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3화>
검은 돌에 붉은 보석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방법이 아닌가?’
나는 붉은 보석을 검은 돌 아래 고인 물속에 담가 보았다. 물이 워낙 조금 남은 상태라 붉은 보석이 간신히 물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오오! 기운이 조금 차올랐다.”
‘어른’이 샘을 보며 외쳤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샘의 기운이 되살아나자 ‘어른’이 곧바로 반응했다.
엔트의 우두머리답게 샘의 기운에 남들보다 민감한 모양이었다.
‘역시 이거였어.’
‘어른’의 반응은 내 방법이 옳다는 것에 확신을 주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붉은 보석을 모조리 꺼내 샘에 부어 버렸다.
차르르르-
워낙에 많은 싸움을 해 왔기 때문인지, 보석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잘박하게 차 있던 물을 가득 채운 것은 물론, 검은 돌까지 뒤덮을 정도로 보석이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우우웅- 우우웅-
샘이 크게 진동했다. 그리고 붉은 보석이 조금씩 샘물로 녹아들었다.
“오오-! 샘이 되살아난다!”
“기운이 돌아오고 있구나!”
주위에 엔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온 사방에 나뭇잎 떨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차분히 샘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후.
‘됐다. 성스러운 기운이 충만하게 샘솟고 있어.’
검은색이던 돌도 어느새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말라 땅거죽이 드러나기 직전이었던 샘은 이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물 안에는 아직 보석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그것들은 여전히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를 보며 휴고가 짐짓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저거 다 녹으면, 넘치는 거 아닙니까?”
잠시 후, 휴고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샘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샘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샘물은 산봉우리 위를 한가득 적시며 흘러내렸다.
“내 살아생전에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고맙네, 구원자여.”
어느새 다가온 ‘어른’이 감격에 가득 찬 말투로 내게 말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사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도대체 통로는 어디 있는 거지?’
상위 관리 차원으로 가는 통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을 찾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통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어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제가 상위 관리 차원이란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통로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딘지 아십니까?”
“아, 정령계로 통하는 문을 열고자 하는 건가? 그거라면 어려울 것 없지. 근원의 돌이 푸른빛을 되찾았으니, 언제든 가능한 일이네.”
그 말과 함께 ‘어른’이 가지를 흔들었다. 마치 손만 대면 금세 가능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어른’이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가고 싶은 것인가? 문을 열 때 기운이 소모되니, 가고자 할 때 말하도록 하여라. 그러면 내 바로 열어 주마.”
그에 나는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랬었군. 저 근원의 돌로 컨트롤하는 거였어. 그러기 위해서는 샘물의 기운이 필요하고.’
과연 ‘어른’이 쉽게 내 부탁을 들어줄 만했다.
샘을 넘치도록 되살렸으니, 통로를 여는 일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가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았지.’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문은 잠시 후에 열어 주십시오.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말해 보아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마.”
‘어른’이 기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악신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관리자와의 싸움이 있을 것이고, 그때 수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엔트들도 도와줬으면 한다는 말을 보태었다.
“알겠네. 구원자의 말대로라면 그 악신이 힘을 되찾을 경우 세상이 멸망할 터. 우리 엔트라고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겠지.”
‘어른’은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그와 ‘계약’이 맺어졌다.
‘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환수 폭발 때문에 괜히 찝찝하군.’
사실 이제 계약을 맺었으니, 원하면 언제든 ‘어른’을 폭발시켜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어른’뿐 아니라 계약한 모든 대상이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폭발시킬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야.’
나는 마음을 다잡고 ‘어른’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 들리십니까? 계약을 맺으면 언제든 서로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 오, 신기하군. 이렇게 하는 건가?
오래 산 정령답게, ‘어른’은 어렵지 않게 마음으로 하는 의사소통에 성공했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은 끝마쳤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아군도 얻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엔트와도 계약을 맺었으니 나중에 제법 큰 힘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른에게 마지막 부탁을 전했다.
“이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어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지를 근원의 돌로 뻗었다.
아마 근원의 돌을 조작하면, 상위 관리 차원으로 통하는 정령계의 문이 열릴 것이다.
‘나름의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이제 진짜 다 되어 간다.’
나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인 마음으로 ‘어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루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주인! 뭐가 또 나와!”
‘또냐?’
이변을 미리 감지하고 경고해 주는 것이지만, 저 소리 후에 위기가 자꾸 반복되니 저 소리만 들으면 뒷골이 당기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냥 있을 수는 없어 루스가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이 빛나며 마법진이 가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인영이 막 모습을 드러내려는 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도움이 될 존재가 아님은 분명할 터.
나는 곧바로 점멸을 사용해 마법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빼 휘둘렀다.
그러자 막 이동을 마친 인영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방패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불의 검을 막아 내었다.
‘뭐야?’
너무 단단한 상대의 방어에 깜짝 놀라고 있을 때,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도의 황궁에서 내 손에 목이 부러졌던 황제의 얼굴과 꼭 같았다.
‘설마! 관리자?’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황제의 몸에 관리자가 강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세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딱히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아. 게다가 힘을 회복했다면 이 정도일 리가 없다. 그리고…….’
힘을 다 회복하지 못했다면, 관리자가 직접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쳐 갔지만, 흘러간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내 공격을 방패로 막은 황제는 눈빛을 번쩍하고 빛내더니 내게 오른손에 들린 검을 뻗었다.
‘저건 듀랜달이잖아!’
오를란도의 애검인 듀랜달이 황제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강력한 화염이 솟아나 내게 뻗어 왔다.
다른 공격이라면 절대불변으로 막고 다시 반격을 가할 수 있지만, 화염은 그러기 힘들었다. 공격의 지속 시간이 길어 절대불변으로 막아 내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스팟-
나는 점멸을 사용하여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황제가 느긋하게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찮은 버러지 같은 네놈에게 과분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잘 들어라, 정해수. 위대하신 관리자님께서 네놈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시다.”
‘뭐? 관리자가?’
내가 놀라는 가운데 황제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순순히 세계의 정수를 내어놓는다면, 네놈과 네놈 일행을 원래의 세계로 보내 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소원이 있다면 그 또한 최대한 들어준다고 하셨다. 흥-!”
황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지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저항하지 말고, 나를 따라 황궁으로 가자. 가서 정수를 그분께 바쳐라.”
이제 와서 회유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아마 내가 이곳에 나타나자, 관리자가 드디어 내가 하려는 일을 완전히 눈치챈 모양이었다.
‘내가 신격을 얻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나 보군. 이곳에 상위 관리 차원으로 가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은 관리자도 알고 있을 테니…….’
아직 힘을 다 회복하지 못한 관리자가 내 행동에 마음이 급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관리자가 무슨 생각을 하든, 황제가 뭐라 떠들든 상관없었다.
내 생각은 확고하다.
나는 옆으로 다가온 휴고와 루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놈이 조금 전에 절대불변을 사용한 것 같다. 쏘아 낸 화염도 화왕 힐다스의 것과 흡사해.”
“음, 그럼 놈이 다른 영웅의 기술을 사용한다는 말씀입니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대장.”
휴고가 심각한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대답해 왔다.
만약 황제가 모든 소환 영웅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상황이 절대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하찮은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짐이 위대하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데 딴청을 피우는구나. 역시 네놈들은 그분의 은혜를 입을 자격이 없다.”
그때 혼자 나를 회유하기 위한 말을 늘어놓던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눈빛을 빛내며 오른손에 쥔 듀랜달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놈의 양옆에 마법진이 생겨났고, 금세 무언가 튀어나왔다.
크르르르-
괴성을 내지르며 나타난 것은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 저걸 왜? 그나저나 이번엔 몬스터 소환인가?’
드레이크 정도는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의문을 품는데, 마법진이 연이어 빛났다.
그러더니 드레이크를 비롯해 각종 몬스터를 무더기로 소환해 내었다.
“양으로 밀어붙일 모양입니다, 대장.”
휴고는 말하면서 엔트 쪽을 흘끔 쳐다봤다.
엔트가 몬스터에게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엔트는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괜찮다. 엔트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내 말마따나 엔트는 상당히 강한 무력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여차하면 좀 도와주면 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역시 몬스터들이 우리와 엔트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엔트들은 스크럼을 짜듯 샘 앞을 둘러서 전투를 준비했다.
쿠구구궁-
그때, 황제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엔트 쪽에 한눈을 판 사이 황제가 무언가 한 것 같았다.
얼른 돌아보니 이번에는 황제의 발밑에 성벽이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 대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건 나도 익히 아는 스킬이었다.
‘젠장, 저건 데모릭스의 스킬이군. 진짜 영웅들의 스킬을 전부 쓸 수 있는 건가?’
까다로운 전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걱정만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미 눈앞에 몬스터 떼가 닥쳐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몬스터의 수를 줄이자.’
그래야 엔트가 무사할 수 있다.
그리고 엔트보다 더 중요한 근원의 샘이 무사할 수 있다.
‘저게 있어야 통로를 열 수 있을 테니. 샘은 꼭 지켜야 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불의 검에 마력을 잔뜩 불어넣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불의 검을 채찍처럼 횡으로 휘둘렀다.
콰아앙-!
달려들던 몬스터 때가 채찍에 휩쓸려 날아갔다.
휴고와 루스도 날뛰며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중이었다.
황제는 아직 이쪽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고, 여전히 듀랜달을 하늘로 뻗고 있었다.
‘쯧, 또 뭘 하는군.’
놈이 눈빛을 빛내더니, 놈에게서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 보니 성벽 위에 불로 만들어진 뱀 두 마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건…… 아나투스의 공격 마법진이군. 아예 요새를 만들 셈인가?’
나는 다시 눈을 돌려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그런데 잠시 후 성벽에서 폭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포탄이 날아왔다.
콰앙-
재빨리 검을 휘둘러 포탄을 베어 버리자, 포탄이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터져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성벽 위에서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것은 불의 뱀의 입에서 쏘아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