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1화>
나는 엔트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예, 제가 그 구원자가 맞습니다.”
이제 구원자란 호칭에도 익숙해져 뻔뻔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 엔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이며 그렁그렁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나무가 짓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동정심을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도와다오, 구원자여. 우리 엔트에게 큰일이 생겼다.”
이것이 모두 창조주의 안배에 의한 일이라면, 거절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이곳에 이상한 탑이 생겨났다. 주변의 생명력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바람에 우리 엔트들이 나서서 막으려 했지. 그러나 큰 희생만 치르고 계속 밀리는 중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주변의 상황을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살려 놔야 길 안내든 뭐든 부탁할 수 있겠지. 탑 하나 막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다만 달리 신경 쓰이는 바가 있어 잠시 고민이 됐지만, 결국 우선은 엔트들을 살리고 보기로 결정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내 말에 엔트가 환한 표정을 짓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아마 가장 높은 봉우리로 갔을 거네. 그곳이야말로 우리 엔트들의 근원이 있는 곳이거든. 거길 지키지 않으면 우리 종족은 더 이상 태어날 수 없다네.”
그리고 엔트는 가지를 흔들어 가자는 시늉을 하더니 앞장서 나아갔다.
‘결국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저절로 가게 되는군.’
창조주가 배치해 놓은 안배의 신묘함에 감탄하며 나는 엔트의 뒤를 따랐다.
엔트는 깊은 산속을 계속 달리다가 어느 봉우리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멀리서 탑의 기운이 느껴졌다.
산봉우리에 거의 다다랐을 때, 엔트가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벌써 저기까지 이르다니, 큰일이다! 구원자여, 부디 우리를 구해 다오.”
산꼭대기 근처에 탑이 세워져 있었다.
한쪽에서는 엔트 무리가 황가수호대와 싸우고 있었다.
주변에 황가수호대의 시체가 드문드문 있었지만, 말라 버린 엔트의 사체가 훨씬 더 많았다.
엔트가 밀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엔트들은 지금도 탑에 의해 지속해서 기운을 빼앗기고 있었다.
“휴고, 루스. 저놈들을 맡아.”
나는 일행에게 외치고 곧바로 탑을 향해 내달렸다.
콰콰콰콰쾅-!
콰르르르
주위가 곧 폭음으로 가득 찼다.
* * *
얼마 후, 탑이 부서지며 전투가 끝났다.
더 이상 황가수호대와 탑은 우리 일행에게 적수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탑이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엔트가 근처로 다가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 역시 구원자! 고맙구나, 고마워.”
뜻밖의 상황에 멍해 있던 엔트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모여 있던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엔트가 내게 다가왔다.
“고맙구나, 인간이여. 그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아닙니다. 저 탑은 악신의 힘을 키우는 지독한 물건입니다. 발견 즉시 부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 지독하더군. 아주 지독해.”
키 큰 엔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우리를 안내해 준 엔트가 옆으로 다가왔다.
“어른, 오래된 샘은 어찌 되었소?”
문맥상 ‘어른’이란 말이 엔트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 같았다.
질문을 받은 ‘어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좋지 않다. 일단 위로 올라가 봐야 하겠지만, 너무 좋지 않아.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그게 무슨 말이오? 혹시 근원의 샘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가서 직접 확인해 보거라.”
우리를 안내해 온 엔트는 그 말에 어디론가 발길을 옮겼다.
나도 슬쩍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엔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산꼭대기 한가운데였다.
그곳에는 검은색의 바위가 놓여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근원의 돌이 검게 변하다니……. 샘이, 샘이 말라 버린 것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탑으로 인해 무언가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일까요, 대장?”
휴고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이는데, 엔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안 돼! 구원자가 나타나면 근원의 샘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째서 돌이 검게 변했단 말인가!”
돌의 색이 검게 변하면, 근원의 샘이라는 것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때 근처에 다가와 있던 ‘어른’이 그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구원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그루트?”
우리를 안내해 온 엔트의 이름은 그루트인 듯, 그가 어른이 말에 대답했다.
“저기 저 인간이 구원자요. 몸에 성스러운 기운이 흐르고 있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소. 어째서…….”
“저 인간이 구원자라고? 그게 정말이냐?”
‘어른’은 그루트에게 되묻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이보게, 인간. 자네가 구원자인가?”
“예, 제가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서 근원의 돌을 다시 푸르게 만들어 다오. 아니, 샘으로 가자. 가서 샘을 가득 채워 다오!”
어찌나 급한지, 말을 마치고는 막 내 손을 잡아끌려는 듯 가지를 뻗어 왔다.
그러나 그때였다.
“주인-!”
루스가 소리치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시 탑과 황가수호대가 나타나 있었다.
“왠지 이럴 것 같더라니, 쯧.”
최근 관리자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상황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엔트들이 이 장소를 신성시하는 것 같아 탑을 부수지 않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결국 탑을 파괴했고, 예상대로 또다시 탑이 나타났다.
‘또 부수면, 다음번에는 영웅이 나타나려나?’
어쨌든 엔트들의 태도를 보아, 여길 버리고 떠나라는 제안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듣자 하니 가장 높은 산봉우리도 이곳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나도 쉽사리 이곳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럼 지킬 수밖에. 휴고, 루스. 한동안 계속 싸워야 할 것 같다. 잘 생각하고 움직여!”
“예, 대장.”
“응, 걱정 마.”
휴고와 루스도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우리는 다시 탑과 황가수호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휴고와 루스가 황가수호대를 막을 동안, 내가 점멸로 이동해 탑을 부수는 전략을 사용했다.
콰르르르-
콰콰콰쾅-!
한동안 산봉우리가 거세게 들썩인 후, 결국 다시 탑이 파괴되었다.
“후우-.”
일단 싸움이 끝났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혹시나 주위에 마법진이 생겨나지 않나 열심히 살폈다.
상황을 잘 아는 휴고와 루스도 주위를 열심히 관찰했다.
그때 ‘어른’이 내게 다가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탑이 왜 자꾸 나타나는 것인가, 구원자여?”
‘어른’은 부서졌던 탑이 다시 나타난 것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이 탑은 악신이 생명을 흡수하기 위해 보내는 것입니다. 한번 부서지면 그 자리에 또 생겨나지요. 계속 탑을 부수면 더 강한 적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더 강한 놈들이 나타난다고?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나.
도망치든 싸우든 둘 중 하나를 택해야지.
그러나 나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어딘지 아십니까?”
“음……. 오늘은 여기가 가장 높은 산봉우리네. 구원자가 가장 높은 산봉우리를 찾을 거라더니, 정말이었군.”
‘어른’의 말에 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오늘 가장 높다는 말은 무슨 소립니까?”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매일 바뀐다네. 저 검은 돌은 매일 다른 산봉우리의 꼭대기로 자리를 옮겨 가지. 그곳이 가장 높은 산봉우리라고 불린다네. 그리고 그곳 위쪽에 근원의 샘이 존재한다네.”
그 말을 들은 나는 더욱 의문이 들었다. ‘어른’의 말에서 계속 등장하는 어떤 말 때문이었다.
“근원의 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곳 모든 산의 기운이 모인 성스러운 샘물이네. 우리 엔트가 태어나는 장소이기도 하지. 샘이 마르면…… 우린 다시는 태어날 수가 없다네.”
“…….”
“그러니 제발 샘을 되살려 주게. 전설이 그리한다 했으니, 분명 자네가 할 수 있을 거야.”
‘어른’이 내게 호소했다.
머리 위의 나뭇잎이 부스스 떨리는 것이, 굉장히 간절해 보였다.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뭘 어찌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아직 샘물을 보지도 못했고, 심지어 지금 이곳은 안전이 확보된 상황도 아니다.
“일단은 좀 기다려 주십시오. 아마 곧 있으면 다시 싸움이 시작될 겁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을 데리고 조금 물러나 계십시오.”
말을 막 마쳤을 때, 산봉우리 조금 아래에서 밝은 빛이 솟구쳐 올랐다.
‘마법진이다.’
나는 재빨리 그곳을 향해 이동했다.
바람의 걸음과 점멸을 연이어 사용하여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마법진에서 흐릿하게 몇몇 영웅의 실루엣이 보였다.
‘시간이 없다.’
영웅들이 이동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 기습해야 한다. 그래야 싸움을 쉽게 끝낼 수 있다.
‘천벌.’
나는 스킬을 아낄 때가 아니란 생각에 곧바로 천벌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불의 검을 재빨리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빈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거머쥐었다.
왼손바닥으로 마법진을 겨냥한 채, 나는 곧바로 원혼의 거울을 사용했다.
번쩍-!
두 개의 탑을 연이어 격파하며 사용한 멸세폭의 충격이 광선으로 치환되었다.
광선은 마법진에서 막 나타나던 인영들을 집어삼켰다.
“크아악!”
“끄억-.”
연이어 신음이 들려왔다.
몇 명인가 쓰러지는 소리도 났다.
잠시 후, 원혼의 거울이 힘을 다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곧바로 불의 검을 꺼내 마력을 불어 넣었다.
화르르-
화염의 칼날이 솟아올랐다.
나는 마법진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며 스킬을 사용했다.
‘멸세폭.’
마법진 위를 강한 충격이 다시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 하나의 인영이 뒤로 튕겨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바간!’
절대불변을 요령껏 사용하여 내 공격을 버텨 낸 모양이었다.
‘이번엔 오를란도는 없었나 보군.’
그런 생각을 하며 바간을 마무리하기 위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파지직-
하늘에서 떨어진 낙뢰가 내 몸을 직격했다.
“크윽…….”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몸이 덜컥 굳었다.
파지직-
다시 한번 낙뢰가 떨어지며 몸에 고통이 더해졌다.
자리를 피해야 하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점멸’
그나마 스킬은 사용이 가능하여, 다음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연달아 점멸을 사용하며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 시야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나를 공격한 놈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킨조른! 쯧. 점멸로 피한 건가?’
범인은 마도사 킨조른이었다.
저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니, 원혼의 거울을 점멸로 피한 것 같았다.
어쨌든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 이제 반격할 차례였다.
‘킨조른을 처리해야 바간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킨조른에게 다가가려 할 때, 놈의 뒤를 덮치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콰콰콰쾅-!
휴고의 망치가 킨조른을 향해 멸세폭을 발사했다.
하지만 망치에 당하기 직전에 킨조른이 점멸을 사용해, 자리를 이동했다.
그런 킨조른에게 루스가 재빨리 달려들고 있었다.
‘일단 킨조른은 녀석들에게 맡겨도 되겠군.’
둘이서 달려들면, 점멸을 가진 킨조른일지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킨조른은 나처럼 점멸을 연달아 사용할 수 없기도 하고.
안심한 나는 킨조른에게서 시선을 돌려 바간의 위치를 확인했다.
튕겨 나갔던 바간은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놈에게 곧바로 달려갔다.
바간도 피하지 않고 내게 마주 달려왔다.
콰르르
불의 검이 놈을 후려쳐 갔다.
그러자 놈이 방패를 들어서 막았다.
쾅-
절대불변이 사용되었는지, 놈의 방패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예상한 일.
나는 계획대로 불의 검에 마력을 폭발적으로 불어넣었다.
‘길어져라. 더, 좀 더! 휘어져라!’
그러자 검날이 쭉 길어지며 휘어지더니 방패를 타고 넘어갔다.
푸욱-
불의 검이 바간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놈의 미간이 고통에 찌푸려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스킬을 사용했다.
‘멸세폭.’
콰콰콰쾅-!
바간의 왼쪽 상반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어깨부터 떨어진 팔은 방패와 함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치명적인 부상.
하지만 바간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었다.
왼쪽 어깨가 통째로 날아가는 순간, 바간은 오른손에 든 해머를 내게 휘둘렀다.
해머는 정확히 내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왔다.
‘지독한 놈.’
바간의 전투 실력과 방식을 잘 알고 있지 못했다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놈을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이 타이밍에 놈의 반격이 들어올 것이란 것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때문에 내 왼손은 이미 들어 올려져 해머가 날아오는 경로를 지키고 있었다.
‘절대불변.’
콰앙-
해머가 내 왼손에 완벽하게 막혔다. 바간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그와 동시에 내 오른손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치이익-
살 타는 소리를 내며 화염의 칼날이 바간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