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9화>
이제야 제대로 본 정령왕은 굉장히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이었으면 딱 중학생 정도의 외모였는데, 뽀얀 피부에 붉은 머리가 독특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랑 조금 닮았군.’
그렇게 생각하며 루스를 흘끔 쳐다보고 있는 사이, 정령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인간이 이 불의 정령계에는 무슨 일인고?”
중딩의 외모에 저런 말투라니 영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한껏 근엄한 척하는 표정까지.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정령왕이 가장 좋아할 것 같은 말투와 태도로 대답했다.
“위대하신 정령왕 전하께 한 가지 청이 있어 멀리서부터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옆에서 휴고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말을 마치고 내가 고개를 깊이 숙이자, 휴고도 슬쩍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고개를 따라 숙였다.
그러면서 휴고는 멀뚱히 있던 루스의 등을 눌러 루스도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루스는 입을 삐쭉 내밀면서도 고개를 억지로 들지는 않았다.
내 공손한 말투가 마음에 들었는지 정령왕이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위대한 짐에게 청이 있다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짐이 지금 바쁜 일이 있어서…… 아, 혹시?”
“…….”
“너희는 혹시 표식을 얻으러 온 것이냐?”
질문을 하는 정령왕의 표정이 왠지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관리 차원으로 가기 위해 표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렇군, 그랬어. 잘되었군.”
불의 정령왕은 한동안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 대장, 상태가 좀 이상한데요? 진짜 정령왕이 맞을까요?
휴고가 영 의심스럽다는 듯,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 표식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정령왕이 맞긴 맞아. 일단 뭐라고 하는지 좀 더 들어 보자.
그때 정령왕이 혼잣말을 끝내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표식을 얻으러 왔으면, 그 방법도 알고 있겠지?”
“예, 정령왕께서 내리시는 한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부디 시험을 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럼 지금 즉시 한 가지 시험을 내리겠다. 저기 분화구 속에는 한 마리 새가 살고 있어. 너희는 그 새의 알을 하나 구해 오면 된다. 그럼 내가 표식을 주도록 하지.”
‘설마 새알 훔치려고 숨어서 보고 있던 거였나?’
정령왕이라는 놈이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야 어쨌든 표식만 얻으면 그만이니까.
잠시 후, 우리는 정령왕과 함께 조금 전에 정령왕이 엎드려있던 곳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분화구는 뜨거웠다.
조금만 내려가면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열기가 끼쳐왔다.
정령왕이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저기, 저 굴속에 그놈이 살아. 내가 접근하면 놈이 분명 화가 나서 달려들 것이야. 그러니 내가 놈을 유인해 내면, 그 틈에 들어가서 알만 하나 집어서 나오면 돼. 쉽지?”
“그……렇군요.”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정령왕의 말처럼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령왕이 가리킨 구멍은 흐르는 용암으로 반쯤 막혀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용암에서 피어오른 열기로 가득했다.
결코 아무나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휴고는 절대로 안 되겠고…….’
저기 흐르는 용암이 피로 바뀌지 않는 이상, 휴고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강기공을 최고로 끌어 올리고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긴 되겠군.’
그러나 용암에 둘러싸인 채로 전투라도 벌어지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게 뻔했다.
‘그럼 남은 건…….’
나는 루스를 쳐다보았다.
녀석이야말로 이 일에 적격이었다.
하지만.
‘막상 혼자 보내려니 영 걱정인데.’
그때 걱정 어린 내 시선을 느낀 루스가 입을 열었다.
“주인, 내가 갔다 올게. 따뜻해 보이고 좋아. 그리고…….”
녀석은 작게 ‘맛있는 냄새도 나’라고 말끝에 덧붙였다.
해맑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걱정하는 것이 의미 없게 느껴졌다.
나는 픽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응, 주인!”
인원 선발이 끝나고, 나는 다시 정령왕을 돌아봤다.
“정령왕 전하, 언제쯤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오오, 준비가 다 끝났느냐? 그럼 즉시 시작하도록 하지. 내가 먼저 소란을 피우겠다.”
정령왕은 오매불망 기다렸는지, 내 말을 듣고는 즉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분화구로 훌쩍 뛰어내렸다.
“엇! 뭐 저런……?”
휴고가 옆에서 어이없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분화구 안에서도 변화가 발생했다.
날개의 길이가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새 한 마리가 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새는 정령왕을 보자 온몸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르릉- 콰아앙-!
열기는 우리가 있는 위쪽까지 훅하고 덮쳐 왔다.
“어우, 뜨거워. 그나저나 잘 싸우는데요?”
휴고는 정령왕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나 역시 휴고의 말에 동의하며 정령왕의 전투를 감상했다.
“그래도 정령왕이라 그런지, 상당히 강하긴 강하네.”
불을 뿜는 새도 굉장히 강했지만, 정령왕은 더 강했다.
다만 새를 죽일 마음은 없는지, 적당히 상대해 주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주인, 이제 다녀올게.”
정령왕과 새가 슬슬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루스도 동굴을 향해 출발했다.
분화구 안으로 훌쩍 뛰어내린 녀석은 망설임 없이 동굴 속으로 사라져갔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위험했으면 제일 먼저 눈치챘을 녀석이잖아. 아니면 네가 같이 가기라도 하게?”
“하하, 저는 좀……. 뜨거운 게 질색이라. 그나저나 정령왕의 시험이 원래 이런 식인가요? 그냥 자기 내키는 대로 막 시키는 것 같은데?”
“정령계 전체에 해를 끼치는 일을 제외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난이도면 뭐든 된다더라. 시험을 받고자 하는 자가 찾아오면 꼭 시험을 내려야 한다는 것과 난이도. 그 두 가지 규칙만 지키면 돼.”
“그건 좀,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애초에 정령왕이라는 지위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아까 그 새도 정령이 분명한데, 정령왕을 막 공격했잖아?”
그제야 휴고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계에 가지 않은 정령 중에 아무나 하는 거였군요, 정말?”
“아무나까지는 아니지만…… 특별히 대단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지.”
우리는 구석에 적당히 몸을 감추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참을 지나도 루스는 동굴에서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정령왕은 머지않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하하, 짐이 돌아왔느니라. 알은 어떻게 되었느냐? 가지고 왔느냐?”
잠깐 헤어졌다가 금세 다시 보는데도, 저 얼굴에 저 말투는 영 어색했다.
“아직 동굴로 들어간 일행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대뜸 묻는 정령왕에게 나는 정중하게 연기하며 대답했다.
새는 어디다가 잘 떨어뜨려 놓고 왔는지, 주위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이라고? 흐음, 동굴이 생각보다 깊었나 보네. 나 혼자 안 들어가길 잘했군.”
뒷말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정확히 들었다.
‘이 자식, 제대로 조사도 안 해 봤었군. 쯧, 괜찮으려나?’
나는 동굴을 노려봤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강기공을 두르고 직접 뛰어들 생각이었다.
푸아아악-
그때 동굴에서 용암이 거세게 분출되었다.
속에서 뭔가 충격이 발생하며 용암이 떠밀린 것처럼 보였다.
“대장!”
그 모습에 휴고가 놀라 소리쳤지만, 나는 일단 손짓으로 녀석을 말렸다. 그리고 동굴을 유심히 살폈다.
잠시 후, 동굴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온몸에 용암을 뒤집어쓴 상태였지만, 나는 그것이 루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녀석은 몸에 묻은 용암을 툭툭 털어 내더니, 풀쩍 뛰어올라 분화구를 올라왔다.
“주인, 다녀왔어!”
갈 때와 전혀 달라진 것 없는 모습.
걱정한 것에 비해 너무 멀쩡해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수고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응, 아무 문제 없어. 주인, 자, 이거.”
녀석은 말과 함께 품에서 새하얀 알을 하나 꺼내 들었다.
알은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녀석이 웬일로 이런 걸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지?’
식탐을 부릴 만도 한데 흔쾌하게 알을 내미는 루스의 태도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알을 받아 들어 정령왕을 향해 내밀었다.
“알을 구해 왔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령왕이 냉큼 알을 받아 들었다.
“오, 드디어 이걸 맛볼 수 있게 되었군. 이 진미를 먹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했던가?”
정령왕은 감격한 듯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세히 보니 입가에 침도 조금 새어 나온 것 같았다.
“정령왕 님, 시험이 끝났으면 표식을 내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재촉에 정령왕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좀 먹고 하면 안 될까?”
정령왕의 대답을 들은 휴고가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정령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드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어차피 표식만 받고 끝낼 것도 아니었기에 조금 더 기다리는 게 문제는 안 됐다.
그러자 정령왕이 아래를 손짓하며 말했다.
“저리 가자, 저리. 여기 계속 있으면 새가 돌아올지도 몰라.”
켕기는 것이 있는지 정령왕은 우리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달렸다.
잠시 후, 우리는 정령왕이 새알을 구워 먹는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했다.
용암에도 멀쩡했던 알이지만, 정령왕의 불길에는 버티지 못하고 노릇노릇 익어 갔다.
“대장, 이래도 됩니까? 이건 뭐, 남의 알을 서리하는 게 시험이라니……. 게다가 그걸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이거 참.”
휴고는 지금 상황이 영 마뜩잖은 것 같았다.
“괜찮다. 저걸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따로 부탁할 것도 있고.”
“아……! 다른 생각이 있으셨군요. 왠지 아까부터 너무 고분고분하신 것 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 계약을 부탁할 생각이야. 그러려면 좀 비위를 맞춰 줘야지.”
“그것 때문이었군요.”
그제야 휴고가 납득했다는 듯 표정을 풀고 다시 정령왕 쪽을 바라봤다.
나 역시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정령왕에게 요구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이곳 정령계의 정령왕들은 표식을 전하는 역할만 가진다.
그것은 관리자가 배신하기 전에 이미 만들어진 역할로, ‘구원자’라는 내 역할과는 무관하다.
‘안배된 바가 없으니, 계약에 쉽게 응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설득하는 수밖에.’
생각 중에 휴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라 루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루스, 근데 너 저 알 안 먹고 싶었어? 너무 순순히 내어놓던데…….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안 그래도 궁금하던 바라 루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난 많이 먹었는데?”
“많이 먹었다고? 뭘? 저 새알?”
휴고가 되묻자 루스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잔뜩 있어서, 다 먹고 하나만 남겨 왔어. 그리고 고기도 먹었어. 배불러.”
‘고기라고? 동굴에 무슨 고기가…….’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휴고가 그 점을 짚었다.
“고기? 동굴에 고기가 있었다고?”
“응, 새 고기. 구워 먹었어.”
“뭐? 설마 동굴 안에 새가 있었던 거야?”
“응, 큰 새. 내가 알 먹는데, 막 덤비잖아. 그래서 잡아먹었어. 그것도 맛있었는데, 츄릅.”
“맙소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싶더니, 그 안에서 새 정령을 잡아먹고 있었을 줄이야.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고 시험도 통과했으니 되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나저나 저 정령왕 자식……. 동굴 안에 새 정령이 한 마리 더 있었다는데, 도대체 조사를 하긴 한 거야?’
어이없는 눈으로 정령왕을 돌아보는데, 알을 막 씹고 있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눈이 반쯤 풀려 있고, 턱관절이 엄청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어서 먹어라. 계약이나 하자.’
반쯤 포기하는 마음으로 잠깐 더 기다리자 드디어 정령왕의 식사가 끝났다.
“맛있어. 아…….”
정령왕은 내용물이 사라져 버린 알을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인벤토리에서 한 가지 물건의 재고 상황을 확인했다.
‘음…… 썩 많이 남지는 않았네. 루스가 가만히 있을는지 모르겠군.’
어쨌든 이걸 활용하면 정령왕과의 계약을 조금 더 수월히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