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30화>
나는 곧장 일어나 정령왕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멍하니 있던 정령왕은 내가 다가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커흠, 그래. 짐이 이제 표식을 내려야겠지.”
멍하니 있던 것이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내뱉는 모습이 우스웠다.
“예, 표식을 내려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손을 내밀거라.”
내가 손을 내밀자 정령왕의 손에서 불꽃이 한 줌 피어올라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느낌이 손바닥을 따라 심장까지 올라왔다.
‘이건…… 꼭 전에 워젤에게 표식을 받았을 때와 비슷하군.’
같은 정령의 표식이라 그런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표식을 받았으니, 다음 층으로 갈 생각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 청이 더 있는데, 감히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응? 청이 더 있다고?”
앳된 얼굴을 갸웃한 정령왕은 곧바로 내게 되물어 왔다.
“표식 말고 또 원하는 것이 있느냐? 모처럼 짐이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주었으니, 웬만하면 들어주도록 하마. 청해 보아라.”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는 정령왕의 모습에 삐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저와 계약을 맺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계약이라고? 너는 정령술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딱히 인간과 계약을 맺어 인간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하는 짓을 보면 여기 오래 눌러앉아 있다 보니, 어쩌다가 정령왕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나는 정령왕과의 계약을 쉽게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제가 계약을 맺으려는 것은 전하를 인간계로 데려가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악신이 강림하여 세상이 멸망의 위기에 내몰렸으며, 그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위대하신 정령왕께서 힘을 보태 주시면, 천군만마보다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아부를 날렸다.
내 말이 끝나자 정령왕의 표정이 얼떨떨해졌다.
아마 갑자기 일이 너무 커지자 정신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쯧, 하필 저런 중이병에 어리바리한 녀석이 정령왕이라니.’
내가 속으로 혀를 차고 있을 때에도 정령왕의 멍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젠장, 이러면 어쩔 수 없다. 루스가 날뛰지 말아야 할 텐데.’
나는 망설이던 방법을 쓸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인벤토리에서 용암 파편을 한 움큼 꺼내 들었다.
화염의 지옥으로 갈 때 용암 골렘을 잡고 얻은 것으로, 불의 기운이 가득해 루스가 간식으로 즐기던 것이다.
‘발록을 잡을 때 잔뜩 먹었고, 그 뒤로도 틈틈이 간식으로 틈틈이 먹였더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과 함께 루스를 슬쩍 쳐다보다가, 녀석과 눈이 딱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루스는 경악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용암 파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령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것은 무엇이냐?”
루스의 시선 때문에 뒤통수가 저릿했지만, 나는 일단 정령왕과 대화를 이어 갔다.
“이것은 화염의 기운을 품은 물건으로, 전하께서 저와 계약을 맺어 주시면 드리려고 가져온 공물입니다.”
“그래? 그, 그걸 나한테 준다고?”
“예.”
“아니야-!”
내 대답과 동시에 뒤에서 루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재빨리 사태를 파악하고 휴고에게 뜻을 전했다.
- 휴고, 긴급 상황이다. 루스 데리고 멀리 물러나. 날뛰지 않게 좀 다독여 봐.
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루스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는 멀리 물러났다.
“내 거야. 주인-! 내 간식이란 말이야-!”
루스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일단은 못 들은 척했다.
‘아까 동굴에서 엄청나게 먹은 것 같아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루스의 식탐을 내가 조금 얕봤었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데, 정령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음. 그거 정말 나 줄 거야?”
“예, 저와 계약을 맺으시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와 계약한다고 해서 인간계로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꼭 필요할 때 힘을 보태 주시면 됩니다.”
내가 다시 한번 인간계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강조하자 정령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일단 하나만 미리 먹어 봐도 될까?”
‘하, 이 자식이…….’
괜스레 버티는 모습에 불쑥 짜증이 났지만, 나는 티 내지 않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용암 파편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곧바로 정령왕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오오, 이거 얼큰하니, 맛있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말이 정령왕에게서 흘러나오더니.
“계약하자!”
방긋 웃으며 정령왕이 말했다.
한쪽 손은 내 손에 들린 용암 파편을 향해 내밀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계약을 맺고 머릿속으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설명하느라 짧은 시간이 흘렀다.
앞으로 관리자와의 싸움을 위해 해 줘야 할 일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정령왕에게 물었다.
“다른 정령계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쪽으로 쭉 가면, 문이 나와. 표식이 있으면 문이 열릴 거야. 냠-.”
정령왕은 용암 파편을 입안에서 사탕처럼 굴리며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응, 이거 잘 먹을게. 고마워.”
용암 파편에 완전히 무장 해제당한 정령왕은, 근엄하던 표정을 어디 팔아먹었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군. 꼭 누구랑 닮았어.’
나도 마주 웃으며 인사하고는 등을 돌렸다.
산길을 따라 한참 내려가니 휴고와 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루스는 휴고의 등허리를 연신 주먹으로 치고 있었다.
퍽- 퍽-
“내 간식!”
“아야, 대장이 더 맛있는 걸로 구해 주시겠지. 대장 못 믿냐?”
“너 때문이야, 이 돼지야!”
“야야, 왜 나한테 그러냐? 대장이 정령왕한테 준 걸 가지고…….”
“어쨌든 너 때문이야-.”
퍽-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정겹다.
저것은 정겨운 모습이 분명하다.
제대로 때리면 저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루스에겐 조금 미안한 일을 했으니,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루스.”
내가 부르자 녀석이 휴고를 구타하는 것을 멈추었다.
하지만 토라진 것이 역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을 회피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지만, 왠지 당황스럽기보다는 웃음이 났다.
나는 씩 웃으며 루스에게 좀 더 다가갔다.
“내가 나중에 진짜 맛있는 걸 먹여 줄게. 돈가스라고, 최고의 음식이 있어.”
내 말에 루스의 귀가 쫑긋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는 돌린 채였다.
그때 나의 듬직한 도우미, 휴고가 거들어 왔다.
“돈가스요? 저쪽 세상 음식 맞죠? 전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는데, 정말 귀한 음식인가 보군요?”
적절한 어시스트다.
루스의 귀가 한층 더 쫑긋거리는 것이 흥미가 잔뜩 동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설득에 박차를 가했다.
“암, 정말 훌륭한 음식이지.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망치로 두들긴 후…….”
한동안 돈가스를 최대한 미화하기 위해 내 뇌가 풀가동되었다.
돈가스는 점점 세계 최고의 미식으로 포장되어 갔다.
“오, 정말 맛있겠군요.”
중간중간 휴고의 적절한 추임새가 있었다.
“그래, 그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식감은…….”
루스를 달래려 시작한 설명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나도 식욕이 당겼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부터 워낙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달려오느라, 음식 따위에 신경 쓴 적은 없었다.
‘특히 저쪽 세상의 음식을 해 먹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날이 올 줄은 나도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보니, 생각이 현실이 되는 날이 간절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격을 얻을 수만 있다면…… 돈가스 정도는 만들어 먹을 수 있겠지. 정 안 되면 가서 먹어도 될 테고.’
그날을 꼭 이루리란 다짐과, 그때까지 휴고와 루스를 잃지 않겠다는 결심이 겹겹이 쌓였다.
잠시 회한에 잠긴 틈에 루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인, 나 그거 많이 먹어도 돼?”
돈가스에 대한 식욕과 궁금함이 토라진 마음을 앞선 모양인지 루스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해 있었다.
“그래, 먹고 싶은 만큼 먹여 주마.”
“꼭 먹게 해 줘야 해!”
“그래, 나도 꼭 너랑 돈가스를 같이 먹고 싶다.”
나는 진심을 담아 대답하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스도 토라진 일은 이제 떨쳐 버렸는지, 마주 웃어 보였다.
* * *
정령왕이 가르쳐 준 방향으로 한참을 걷자 우리 앞에 한 번 본 적 있는 광경이 나타났다.
“또 엘리베이터군요. 취향이 참 일관적이네요.”
휴고가 창조주의 취향을 지적하는 동안 나는 앞으로 나섰다.
다음 정령계로 가려면 눈앞의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 터였다.
엘리베이터 바로 앞까지 도착하자 정령왕에게서 받은 표식에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킬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음? 이렇게 하는 건가?’
나는 손을 들어 엘리베이터의 버튼 위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표식이 반응했고, 곧이어 버튼이 빛나더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일행과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 닫히는 문틈 사이로 불의 정령계가 보였다.
“표식 하나는 그럭저럭 빠르게 획득했군.”
그때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휴고가 대답해 왔다.
“이제 세 군데만 더 처리하면…… 다 끝나는 건가요?”
“그래도 관리자와의 싸움이 남겠지.”
계획대로만 된다면, 승산은 충분하고도 남겠지만.
“아, 그렇네요. 그나저나 다음 층은 어디일까요?”
“매번 바뀐다니 문이 열려야 알 수 있을 거야.”
“다음 정령계도 이번처럼 빠르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대장.”
“그래…….”
이번처럼 되면 좋긴 한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마법진은 어떻게 된 거지?’
불의 정령계에서 제대로 전개되기 전에 파괴해 버린 마법진.
그것은 분명히 병력을 보내기 위한 이동용 마법진이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우리가 불의 정령계에 있다는 것은 몰랐을 텐데.’
문이 열리기 전에는 우리도 다음 행선지를 알 수 없었으니, 관리자도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터.
그렇다면 우리를 죽이기 위해 네 군데 정령계에 모두 병력을 보낸 것일까?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할 만한 여유는 관리자에게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법진에서 나타날 병력이 궁금해졌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영웅이 나타날 확률이 높겠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황제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을 테고.’
영웅을 다시 만들어 내듯이, 황제라고 해서 다시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관리자의 힘에 제약이 있어 다행이지만……. 이번 행동은 알 수가 없군. 뭘 노리는 건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나는 문틈으로 보이는 다음 층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 이번에는 물의 정령계네요, 대장.”
휴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한걸음 나섰다.
휴고의 말대로 이번 층은 물의 정령계였다.
눈앞에 흐르는 커다란 두 개의 강줄기를 보고 대번에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길 헤맬 일은 없겠다.”
“그러게요. 여기 강둑을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른 데로 가기도 힘들어 보이고요.”
우리가 딛고 선 곳은 안개가 자욱이 깔린 강둑 위였다.
두 개의 강이 나란히 흐르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난 강둑 위에 엘리베이터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강둑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 위를 걸어 다닐 게 아니면, 이 길을 따라갈 수밖에.’
우리는 강둑 위를 분주히 나아갔다.
양옆으로 흐르는 강줄기는 너비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 속에 언뜻 정령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어딘지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을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째 이번에는 정령들이 대장한테 접근하지 않네요?”
정령의 움직임을 본 휴고가 내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이곳의 정령들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무언가 일이 생겨서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뒷말은 삼키고,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갔을 때, 우리는 정령들이 불안하게 움직였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인, 탑이야!”
언제 생겨났는지 멀리 탑이 불길한 기운을 뿌리며 서 있었다.
그리고 황가수호대가 탑 주변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