필요하고, 곁으로 이동하려는 대상을 한 번은 만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가능할 거 같은데?’
나는 정령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후 모처럼 옛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 옛 친구님, 잘 지내셨습니까?
- 앗! 해수. 이게 얼마 만이에요!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동쪽으로 간 다음에는 어째서 연락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걱정했잖아요!
옛 친구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했다.
한동안은 라로프의 상황과 탑이 생겨나는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자주 연락했었지만, 최근 며칠 동안은 전혀 연락을 못 했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정령들도 기다리고 있고.
- 저, 옛 친구님.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다시 하도록 하고 지금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 칫, 알았어요. 뭐예요?
- 혹시 정령술을 할 줄 아십니까?
- ……무슨 소리예요, 정령술이라니? 그런 건 할 줄 몰라요.
이건 정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인데, 역시 예상대로였고.
- 그렇군요. 그럼 혹시, 몸에 물의 기운을 품고 계시죠?
옛 친구의 기운은 내가 직접 느껴 본 적도 있으니, 물의 기운이 있는 것이 분명할 터.
- 그럼요. 제 기운이 다 바다에서 나온 것인 걸요. 물의 기운이야 당연한 일이죠. 순수하게 물의 기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역시 예상대로의 대답이 들려왔다.
- 그럼 혹시 정령 한 분 보내 드려도 될까요?
-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연락해서는 뜬금없는 소리만 할 거예요?
나는 어이없어하며 반문하는 옛 친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정령왕이 인간계로 가고자 하는데, 인간계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옛 친구의 옆이라는 것을.
- ……그렇군요. 뭐 당신이 하는 일에 필요하다니, 거절할 이유는 없어요. 인간계에서 그나마 제 근처가 가장 안전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근데 이쪽으로는 어떻게 보내려고요?
궁금해하는 옛 친구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전해 놓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옛 친구의 맹약(S. 소모품)]
- 옛 친구의 결코 저버리지 않는 약속이 담긴 물건. 깨트리면 옛 친구를 부를 수 있다.
옛 친구와 의사소통을 위해, 그리고 옛 친구를 소환하기 위해 필요한 아이템.
옛 친구와 계약을 맺으면서 의사소통을 위해서 맹약을 쓸 일이 없어졌었고, 그 바람에 잊힌 채 인벤토리에 고이 들어 있었다.
내가 옛 친구의 맹약을 꺼내 들자 정령들의 시선이 대번에 쏠렸다.
“앗, 굉장히 순수한 물의 기운이 느껴져요!”
라블라가 옛 친구의 맹약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누군가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상당히 영험한 존재군요. 구원자님, 혹시 누구의 것인가요?”
워젤도 놀라워하며 물어 왔다.
“인간계의 바다에서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영수(靈獸)입니다. 정령왕님은 이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지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워젤이 그러했듯이 정령왕도 이동 마법 정도는 당연히 가능할 터.
맹약을 통해 이곳으로 옛 친구를 부르고, 정령왕이 옛 친구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면 된다.
그게 아니면 옛 친구가 몸속에 정령왕을 태워서 돌아가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런데 내 생각처럼 일을 복잡하게 진행할 필요는 없었다.
정령왕이 옛 친구의 맹약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 물건은 주인에게 강하게 연결되어 있군요. 이것이 있으면 이 물건의 주인 곁으로 곧바로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놀라운 마음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정령왕이 설명을 더 이었다.
“품고 있는 기운을 보니, 이것의 주인은 강한 물의 기운을 가지고 있을 것 같군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곳으로 갈 수 있어요.”
말을 하며 몸을 들썩이는 것이, 당장 인간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안 그래도 그 물건의 주인을 이곳으로 부르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그럼 언제 가시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것이 내 입장에서도 좋았기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상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지금 당장 가야죠. 얘들아, 언니는 이제 갈게. 너희 둘이 정령계를 잘 돌보렴-!”
정령왕이 신명 나게 대답했다.
어찌나 신난 목소리던지, 듣고 있던 나까지 흥겨워질 정도였다.
팟-
그리고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정령왕의 몸이 사라졌다.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사라지는군. 그렇게 인간계로 가고 싶었나?’
뭐 어찌 되었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은 좋다.
물론 워젤은 조금 섭섭한 표정이었지만.
그런데 그때, 휴고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 대장, 정령왕이 가 버렸는데, 왕위가 어떻게 다른 정령에게로 넘어가는지는 아십니까?
- …….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 했었기에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딱히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변화는 곧바로 시작되었으니까.
샤아아아아-
주위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면서 정령들을 둘러쌌다.
나와 일행들은 그 기운에 의해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나며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챠르르르르-
곧이어 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굴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의 파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번쩍-!
이윽고 동굴 안을 환하게 비추는 밝은 빛이 뿜어졌고, 잠시 후 그 자리에는 변함없이 워젤과 라블라가 서 있었다.
“왜, 왜 내가 정령왕이……!”
라블라의 입에서 놀란 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워젤이 확연히 더 강한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라블라가 정령왕이 된 것 같았다.
‘인간계에서 몸을 잃는 바람에 본체에도 타격을 받은 건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워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라블라. 네가 정령왕이 되었구나. 축하해, 호호.”
왠지 상당히 들뜬 듯한 목소리였다.
‘정령왕이 저렇게 앉기 싫은 자리였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워젤이 내게 다가왔다.
“구원자님, 저는 정령왕이 아니니 다시 불러 주실 수 있죠?”
그 말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령왕을 하고 싶지 않아 했던 게 그런 이유였던가?
‘하긴, 원래 드워프 동굴 근처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지.’
정령술사와 계약을 한 것도 아닌데 혼자 인간계에 머무르던 걸 생각하면, 그냥 정령계에 있기 싫어했던 것 아닐까?
“음, 원하신다면 불러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인간계에서 해결해야 할 일은 그다지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 더 좋죠. 그냥 평화롭게 지내는 게 저는 더 좋은걸요!”
그냥 우리와 같이 다니며 놀고 싶은 거였나?
뭐가 되었든,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
일단은 표식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라블라 님, 표식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이제 제가 해야 하는 일이군요. 드릴게요. 그런데…….”
정령왕이 되면서 표식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주입된 것인지, 라블라는 한동안 인상을 찡그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아! 이제 알겠다. 표식을 그냥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네요. 그래서 알아보니 무조건 시험을 내려야 한대요. 그래서 적당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셨군요. 그럼 시험을 내려 주십시오.”
공짜로 안 되리란 것은 애초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창조주가 그렇게 만들어 두었으니까.
잠시 더 고민하던 라블라가 입을 열었다.
“탑 때문에 하급 정령들이 많이 상했어요. 곧 새로운 정령들이 다시 태어날 텐데, 그들은 너무 약해요. 그들이 하급 정령 수준이 될 때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구체적이지도, 예상했던 범주에 포함되지도 않는 요구였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듣는 순간 해결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