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7화>
갑자기 관리자의 악의를 접하며 신경이 바짝 곤두섰었다.
그 바람에 늘 하던 일을 잊고 있었고.
마음먹은 즉시 나는 황제의 주검으로 바짝 다가가 ‘아이템 추출’을 사용했다.
잠시 후, 바닥에 화려한 빛을 띤 보석 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보석 조각은 척 보기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곳저곳 금이 가 있었는데, 조금만 세게 잡아도 가루가 될 것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 들었다.
[4단계 통합 영웅 정수의 파편(SS. 비약)]
- 4단계 소환 영웅의 스킬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통합 영웅 정수’가 파괴된 조각. 부서지면서 많은 기능을 상실했다. 사용 시 단 하나의 스킬만 획득할 수 있다. 조각나는 바람에 어떤 스킬이 들어 있는지 사용 전까지 알 수 없다.
“허-!”
아이템을 주워 들어 설명을 읽자,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만큼 아이템의 설명은 놀라웠다.
‘황제의 가슴에서 빛나던 것이 이 보석이었군. 그럼 이게 멀쩡했으면 소환 영웅의 모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였나?’
그렇게 생각하자 굉장히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 내었다.
‘이걸 부수지 않고는 황제를 죽일 수 없었어. 그러니 아쉬워해 봐야 의미 없다.’
마음을 고쳐먹고 손 위에 놓인 보석을 바라봤다.
‘역시 지금 사용하는 게 좋겠지?’
굳이 묵혀 둘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 나는 이것을 즉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보석의 사용 방법을 잠시 고민하다가, 설명에 비약이라 표시된 것이 떠올라 입으로 집어넣었다.
“응? 주인도 기운 없어? 배고파?”
옆에서 루스가 시답잖은 소리를 떠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아이템의 효과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스킬이 나오려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효과가 뜨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뭔가 느껴져 상태창을 열어 보니 하나의 스킬이 더해져 있었다.
[마법진 원거리 설치]
: 모든 마법진을 사용하는 스킬을, 눈앞이 아닌 원하는 곳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력의 양과 운용 능력에 따라 설치 가능한 거리가 달라진다.
설명을 읽는 순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건 아나투스의 스킬인 거 같은데, 조금 애매하군. 어디에 쓰는 거지?’
조금 아쉬운 느낌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어딘가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아! 마법 함정을 원거리에서 사용하면 되겠군.”
안 그래도 쓸데없는 아이템들이 조금씩 인벤토리에 쌓여 있었는데, 그것들을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장, 무슨 말씀입니까?”
휴고가 내 혼잣말을 듣고 물어 왔다.
“새로운 스킬을 하나 얻었는데, 마법진을 원거리에다 설치할 수 있는 스킬이야. 어떻게 쓸까 고민하고 있었지.”
그 말에 휴고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헉! 그, 그럼 완전히 잘된 거 아닙니까? 대장은 그 반지 때문에 영웅도 산 채로 폭발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원거리에 소환해서 바로 터트려 버리면…….”
“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휴고가 짚어 줬다.
마법 함정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영웅 소환도 마법진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나?
게다가 나는 정령 술사를 잡고 얻은 반지로 인해 ‘환수 폭발’을 사용할 수 있다.
‘휴고 말대로 사용하면 되겠군. 정말 좋은 걸 얻었어.’
나는 기발한 생각을 알려 준 휴고에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환수 폭발을 얻었을 때 확인한 바로는 영웅을 10번도 넘게 소환할 코인이 모여 있었다.
게다가 관리자의 수작으로 인해, 앞으로 소환되는 영웅은 모두 4단계 진화를 마친 SS급의 영웅이었다.
당연히 폭발시켰을 때 파괴력도 더 강할 터.
‘좋은 무기를 손에 넣었어. 이제 코인도 조금 신경 써야겠군.’
나는 다시 한번 상태창의 영웅 소환 항목을 살펴보았다.
- 랜덤 영웅 소환 (12995060/1000000)
┗ 영웅 진화 (12995060/1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 영웅 궁극 진화 (12995060/10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코인이 모여 있었다.
‘황제가 백만 코인도 넘게 주었군. 좋아.’
당장 모인 코인으로만 열두 번이나 영웅을 소환해 터트릴 수 있었다.
파괴력은 잘 축적시킨 원혼의 거울보다는 못할지 모르겠지만, 멸세폭에 비해 강할 것은 확실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사용해 봐야겠어.’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엔트 무리가 다가왔다.
그중 ‘어른’이 대표로 나서서 내게 말을 걸었다.
“구원자여, 이제 싸움은 모두 끝난 것인가?”
“일단 이곳에서 더 이상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엔트와 대화를 시작하자, 잠시 아이템에 팔려 있던 정신이 돌아왔다.
관리자의 목소리도 떠올라 조급한 마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어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거야말로 천만다행이구나. 근원의 샘을 지켜 주어 정말 고맙다, 구원자여.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 말과 함께 ‘어른’이 고개를 숙였고, 나머지 엔트도 이내 고개를 따라 숙였다.
머리에 달린 나뭇잎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진심을 전달해 주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통로를 열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충분히 보답이 됩니다.”
그제야 엔트들이 고개를 들었다.
“통로를 열어 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미안하구나. 그래, 통로는 언제 열어 주면 되겠느냐?”
‘어른’이 못내 미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나는 관리자의 악의가 떠올라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다.
때문에 나는 곧장 대답했다.
“지금 바로 통로를 열어 주십시오.”
“알겠다. 따라들 오거라. 내 곧 정령계의 문을 열어 주마.”
우리는 ‘어른’의 뒤를 따라 근원의 샘으로 걸어갔다.
그때 옆을 따르던 휴고가 나직이 물어 왔다.
“아까부터 정령계라는 말을 하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대장? 상위 관리 차원으로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한데, 애초에 상위 관리 차원은 인간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휴고를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시도하는 방법도 사실 꼼수라고 봐야 해. 정확히 말하면, 창조주가 재미 삼아 만들어 놓은…… 음, 그걸 이스터에그라고 하던가? 그래, 이스터에그야.”
“예에? 이스터에그요? 그런 걸 도대체 왜 만들었답니까?”
“글쎄다. 심심했나 보지.”
내 대답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휴고를 보며, 나는 창조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세계의 정수를 완성하고 다시 만났을 때, 창조주는 쓸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었다.
“재밌잖아요? 몇천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이곳을 찾아내서, 이곳에 마련된 시련들을 모조리 뚫고 신계로 들어온다면……. 그래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해 준다면? 그런 기대감 정도는 나도 갖고 싶었어요.”
어쩌면 관리자를 만들고, 통제를 허술하게 한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배신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창조주는 관리자에 대해 그다지 과격한 표현을 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 다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그럼 통로가 이스터에그라 치고요. 도대체 정령계라는 말은 왜 나오는 겁니까, 대장?”
그러고 보니 정령계에 대해서는 아직 설명을 해 주지 않았었군.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 때, 정령계를 따로 만들었거든. 만들고 보니 생김새가 통로로 사용하기에 썩 마음에 든 모양이더라고. 이따 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만들다 보니 그럴싸해서 통로로 삼았다는 말씀입니까? 뭔 창조주가 그렇게 대충대충이랍니까?”
휴고가 어이없어하며 되물어 왔다.
“난들 아냐? 애초에 창조주가 완벽했으면, 우리가 지금처럼 고생할 필요도 없었겠지.”
나는 사실 창조주가 이런 뒷문을 만든 것이 외로워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휴고에게 까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그때 ‘어른’의 가지가 근원의 돌로 향했다.
곧이어 가지에서 기운이 전해지자, 근원의 돌에서 황금색 빛줄기가 하늘을 향해 똑바로 쏘아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 무언가 거대한 것이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헉-!”
휴고가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틈이 없었다. 내 시선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고층 빌딩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웬 빌딩이…….”
옆에서 중얼거리는 휴고의 말대로, 나타난 것은 빌딩이었다.
빌딩은 빛으로 만들어졌는지 반투명한 데다가 번쩍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빌딩의 1층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문이랍시고 달려 있었다.
“저건 엘리베이터 아닙니까?”
“내 눈에도 그래 보여. 아마 저 건물을 다 올라가야 관리 차원이 나온다는 의미로 저렇게 만든 모양인데…….”
솔직히 악취미로 느껴졌다.
그러나저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저곳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엔트에게 짧은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저절로 열리며 우리를 맞았다.
* * *
잠시 후, 이동을 마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렸다.
가장 처음으로 느껴진 것은 후끈한 열기였다.
“음, 여긴 불의 정령계겠군요, 대장.”
“그래. 순서는 매번 무작위로 바뀐다고 들었다. 뜨거운 것을 보니, 불의 정령계가 처음으로 걸린 것 같구나.”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생각보다 뜨겁지는 않네요. 화염의 지옥보다는 비교적 살 만한 것 같습니다.”
휴고의 말대로 열기는 크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엘리베이터 밖은 그냥 들판이었다.
멀찌감치 작은 언덕들이 보이긴 했지만,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열기만 조금 느껴질 뿐, 용암이 흐르거나 사방이 불타거나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정령계라 그런지 하늘에 태양도 없어 방향도 가늠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루스가 말했다.
“주인, 저쪽이야.”
“……?”
내가 물끄러미 쳐다보자, 루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쪽에서 냄새가 나, 정령 냄새! 그리고 저쪽에 제일 뜨거운 기운이 많아.”
과연 신경을 쓰고 감지해 보니 루스가 가리킨 쪽에서 미약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졌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저쪽으로 가 보자.”
나는 살짝 웃으며 루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주위에 정령이 나타났다.
도마뱀이나 늑대 같은 동물의 형상을 한 것들은 물론, 골렘 같은 모습을 한 것들도 있었다.
“이거 불의 정령 맞죠, 대장?”
“음…… 그래, 모두 하급 불의 정령이야. 많이도 나타났네.”
아예 불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것은 없어 조금 의아했지만, 몸속에 불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을 보니 불의 정령이 분명했다.
그때 우리를 인식한 불의 정령들이 일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왜, 왜 저럴까요?”
적대적인 의사는 없어 보였지만, 잔뜩 몰려오자 위압감이 느껴졌다.
정령들은 이내 한 곳으로 모두 모였는데, 그 탓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온갖 형상의 정령들이 나를 둘러싸고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었다.
난감해하고 있는 와중에 늑대를 닮은 불의 정령이 내 앞으로 머리를 쑥 내밀어 왔다.
‘이건 뭐……. 지가 개야, 뭐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정령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늑대의 입꼬리가 씩 당겨 올라가며 꼬리가 맹렬히 흔들렸다.
“이거 참…….”
내가 어이없어하며 헛숨을 내뱉는데, 다른 정령들도 모두 머리를 내밀거나 몸을 비벼 왔다.
“대장, 혹시 정령한테 무슨 이상한 마법이라도 쓰신 겁니까? 유혹이라거나?”
“무슨 헛소리를……. 아, 혹시 이거 때문인가?”
휴고에게 면박을 주려다 갑자기 떠오르는 바가 있어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정령술사에게 얻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령의 숨결(S. 반지)]
- 높은 격을 지녔던 정령의 기운이 담긴 반지. 착용하면 정령 친화도를 상승시킨다. 착용자가 원할 경우, 특정 정령에게 기운을 더한다.
“이거 때문이었군.”
이걸 얻었을 때부터 정령계에서 도움이 되리라 생각을 했었는데, 그동안 번잡한 일들이 많아 깜빡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