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2화>
콰르르-
불의 검이 화염을 토하며 구양극의 허리를 후려쳐 갔다.
구양극은 언제 뽑아 들었는지 처음 보는 목검을 들어 불의 검에 부딪혀 왔다.
퍽-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충격이 사라져 버렸다.
손끝에서는 아무런 반발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또 뭐지?’
아무래도 또 내가 모르는 새로운 스킬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변할 것은 없었다.
나는 다시 불의 검을 휘두르면서 멸세폭을 사용했다.
퍼버버벅-
그러나 이번에도 충격은 목검 속으로 삼켜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휴고의 망치가 구양극에게 날아들었다.
목검은 내 멸세폭을 막느라 이미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다급해진 구양극이 왼손에 들린 부적을 뿌렸고, 놈의 앞에 갑자기 돌로 만들어진 벽이 생겨났다.
그러나 휴고의 멸세폭은 석벽(石壁)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콰콰콰콰앙-!
무거운 분노에 직격당한 석벽이 단숨에 터져 나갔다.
충격파에 맞은 구양극이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갔다.
‘아직 살아 있다.’
그를 알아채자마자 나는 곧바로 점멸을 사용하여 놈의 뒤를 쫓았다.
놈은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한 움큼의 부적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러자 부적이 모두 놈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분신술이군.’
하지만 당연히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는 곧바로 분신의 발밑을 살펴 그림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는 놈을 발견하고 놈에게 곧장 불의 검을 찔러 갔다.
놈도 부적을 마주 날렸다.
벼락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파직-
저릿한 통증에도 나는 검에 마력을 한층 더 불어넣으며 놈에게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다시 한번 멸세폭이 터지고, 구양극의 몸이 완전히 구겨져 처박혔다.
때마침 그곳은 휴고의 발치 앞이었다.
씩 웃은 휴고가 무거운 분노를 내리찍었다.
콰직!
두개골이 완전히 바스러지며 구양극의 숨이 끊겼다.
이제 남은 것은 화왕 하나.
나는 놈과 루스가 싸우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저번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군.’
불을 내뿜으며 서로 차츰 다가간 둘은 마치 커다란 파이어 볼을 연상시키며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치이이익-
주변에 강물이 그 열기에 끊임없이 기화하며 안개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 광경에 휴고가 질린 듯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저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가가기도 힘들겠는데요?”
저번에는 워젤의 힘으로 화왕의 불을 꺼 버렸지만, 이번엔 당연히 그 방법은 쓸 수 없다.
하지만 방법이 없진 않았다.
“이걸로 어떻게든 될 것 같다.”
나는 왼손에 낀 원혼의 거울을 휴고에게 들어 보였다.
그리고 화왕에게 왼손을 겨눴을 때였다.
강으로 피해 있던 물의 정령이 내게 다가왔다.
“저기, 인간님? 고마워요.”
“아, 네. 몸은 괜찮으십니까?”
여유 넘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 없어 마주 인사를 건네었다.
그러자 물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괜찮아요. 근데 저쪽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괜찮으시면 제가 좀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물을 끼얹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잘되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답하면서 좋은 생각을 떠올린 나는 곧바로 정령술사에게 얻은 반지를 사용해 물의 정령의 힘을 북돋웠다.
“아……! 굉장한 물건이네요. 고마워요.”
말과 함께 물의 정령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강으로부터 물로 이루어진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엄청난 크기를 가진 물의 거인은 강둑으로 올라서더니 화왕에게 다가가 확 하고 놈을 덮쳤다.
“와-! 어마어마한데요, 대장?”
휴고의 감탄처럼 굉장한 모습이었다.
물의 거인에게는 딱히 기술이나 요령도 필요 없었다.
그냥 가까이 들러붙는 것만으로도 화왕의 불길이 상당히 사그라들었고, 그 틈은 루스에게 기회가 되었다.
루스의 불길이 화왕의 것을 밀고 들어갔다.
치이이익-
화왕의 몸이 조금씩 불에 타들어 갔다.
“크으윽-!”
놈이 고통을 억지로 삼키는 순간.
‘놀면 뭐 하나.’
나도 놈에게 원혼의 거울을 발사했다.
번쩍-!
광선은 정확히 화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놈의 가슴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오다가 불길에 끓어 사라졌다.
가슴의 통증 때문에 순간적으로 화왕의 힘이 빠졌다.
루스의 불길이 줄어든 화왕의 불길을 완전히 잡아먹으며 밀고 들어갔다.
“크아아아악-!”
단말마와 함께 결국 화왕이 불에 타 숨졌다.
“헤엑- 숨차, 배고파!”
싸움이 끝나자마자 루스가 나를 돌아보며 칭얼거렸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용암 파편을 몇 개 꺼내 루스에게 던져 주었다.
“히힛-!”
녀석은 그것을 냉큼 입에 물고 강가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물의 정령에게 다가갔다.
물의 정령은 힘을 쓰고 조금 지치는지, 물가에 서서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정령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감사하죠. 목숨을 구해 주셨는걸요.”
웃으며 대답한 정령은 궁금한 표정으로 곧장 말을 이었다.
“아, 그런데 인간이신데, 정령계까진 어쩐 일로 오셨어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 정령왕은 아닌 듯했다.
‘정령왕이라면, 표식을 얻으러 왔다는 것을 알았겠지.’
“음, 저는 정령왕님을 만나려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언니를요?”
지금 정령왕을 언니라고 부른 건가?
정령 간에 언니 동생 하는 표현이 존재하는지와는 별개로,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혹시 정령왕이 계신 곳을 아십니까? 저희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던 정령은 이내 질문을 던져왔다.
“구해 주셔서 감사드리지만, 언니는 우리 정령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령인걸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허락 없이 안내해 드릴 수는……. 아?”
거절의 말을 전하던 정령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뭔가 느끼듯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정령의 눈이 뜨이며 입이 열렸다.
“혹시 아는 물의 정령이 저 말고 또 있지 않으세요?”
있다.
그것도 ‘계약’에 의해 무려 특별한 유대를 맺은 사이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지금…….”
말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워젤이 인간계의 몸을 잃고 정령계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워젤이 돌아갈 정령계가 도대체 어디겠는가?
‘하아-. 진작 워젤에게 연락했어야 했어.’
물의 정령계에 들어서자마자 불안하게 움직이는 하급 정령들과 마주쳤다. 그 바람에 미쳐 워젤에게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워젤에게 곧바로 연락했더라면, 상황이 더 수월했을 수도 있을 텐데.
‘뭐, 지금도 썩 나쁘진 않지만.’
내가 말을 하다 말고 생각에 잠기자 물의 정령이 입을 열었다.
“혹시 워젤 언니와 아는 사이에요?”
도대체 정령의 족보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워젤이 눈앞의 정령에게 언니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예, 워젤 님과 저는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습니다.”
“어머-!”
어떻게 이해했는지 물의 정령이 감탄사를 터트리더니, 곧 밝게 웃으며 대답해 왔다.
“그럼 문제없겠네요. 가요, 제가 정령왕께 안내해 드릴게요.”
막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서려다가 빼먹은 일이 떠오른 나는 정령을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그럼 저는 강에서 기다릴게요. 저기가 기운이 풍부해서요.”
말을 남기고 정령은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에 나는 가까이 있는 화왕에게 먼저 다가갔다.
‘아이템 추출.’
그러자 하나의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어, 이거 저번에 그거 아닙니까? 루스가 집어 먹은 거?”
바닥에는 붉은색 구슬이 떨어져 있었는데, 저번에 루스가 허락도 없이 집어삼킨 것과 똑같았다.
“주인-! 그거 나, 나 줘!”
어느새 구슬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루스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구슬을 집어 들려다가, 나는 그냥 가만히 웃으며 서 있었다.
루스는 내 표정을 보더니 냉큼 구슬을 주워 입으로 가져갔다.
“히히-. 맛있다. 주인, 고마워!”
즐거워하는 녀석을 두고 발걸음을 옮겨 구양극의 주검으로 다가갔다.
머리가 바스러진 놈의 사체에 아이템 추출을 사용하자 부적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연기충천부(然氣衝天符)(S. 소모품)]
“이것도 저번에 획득했던 거랑 같군.”
“어째 요즘 들어 아이템이 잘 나오네요, 하하.”
휴고의 말대로 요즘 운이 좋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가장 먼저 죽은 마위니와 아나투스의 옆이었다.
이번에도 아이템을 기대했지만, 나온 것은 두 개의 붉은 보석.
“이건, 음…….”
“꽝이네요. 이건 이제 루스도 잘 안 먹던데.”
내가 아쉬워하고 있자 휴고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나 엔트 때를 생각해 보면, 이것도 분명히 쓰임새가 있다.
보석을 묵묵히 인벤토리에 넣으며 물의 정령에게 다가가려는데,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응? 웬 검이……?’
휴고도 같은 것을 보았는지 다가가더니 냉큼 그것을 집어 들었다.
검은 어딘가 굉장히 낯이 익었다.
“대장, 이거 대장이 쓰는 검 아닙니까? 완전히 똑같은데요?”
휴고가 들고 있는 것은 아론다이트와 판박이로 생긴 검이었다.
녀석에게 다가가 검을 받아 들자, 아론다이트라는 이름과 함께 똑같은 상태창이 떠올랐다.
“음, 관리자가 똑같은 영웅을 계속 찍어 내니까, 아이템도 똑같은 게 나오는군.”
그게 아론다이트 정도 되는 명검이라 신기할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이거 쓸데가 있을까요? 보호막 뚫는 것 말고는 불의 검이 더 좋잖아요.”
“갖고 있다 보면 언젠가 쓰겠지.”
그렇게 대꾸하고는 휴고에게서 검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 발길을 강가로 옮겼다.
그러다 두 개가 되어 버린 아론다이트의 활용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하지만 당장 쓸 일은 없을 테니 기억만 해 두기로 하고 나는 강가에 있는 물의 정령에게로 다가갔다.
“일은 다 끝나셨나요?”
“네, 이제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물의 정령은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고, 우리를 강둑을 걸어 그 뒤를 따랐다.
* * *
안내를 받는 동안 물의 정령과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정령의 이름은 라블라.
예상대로 이곳 물의 정령계에 몇 안 되는 최상급 정령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뜻밖의 사실을 듣게 되었는데.
“정령계에서는 대부분의 정령이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있어요. 인간계에서 사용하는 몸과는 다르죠.”
인간계에서 정령은 해당 속성의 기운을 뭉쳐 몸을 만든다.
그 때문에 물의 정령은 대부분 물방울이 변형된 모습이었다.
즉, 인간계에서 물로 이루어진 인간 형상의 실루엣이었던 워젤도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의 정령계에서 만난 정령들이 불꽃이나 불덩이가 아니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
실제로 길 안내를 해 준 늑대는 정말 짐승 같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위 정령이 될수록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하는 경우가 많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뿐만 아니라 라블라는 높은 지성을 갖춘 정령일수록 그 형상이 인간을 닮아 간다는 사실도 알려 주었다.
“그렇군요. 왠지 고위 정령들이 다 인간과 닮았다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워젤도 불의 정령왕도 다 인간과 차이가 없는 외형이었다.
“저도 인간계에서는 이런 몸을 하지는 못한답니다.”
말과 함께 라블라가 살짝 뛰어올랐다가 내려섰다.
“헙-.”
옆에서 휴고가 놀라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라블라가 격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민망한 부위가 크게 출렁였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몸에 두르고 있던 물의 갑옷은 사라졌고, 대신 손바닥만 한 의복이 아슬아슬하게 라블라의 몸을 가리고 있어 민망함이 더했다.
그런 휴고를 보며 웃던 나는 문득 한 가지를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라블라 님, 그놈들과는 어쩌다가 싸우고 계셨던 겁니까?”
“아, 우연히 만났어요. 하급 정령들이 이상할 정도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이상한 탑을 발견했어요. 아-! 그 탑! 그걸 그대로 두면 안 되는데!”
말을 하던 라블라는 탑의 존재를 떠올리고 발걸음을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돌아갈 태세라 나는 재빨리 라블라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 탑은 저희가 오는 길에 부쉈습니다. 주위에 지키던 자들도 처리했고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감사해요, 정해수 님. 정말 여러 가지로 은혜를 입네요.”
“아닙니다. 대신 정령왕을 만나게 해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내가 앞을 향해 손짓하자, 라블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