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3화>
라블라는 저간의 사정을 계속 이야기해 나갔다.
“그 이상한 탑이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고 다가가려는데, 붉은 옷을 입은 놈들이 나타나 가로막더군요. 그래서 그놈들을 해치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황가수호대와 싸우는 중에 영웅이 나타나 전투에 합류했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던 라블라는 하는 수 없이 후퇴를 선택했다고.
다만 하급 정령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적당히 싸우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고 한다.
‘왠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싸우고 있더라니. 그나저나 왜 그것밖에 안 보냈을까?’
영웅들을 생각하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곳에 나타난 영웅의 수는 다섯.
이미 여섯 명이 덤벼들었을 때도 우리 일행에게 패배한 적이 있는데, 이제 와 다섯을 보냈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뭐지? 우리를 막으라고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가는 길에 아나투스의 마법 함정이 설치되어 있던 것도 좀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봐도 거기 마법 함정을 설치해 봐야 시간 끌기밖에 안 돼.’
그걸로 우릴 죽일 수 없다는 건 정도는 저들도 알고 있을 터.
끽해야 부상을 입히는 정도인데, 부상은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럼 내 발을 묶어 놓고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의문이 깊어지려는 찰나.
“와-! 이거 대단한데요. 제가 나이아가라를 본 적이 있는데, 이건 그보다 훨씬 장관입니다, 대장.”
휴고의 감탄성이 내 상념을 끊었다.
눈앞에는 두 개의 강이 나란히 폭포가 되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
경치를 확인한 내 입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왔다.
휴고의 말대로 대단한 경관이었다.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는데, 라블라가 갑자기 폭포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헉!”
그 모습을 목격한 휴고가 깜짝 놀랐지만, 사실 별문제는 없었다.
물의 정령이 폭포에서 좀 떨어진다고 무슨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때 아래에서 폭포 소리를 뚫고 라블라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다들 아래로 내려오세요.”
“…….”
휴고와 루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라블라에게 말했다.
“저희는 라블라 님처럼 내려가는 건 힘들 것 같은데요?”
“아, 제가 설명을 안 드렸군요. 괜찮으니 그냥 뛰어내리세요. 제가 다 준비해 두었답니다.”
일행의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여기서 떨어진다고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워낙 폭포가 대단하다 보니 조금 꺼려지긴 했다.
“어서 오세요. 절대로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다시 한번 라블라의 재촉이 있고 나서.
“대장, 솔선수범하십시오.”
휴고가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픽 웃음을 흘리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휴고와 루스도 곧 내 뒤를 따랐다.
라블라의 장담대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조금 아래쪽에 물로 받침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뛰어내리자 받침 위에 동그란 막이 생겨나더니 우리를 모두 감쌌다.
‘물로 만든 보호막이군.’
이윽고 받침이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려가며 더욱 가까이서 본 폭포는 감탄이 멎지 않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연신 떨어지는 폭포수가 물로 된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 나는 모습이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경치를 감상하는 중에 딛고 선 받침이 우뚝 멈춰 서더니, 떨어지는 폭포수를 뚫고 뒤쪽으로 이동했다.
폭포수 뒤쪽에 커다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받침은 동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정령왕이 이곳에 계신 모양이군요. 굉장히 신비한 경관입니다.”
“네, 언니들은 이곳에 있어요. 정령이라고 해도 아무나 올 수는 없는 곳이랍니다.”
불의 정령왕을 찾아갈 때도, 길 안내를 맡은 늑대 정령은 화산에 오르지 못했다. 아마 이곳도 거기처럼 높은 격을 가진 정령만 다가갈 수 있는 곳인 듯했다.
동굴 안으로 한참을 더 들어가 더 이상 폭포수가 닿지 않는 곳에 이르자 받침이 사라졌다.
“가요. 별로 멀지는 않으니 금세 도착할 거예요.”
앞장서 이동하는 라블라를 따라 우리는 동굴 안으로 걸었다.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고, 아래에는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름답고 신비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불의 정령왕 때보다는 그래도 훨씬 낫군.’
덥지도 않았고, 분위기도 훨씬 좋았다.
분위기처럼 이번에도 부디 일이 수월하게 끝나기를 기원하며 동굴을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 때, 멀리서 두 여성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그랬잖아. 막무가내로 갔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니까!”
“어차피 몸을 잃기밖에 더 하겠어? 너도 그러고 돌아왔잖니? 이번엔 이 언니 차례야.”
“나는 사명이 있어서 그랬던 거고. 언니는 그냥 놀러 가려는 거잖아. 인간계는 지금 놀러 갈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호호호, 놀 때는 상황을 가리면 안 된단다. 어떤 상황이든 마음만 먹으면 신나게 놀 수 있어야지.”
두 여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라블라가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다.
“언니들, 또 왜 싸우고 있어요?”
좀 더 다가가자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눈에 들어왔다.
둘 다 푸른색 머리를 한 여성이었는데, 한쪽은 머리가 길고 나머지 한쪽은 단발머리란 점이 달랐다.
“와우, 고위 물의 정령님들은 다들 미인이시군요. 하하.”
휴고가 감탄할 정도로 두 정령은 아름다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정령의 실랑이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라블라가 등장하자 잘되었다는 듯, 짧은 머리의 정령이 도움을 요청했다.
“라블라, 어서 언니 좀 말려 봐. 언니가 이곳의 일을 다 내팽개치고 인간계로 놀러 가겠대. 그것도 지금 당장!”
“헉, 정말요? 언니 정말이에요? 정령왕의 일은 어떻게 하고요?”
라블라는 그 말을 듣자 대번에 긴 머리의 정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라블라, 내가 이곳에서 가만히 있기만 한 지 벌써 수백 년이 지났어. 정확히 몇 년인지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아. 이번에는 나도 인간계에 좀 다녀와야겠어.”
“언니, 그럼 정령왕의 일은 어떻게 하고요?”
“그거야 아무 문제 아니잖니? 어차피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이 이곳에 찾아오길 하니? 그리고 내가 인간계로 가면, 너희 중에 누가 나 대신 정령왕이 되면 되는 것 아니겠니?”
긴 머리의 여자는 예상대로 정령왕이었다.
그런데.
‘지금 인간계로 놀러 가겠다는 소린가?’
불의 정령계에 이어 이곳에서도 왠지 제정신인 정령왕을 보기는 어려운 듯했다.
괜스레 머리가 아파지려 할 때 라블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이 찾아왔는걸요? 저기.”
말과 함께 라블라가 우리를 손짓했다.
그러자 정령왕이 뜨악 하는 표정을 짓더니.
“으악-! 말도 안 돼. 어째서 지금 인간이 나타난 거야?”
절규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
정령왕이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서 있던 짧은 머리의 정령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구원자님! 이곳에 오셨군요!”
그리고 익숙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예, 워젤 님 맞으시지요? 일전에는 정말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나는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워젤에게 대답했다.
라블라와 오면서 나눈 대화를 통해 워젤이 이곳에 있을 것이란 걸 이미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은혜라니요. 저의 정신이 오염될 뻔한 것을 구해 주셨잖아요. 인간계에 만들어 둔 몸보다 그쪽이 훨씬 더 중요한걸요.”
그 말대로 재앙의 기운에 오염되어 자아를 잃으면, 정령계에 남아 있는 몸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몇 마디 감사가 오가는 와중에 장내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그러더니 정령왕이 워젤에게 말했다.
“워젤, 이분은 누구시니? 인간인 것 같은데. 엄청난 기운을 가지고 있구나.”
내 힘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내 몸속에 자리한 세계의 정수를 눈치챈 것인지 정령왕이 감탄했다.
“언니, 이분이 구원자님이야. 세상을 구하려고 여행 중이셔.”
“아! 음…….”
짧게 감탄한 정령왕은 뭔가 생각이 있는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자 워젤이 정령왕에게 말했다.
“어쨌든 지금 인간계로 가는 건 자살 행위야. 굳이 가 봐야 언니 말대로 놀지도 못해. 오히려 악신에게 기운만 헌납하게 될 거야.”
“악신이요? 기운을 헌납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반응은 정령왕이 아닌 라블라에게서 나왔다.
라블라는 뭔가 떠오른 것이 있는지 워젤에게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지금 인간계에는 기운을 빨아들이는 탑이 사방에 나타나고 있단다. 언니가 지금 인간계로 가 봐야 정령 술사와 계약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할 테지. 그러니 인간계에서 만든 새로운 몸으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탑에 흡수당하고 말 거야.”
“아, 역시 그 탑이었군요!”
“그 탑이라니, 무슨 말이야?”
“좀 전에 이곳 물의 정령계에도 그 탑이 나타났어요. 여기 이분들이 도와주셔서 겨우 물리쳤고요.”
“아아-! 어째서 이곳까지…….”
워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딱히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어차피 온 세상이 이런 상황이니, 결국 관리자를 처리하는 것만이 해결책이었다.
‘그러려면 어서 표식을 얻어야 하는데, 만나는 정령왕들마다 왜 살짝 나사가 풀려 있는 거야?’
속으로 불만을 터트리는데, 때마침 그 정령왕이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됐네, 됐어. 그럼 되겠네! 이봐요, 인간. 아니, 구원자님. 이곳에는 표식을 얻으려고 온 거 맞죠?”
“예, 맞습니다. 시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시험을 내릴게요. 그럼…….”
좌중이 주시하는 가운데, 시험의 내용이 정령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정령왕을 그만두고 인간계로 갈 수 있게 도와줘요. 내가 인간계에서 안전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바로 시험이에요.”
“언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언니?”
나머지 두 정령이 무슨 말은 하든 정령왕은 신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최고의 한 수를 둔 바둑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물론 나는 머리가 아파져 왔다.
‘무슨 저딴 걸 시험이라고…….’
아니, 다른 부분은 그렇다 치고 정령왕이 정령왕을 그만두면, 시험을 통과했을 때는 이미 더 이상 정령왕이 아닌 상황일 텐데.
‘그럼 표식은 누구한테 받으란 거야?’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역시 정령왕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워젤이 소리를 빽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언니! 언니가 정령왕을 그만두면 도대체 누가 하라는 거야!”
“네가 하면 되잖니, 워젤?”
“나는 구원자님과 함께 세상을 구할 사명이 있다고! 나야말로 인간계로 돌아가야 해.”
워젤까지 인간계로 갈 생각이었나?
이제 인간계에서 만들어 둔 강력한 몸도 잃어버려서, 더 이상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텐데.
내 고민이 깊어 가는 중에 이번에는 라블라가 소리쳤다.
“설마 저한테 정령왕 자릴 떠넘기고, 둘 다 가 버릴 건 아니죠?”
그리고 세 정령 자매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짹짹짹-
까악까악까악-
삐약삐약-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아, 어지러워. 대장, 차라리 한 몇 분 피해 있다가 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역시 내 귀가 잘못된 게 아니었어.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가 없으면 문제가 절대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고 세 자매 사이로 끼어들었다.
“잠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내가 끼어들자 마치 결판을 내려 달라는 듯, 세 정령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다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으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일단 정령왕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정령왕님을 인간계로 보내 드리면 저는 시험에 통과한 것이 되겠지요?”
“그렇죠. 그럼 당신도 좋고 저도 좋고, 모두 다 행복한 일이에요, 호호호.”
정령왕이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워젤이 소리치며 끼어들려는 것을 말리고 나서야 나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만약 제가 그 시험을 통과하면, 그때 정령왕님은 인간계에 가 있을 테니 더는 정령왕이 아니게 되죠? 그럼 표식은 누구한테 받습니까?”
“그야 당연히 다음 정령와…… 음……?”
그제야 정령왕은 자신이 내린 시험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