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8화>
반지를 보자 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엔트들도 내게 전혀 의심이나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었지.’
엔트도 나무의 정령인 만큼 이 반지의 영향을 받았을 터였다.
‘그래서 내게 잘 대해 주었던 모양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휴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령도 찾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하.”
내가 정령에 둘러싸여 곤란해하는 모습이 제법 재밌는지,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나는 애써 녀석의 표정을 무시한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군데의 정령계를 모두 통과해야 상위 관리 차원으로 갈 수 있는데, 그러려면 정령왕을 만나 표식을 받아야 해.”
“헛! 정령왕이요?”
“음, 명칭이 정령왕이긴 한데, 너무 대단한 걸 기대하지는 마. 그냥 정령계를 관리하는 대표 같은 거니까.”
정령왕은 최상위의 정령 중 인간계에 가지 않은 정령이 맡는, 일종의 관리직이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특별히 강력한 권한도 없었다.
단지 마땅한 호칭이 없어 왕이라고 불릴 뿐.
“그럼 별로 강하지는 않은 겁니까?”
“그렇지는 않지. 굉장히 강하긴 할 거야. 다만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지. 노즈도름이나 워젤도 몹시 강했지만,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잖아.”
“아, 그렇군요.”
휴고는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다시 물어 왔다.
“그럼 정령왕은 어떻게 만납니까?”
“…….”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창조주가 내게 이야기해 준 것, 그리고 전해 준 지식은 굉장히 단편적이었다.
이곳에 오는 과정도 동쪽으로 가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찾으란 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다 보니.
‘구체적인 부분에서 턱턱 막히는구만. 그냥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면 좀 좋아? 쯧.’
혀를 차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루스가 의외의 말을 했다.
“얘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내 주위를 둘러싼 정령들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하급 정령이라고는 하나, 분명 정령은 정령.
지성을 가진 존재이니만큼 제대로 된 답을 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근데 아무리 봐도 말을 못 할 것 같은데.’
아까부터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늑대는 그냥 늑대였다.
몸에서 불의 기운이 느껴질 뿐, 짐승과 별다른 바가 없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마땅한 방법도 없으니,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문을 해 보았다.
“어, 음. 늑대야. 너 혹시 정령왕이 어디 있는지 아니?”
왕왕-
그러자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짖었다.
“엇! 알아들었나 본데요?”
나는 휴고에게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늑대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정령왕에게 안내해 줄 수 있니?”
왕왕-
이번에도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짖는 소리만으로 의사를 파악해야 하니 좀 답답했지만, 그래도 돌파구를 발견한 것 같았다.
내심 안도하고 있는데, 휴고가 아쉬운 표정으로 늑대를 쳐다봤다.
“말은 못 하나 보네요. 근데 대장이 계약을 맺으면 마음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휴고의 말에 늑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하급 정령까지 일일이 계약을 할 필요는 없어.”
목표는 하급 정령이 아니라 정령왕이다.
표식을 얻어 상위 관리 차원으로 향하는 것이 일차 목표이지만, 정령왕과 계약하는 것 또한 이곳에서 이루어야 할 또 다른 목표였다.
관리자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할게. 안내해 주렴.”
내가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자 늑대가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그 길로 우리는 늑대를 따라 걸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스라이 보였던 언덕들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이동했다.
그러자 드문드문 다른 정령들이 나타났다.
“엇! 대장. 저 새도 정령 아닙니까?”
“그래, 정령 맞아. 품고 있는 기운이 이 늑대보다 훨씬 커. 아마 못해도 중급 정령은 되어 보인다.”
“그러면 여기부터는 좀 더 강한 정령들이 있는 곳이군요.”
나는 휴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주위를 살폈다.
휴고가 가리킨 새 형태의 정령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하급 정령보다 수는 적어 보였지만, 확실히 더 강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얘들은 아까 전처럼 대장한테 막 달려들지는 않네요. 등급이 높아서 그런가?”
“그런가 보다.”
아무래도 정령의 등급이 높으면 반지의 영향을 덜 받는 것 같았다.
늑대는 격이 높은 정령들 때문인지 한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우리는 계속해서 늑대를 따라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늑대가 발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귀를 쫑긋거렸다.
동시에 사방에 있던 정령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정령들의 고개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는데, 루스가 소리쳤다.
“주인! 저기야! 곧 놈들이 나타날 거야.”
그곳에는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인 마법진이 나타나 있었다. 마법진은 이제 막 생겨났는지 서서히 빛을 키워 가고 있었다.
‘벌써 여기까지?’
관리자의 대처가 생각보다 굉장히 빨랐다.
내 의도를 눈치챈 후로 관리자도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정령의 반응 덕분에 굉장히 빠르게 이동용 마법진을 발견했다.
강하게 공격을 가하면, 마법 자체를 취소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소한 영웅들이 나타나는 즉시 타격을 줄 수는 있겠지.’
나는 불의 검을 뽑아 들고 마법진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걸 한번 써 볼까? 어차피 실험도 해 봐야 하니.’
결정을 내린 나는 불의 검에서 마력을 거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내 최초의 스킬을 사용했다.
‘랜덤 영웅 소환.’
그러자 이전에 쓸 때와는 다르게 마법진을 사용할 장소를 내가 임의로 지정할 수 있었다.
황제를 처치하고 얻은 ‘마법진 원거리 설치’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나는 멀리서 빛을 뿜고 있는 이동용 마법진 위로 영웅 소환 마법진을 겹쳐 설치했다.
코인과 함께 마력이 빨려 나갔다.
원래는 코인만 소모되었었는데, 마력이 사용되는 것이 이전과의 차이였다.
‘멀리 설치할수록 마력이 더 많이 소모되려나?’
잠시 바뀐 스킬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소환 마법진이 완성되었고, 곧 영웅이 실루엣을 드러내었다.
예상대로 이동 마법진보다 소환 쪽이 훨씬 빨랐다.
나는 나타난 영웅의 이름을 확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환수 폭발.’
그러자 나타난 영웅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콰쾅! 콰콰콰아앙-!
폭발은 쉬이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나는 눈을 떼지 않고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스킬의 위력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저 정도면……. 확실히 멸세폭보다 훨씬 강하다.’
이제 거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된 멸세폭과 달리 코인이 소모되지만, 이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위력이 엄청나네요. 아예 마법진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데요?”
휴고가 짐짓 몸을 부르르 떠는 척하며 다가왔다.
씩 웃고 있는 것이, 휴고도 내 새로운 스킬이 내심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코인이 드니까. 이 정도 위력은 나와 줘야지.”
나도 흡족한 표정으로 녀석에게 대답해 주고, 마법진이 있던 위치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땅이 뒤집어지며 커다란 크리에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확실히 파괴력 면에서는 만점을 주어도 좋았다.
사용 시에 영웅 소환까지 잠깐의 시간이 소모된다는 점이 단점일 뿐.
‘그러고 보니 소환한 영웅의 사체가 남지 않아 아이템 추출을 못 하는군.’
이 또한 소소하지만 아쉬운 점이었다.
그때 나를 따라 크리에이터를 살피던 휴고의 입이 열렸다.
“처음으로 놈들의 이동을 저지했네요. 매번 이렇게만 되면 수월할 텐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정령들이 먼저 이상을 감지하는 덕분에 가능했던 거지. 아마 계속 이렇게 할 수는 없을 거야.”
이곳이 정령계이고 그곳의 주민인 정령들이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 터였다.
설사 정령이라고 해도 자신이 사는 정령계가 아니면 지금 같은 반응 속도는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정령계까지 관리자의 마법진이 닿네요.”
“정령계라고 해서 딱히 특별한 곳은 아니니까.”
정령계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령이 필요했던 창조주가 정령을 모아 둔 곳일 뿐이다.
물론 함부로 오가지 못하게 장치는 되어 있지만, 그것이 관리자의 마법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정령계가 특별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들어올 수나 있었겠냐?”
그리고 창조주가 이곳을 그렇게 특별하게 여겼다면, 정령계를 상위 관리 차원으로 통하는 개구멍으로 만들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상념을 떨쳐 버리고 나는 고개를 사방으로 돌렸다.
늑대 정령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딱히 그럴 필요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왕왕-
늑대는 내 발 바로 밑에 앉아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짖어 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 가던 길 계속 가자. 정령왕에게 안내해 주렴.”
내 말을 알아들은 늑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주위에 있던 정령들은 사달이 일어났음에도 별 관심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한참 더 이동하자, 이번에는 더 격이 높은 정령들이 나타났다.
“웬 인간이 정령계에 다 들어와 있는 거지? 신기하네.”
“그러게. 저 늑대 녀석이 길 안내를 해 주고 있는 모양인데?”
사람의 형상을 한 불의 정령들이 우리를 보고 저희끼리 떠들었다.
딱히 이쪽에 관여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아, 우리도 그냥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온 불의 정령계를 가로지르다시피 해서 도착한 곳은 화산이었다.
꼭대기에서 연신 연기를 뿜어내는 것으로 보아 활발히 활동 중인 활화산이었다.
“으으, 또 화산이라니.”
“하하, 따뜻해!”
뜨거운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휴고가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루스는 신나서 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여기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 늑대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여기가 정령왕이 있는 곳이니?”
왕왕-
“너는 더 못 올라가는가 보구나.”
왕왕-
“고맙다. 안내해 주느라 고생했어.”
왕왕왕-
나는 연신 꼬리 흔들며 짖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일행을 이끌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제법 높은 산이었지만, 우리 일행의 체력 앞에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산의 정상 언저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 저기 저거, 정령 맞죠? 근데 왜 저렇게 땅에 엎드려 있을까요?”
휴고가 말한 곳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정령이 바닥에 엎드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화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염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대체 뭐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혹시 정령왕은 아니겠죠?”
휴고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정령이 가진 바 기운이 굉장히 강했다. 저 정도면 정령왕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글쎄다. 일단 한 번 가 보자.”
나는 일행을 데리고 엎드려 있는 정령 쪽으로 다가갔다.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았음에도 정령은 우리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다.
‘정신을 완전히 팔고 있구만. 기가 차는군.’
품고 있는 기운은 아무리 봐도 정령왕이 맞는 것 같았는데, 대화도 나누기 전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아무리 인간계로 가지 않은 정령 중에 가장 강한 자가 맡는다고 해도, 어쩌다가 저런 정신없는 정령이…….’
어쩔 수 없이 나는 인기척을 내기로 했다.
“흠, 크흠.”
내가 헛기침을 몇 번 하자 그제야 정령이 화들짝 놀라 내 쪽을 돌아봤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눈이 커져 있었다.
하지만 정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쉿, 조용히 해.”
정령은 우리가 누군지 묻지도 않고 입단속부터 시켰다. 그리고 손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산에서 내려갈 것을 종용했다.
심지어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자신이 먼저 앞장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아래로 따라갔다.
한참을 내려가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야 정령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뒷짐을 지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령계에 인간이 들어오다니,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짐이 이 정령계를 다스린 지 어언 백 년이 넘었는데, 이곳에서 인간은 처음 보는구나.”
‘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보니 정령왕이 맞긴 맞는 것 같았다.
‘근데 이건 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