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6화>
황제로부터 시작된 후끈한 열기는 곧 산봉우리 위로 퍼져 나갔다.
그 탓에 가까이 있던 나와 휴고는 피부가 상할 지경이었다.
그때 황제가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섰다.
화염이 한층 더 강해졌고,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크르르르……!”
여전히 짐승 같은 소리를 낸 황제는 곧바로 양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황제의 손이 가리킨 것은 근원의 돌이었다.
‘이런 젠장-! 막아야 해!’
하지만 내가 미처 움직일 틈도 없이 놈의 손에서 불길이 발사되었다.
나는 몸으로라도 불길을 막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그때, 샘 쪽에서 한 줄기 기운이 황제의 불길에 맞서 쏘아졌다.
그 불길의 끝에는 양손을 내밀고 서 있는 루스가 있었다.
위기를 보고 몸을 일으킨 것 같았는데, 서 있는 모양새가 위태로웠다.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콰르롸와아아……!
내가 걱정하는 사이, 두 줄기 화염이 중간에서 부딪쳤다.
온 산봉우리 위로 후끈한 열기가 퍼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다잡았다.
‘이대로는 힘들다.’
루스는 이미 힘을 많이 사용한 상태였고, 게다가 황제는 그 힘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놈에게 무언가 타격을 입혀야 한다.
하지만 놈의 불길이 너무 강력해 공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혼의 거울을 써야 하나?’
원혼의 거울은 내가 가진 가장 강한 공격 기술이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며, 발동 시 회피가 굉장히 힘들다.
그래서 이제껏 황제의 가슴에 있는 급소를 노리기 위해 거울을 아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어 결국 루스가 버틸 수 없게 되면…….
‘그다음에는 근원의 돌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겠지.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내가 결심을 하고 막 왼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였다.
바닥에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이더니 커다란 물방울이 되어 황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치이익-
수증기가 자욱이 피어올랐고, 동시에 황제의 불길이 멎었다.
털썩.
그와 동시에 루스가 옆으로 쓰러졌다. 완전히 방전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그쪽으로 달려가려는데, 엔트가 나서 재빨리 루스를 뒤쪽으로 옮겼다.
그 모습에 안심하며 나는 고개를 황제에게로 다시 돌렸다.
“크아아앙-!”
공격이 막히자 황제가 분노에 찬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놈의 몸에서 냉기가 치솟았고, 놈의 근처에 날카로운 얼음 칼날이 생성되었다.
얼음 칼날은 근처로 다가오는 것은 모두 찢어발겨 버릴 듯이 황제의 몸 주위에서 휘돌았다.
쿵쿵쿵-
황제는 근원의 샘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놈에게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 피부에 동상이 생겼다가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접근전은 불가능해. 가까이 간다고 해도…… 딱 한 번이다.’
한 번의 공격이 끝나면, 놈의 냉기에 몸이 얼어붙어 버릴 것이다.
화상은 어떻게든 회복하면 되지만, 얼어붙어 버리면 행동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진다.
나는 이를 아득 깨물며 머리를 굴렸다.
놈의 기계 팔을 어떻게든 치워 내고 놈의 가슴에 공격을 가해야 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쿵쿵쿵.
궁리하는 중에도 황제의 걸음이 이어졌다.
그나마 놈도 힘이 좀 빠진 것인지, 미친 듯이 달려들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그때 휴고가 옆으로 다가왔다.
휴고의 표정이 전에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대장, 놈이 샘 중앙에 있는 돌을 노리고 있지요?”
“그래.”
“돌이 부서지면, 대장이 자격을 얻을 길이 막히는 것이고요?”
“그래.”
나는 황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휴고가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장, 저놈을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는 차차 다가오고 있었다. 놈의 접근에 피부가 계속 상했다가 재생되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샘물도 수면에 살얼음이 끼었다.
휴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대장, 이때까지 고마웠습니다.”
“무슨?”
나는 깜짝 놀라 휴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휴고는 등을 돌린 채 이미 황제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휴고의 뒷모습으로부터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폭파시키세요.”
순간 깨달았다.
휴고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환수 폭발]
: 지배한 환수를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폭발시키는 기술. 대상이 품은 기운이 강할수록 폭발의 위력이 증가한다.
휴고는 ‘환수 폭발’이 담긴 반지를 직접 살펴본 적이 있다. 즉, 지금 녀석은 스스로 폭탄이 되어 황제에게 달려들 생각인 것이다.
‘안 돼!’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생각이 없다.
결코 바라지도 않는다.
휴고나 루스가 죽어 버리면, 세상을 구할 이유의 큰 부분이 사라져 버린다.
나는 이미 황제 가까이 거의 다다라 있는 휴고를 향해 필사적으로 점멸을 사용했다.
덥썩-
그리고 간신히 휴고의 뒷덜미를 움켜쥘 수 있었다.
휴고가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잡아챈 손아귀에 힘을 가득 담아 휴고를 뒤쪽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녀석의 몸이 샘 쪽으로 날아가는 순간, 황제의 주먹이 나를 후려쳤다.
콰앙-!
다행히 검을 들어서 막을 수 있었다.
정신이 없어 절대불변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팔에서 치미는 고통을 참으며 즉시 스킬을 사용했다.
‘점멸.’
곧바로 후퇴한 후, 나는 몸을 추슬렀다.
몸에서 하얀 증기가 피어오르며 상처가 회복되어 갔다.
그때 던져진 휴고가 일어서 다가왔다.
“대장, 어째서……?”
“죽지 마라. 네가 죽으면 별로 세상을 구하고 싶지 않아질 것 같으니까.”
살린다.
절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녀석의 죽음은 한 번으로 족하다.
“고……맙습니다.”
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대답에 나는 안심했다. 휴고가 자폭할 생각을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워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구원자님, 혹시 계약한 대상을 폭발시킬 수 있으신 건가요?
워젤은 나와 휴고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최근에 얻은 스킬이라, 워젤 님과 계약할 때에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나는 계약 대상을 내 마음대로 폭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워젤이 화내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이어진 워젤의 말은 내 예상과 달랐다.
- 구원자님, 저를 폭발시키세요. 제가 놈에게 접근할게요.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휴고나 루스와 달리 워젤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아, 그 제안에 조금 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대로 수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하신 일만으로도 워젤 님은 충분히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목숨까지 받을 수는 없어요.
-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워젤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 내 본체는 정령계에 있어요. 이곳의 몸을 잃어도 내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아요. 물론 이곳에서 이전처럼 힘을 쓸 수는 없겠지만요.
‘아! 그렇지. 정령은 몸을 잃으면 정령계로 돌아가게 될 뿐이다!’
워낙 경황이 없어 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워젤이 아예 죽는 것이 아니라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 괜찮으시겠습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인간계의 몸을 잃는 것만으로도 정령에게는 충분히 큰 희생일 테니까.
- 괜찮아요. 당신을 도울 수 있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그럼 어서 시작해요.
내 복잡한 심사를 읽은 것인지, 워젤은 대화를 그대로 끝내더니 재빨리 바닥의 물속으로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곱씹으며, 나도 결정적인 순간을 준비했다.
쿵쿵쿵-
황제는 이 순간에도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황제의 발밑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사방을 둥글게 휘감으며 솟아오른 물줄기가 막처럼 황제를 완전히 둘러쌌다.
놈이 마치 큰 물방울처럼 보였다.
신기하게도 황제의 주위에 흐르는 냉기에도 물방울은 얼어붙지 않았다.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지금이에요, 구원자님!
거부감과 망설임이 밀려오는 바람에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억지로 그 마음을 되삼키며…….
‘환수 폭발.’
나는 스킬을 발동했다. 이내 황제를 둘러싼 물의 막이 폭발했다.
쿠와아아아아앙-!
물의 막과 황제 사이에 다시 보호막들이 겹겹이 생겨났으나…… 의미 없었다.
보호막은 찰나도 버티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워젤이 품은 기운은 보호막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쿠콰콰와아앙-!
황제의 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피부와 근육이 포를 뜨듯 조각조각 흩어졌다.
그리고 놈의 가슴을 지키던 기계 팔도 드디어 부서졌다.
황제는 뼈만 남은 팔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가가각-
강력한 폭발에 뼈도 깎여 나갔다.
그러나 황제는 계속 회복 스킬을 사용하며, 어떻게든 가슴만은 지키고 있었다.
이대로 폭발을 끝까지 버텨 낼 생각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폭발이 가라앉아 갔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숨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놈의 몸에서 근육이 조금씩 재생되고 있었다.
‘살아나게 둘까 보냐!’
워젤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다. 이대로 녀석이 다시 살아나게 놔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황제의 정면으로 점멸했다.
그러자 아직 남은 폭발의 여파가 내게도 몰려오며, 피부가 대번에 찢겨 나갔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은 채,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정확히 황제의 가슴 쪽으로 겨누었다.
그 뒤,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원혼의 거울.’
번쩍-!
왼 손바닥에서 쏘아진 검푸른 광선이 황제의 가슴을 향했다.
영웅과의 싸움에 이미 사용한 ‘천벌’은 걸어 주지 못했지만…….
‘괜찮다. 충분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놈은 광선을 버틸 수 없다.
폭발을 뚫고 나아간 광선이 황제의 손에 닿았다.
치이익-
뼈만 남은 놈의 손이 대번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드디어 검푸른 광선이 황제의 가슴에 닿았다.
광선은 황제의 가슴, 빛을 내뿜는 구슬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파삭-
작은 소리가 끝이었다.
황제의 몸에서 흐르던 기운이 일시에 멎었고, 계속 사용되고 있던 회복 스킬도 정지했다.
이윽고 황제의 몸도 우뚝 멈추었고, 남은 것은 나를 노려보는 눈빛뿐이었다.
그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황제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신격을 탐내느냐-!]
그것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시스템 메시지 같은, 무감정한 소리가 내 귓가로 파고들었다.
목소리는 특별한 고저조차 없었지만, 끝없는 악의가 느껴졌다.
‘이놈이…… 관리자다!’
순간적으로 확신했다.
지금 이 소리는 황제가 아니다.
하지만 대꾸할 필요는 없었다.
팟-
내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황제의 눈에서 빛이 꺼졌기 때문이다.
놈에게서 흐르던 관리자의 기운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섬뜩한 여운만 내 등줄기를 따라 흐를 뿐.
“후우…….”
나는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일단 지금의 사태는 마무리했지만, 관리자의 악의를 읽고 나자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무거운 마음을 털어 내려 고개를 내젓는데, 휴고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대장, 이제 끝났겠지요?”
“그래, 여기서 당장 뭐가 더 튀어나올 것 같지는 않아.”
관리자가 내게 악의를 전하고 갔으니 머지않아 또 다른 방해가 닥치겠지만, 지금은 아닐 것이다.
“다행이네요. 근데 좀 전에 이상한 느낌이 들던데…….”
멀리 떨어진 휴고에게도 충분히 느껴질 만큼 관리자의 기운은 강했다.
“황제가 죽는 순간, 관리자와 잠깐 연결된 것 같다. 놈이 내게 엄포를 놓고 사라졌어.”
“헉! 괘, 괜찮습니까, 대장?”
“안 괜찮을 건 뭐가 있겠냐?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인데.”
“그건 그렇네요. 언젠가 놈과 싸워야 할 테니.”
휴고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됐다. 미리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세계의 정수를 다룰 수 있게 되면, 신격을 잃은 관리자 따위는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겁먹지 마.”
“예, 대장만 믿습니다.”
그제야 휴고의 표정이 좀 풀렸다.
그때 루스가 진이 다 빠진 표정으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휴고가 그쪽으로 달려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루스, 좀 어때? 어디 아픈 데는 없어?”
“괜찮아. 비켜 봐, 이 돼지야.”
둘은 티격태격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근처에 다다르자 루스가 내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인, 나 배고파.”
그 말에 인벤토리를 뒤져 용암 골렘에게서 얻은 용암 파편을 몇 개 내어 주었다.
루스가 용암 파편을 사탕처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황제씩이나 잡아 놓고, 중요한 일을 빼먹을 뻔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