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20화>
아베나스탄에 이어 여기서까지 큰 싸움을 벌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남아 있는 사람도 없으니,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처리하고 튄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블라디에게 소리쳤다.
“아이들 데리고 당장 빠져. 탑은 우리가 맡는다.”
“알았소. 부탁하리다.”
블라디는 노련한 뱀파이어답게 상황 파악이 빨랐다.
두말없이 일어선 블라디는 미나와 함께 아이들을 숨겨 놓은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휴고와 루스에게 말했다.
“황가수호대만 잡는다. 일단 탑을 부수지는 마. 탑까지 부쉈다가는 저번처럼 영웅이 나타날 것 같아.”
이미 다 망해 버렸으니 막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휴고와 루스도 내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성 앞쪽으로 돌아 나가자 역시나 탑이 보였다. 아직 멀리 있어 그런지 특유의 불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저게 더 다가오게 둬서는 안 돼.’
뒤에 숨은 아이들이 도망치기 전까지는 탑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가수호대를 모두 처치해 버리는 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가자!”
외침과 함께 검을 뽑아 들고 달렸다. 그런 내 옆을 휴고와 루스가 따랐다.
* * *
예상대로 싸움은 어렵지 않게 흘러갔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끝났다.
황가수호대의 주검을 배경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탑을 바라보고 있는데, 휴고가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휴고는 덩그러니 남아 있는 탑을 가리키고 있었다.
“흐음…….”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탑은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지만, 기운을 관리자에게 전하고 있지는 못했다.
‘아마 주위에 빨아들일 기운이 없기 때문이겠지. 그냥 내버려 둬도 되려나?’
내가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자, 휴고가 제안했다.
“이대로 그냥 두고 가죠. 어차피 근처에 남은 것도 없지 않습니까?”
녀석의 생각도 나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이대로 두고 떠나자. 괜히 부수었다가 저번처럼 계속 나타나면 쓸데없이 시간만 지체될 테니.”
우리는 서둘러 왐피르의 동문을 향했다. 그러면서 나는 블라디에게 말을 걸었다.
- 아이들은 잘 피신시켰나?
- 지금 막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이오. 혹시 싸움이 끝났소?
- 방금 막 끝냈어. 이유가 있어서 탑은 부수지 않고 그대로 두었으니, 혹시라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
- 후우……. 알겠소. 무운을 비오.
블라디는 탑을 그냥 두었다는 내 말에도 가타부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씁쓸한 마음이 드는지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말이다.
블라디와의 대화를 끝마쳤을 때, 우리는 어느새 왐피르의 동문을 빠져나와 있었다.
“대장, 계속 동쪽으로 가는 겁니까?”
“일단은 동쪽으로 가야 해. 가다 보면 길을 안내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창조주는 내게 길을 안내해 줄 누군가를 동쪽 방면에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나는 블라디를 처음 봤을 때, 그가 창조주가 안배해 놓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를 애써 살린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결국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지만……. 어쨌든 안배를 해 놓았다니, 누군가 나타나긴 하겠지.’
한 줄기 희망을 품을 채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더 흘렀을 때, 우리는 마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험한 산지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 산이 엄청 많아. 꼭 손가락 같아.”
주변에는 산봉우리들이 여럿 보였는데, 신난 루스의 말대로 꼭 손가락처럼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반면 휴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대장,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가장 높은 산봉우리로 가야 해. 근데 그게 어딘지는 좀 찾아봐야겠구나.”
그때 루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근데 산이 너무 많은데? 저 중에 어떻게 찾아?”
“산봉우리 꼭대기를 구름이 가리고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대장.”
루스와 휴고가 연이어 부정적인 의견을 말해 왔다.
솔직히 녀석들의 말대로 나도 썩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저기, 저곳부터 올라가 보자.”
우선을 산봉우리에 올라간 후에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발길을 재촉하던 어느 순간, 우리는 다 같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산중턱의 주변이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휴고가 고개를 내젓더니 입을 열었다.
“대장, 이거 그거 맞지요?”
“그래, 탑에 흡수당한 흔적이다.”
사방에 모든 나무가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심지어 계곡에 흐르는 물에도 이끼 한 줌 없었다.
우리는 눈살을 찌푸린 채 발걸음을 좀 더 서둘렀다.
하지만 도저히 목적지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근처인 건 분명한데.’
동쪽, 그리고 가장 높은 봉우리.
창조주가 제시한 조건에 따르면 최소한 이 근방인 것은 분명했다.
폐허가 되어 버린 산길을 따라 한참을 더 걸었지만, 살아 있는 것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대한 단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산길을 헤매던 어느 순간, 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스, 왜 그래?”
“주인, 저거 좀 이상해.”
루스가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별다른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뿐인데.’
애초에 주위에는 온통 저런 것들 천지였다.
의아한 마음에 루스를 쳐다보는데,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저거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
루스가 이 정도로 말했으면, 진짜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모든 게 엉망인 곳에서도 살아 있는 나무라니. 범상치 않았다.
“가서 한번 확인해 보자.”
나는 일행을 이끌고 고목으로 다가갔다.
“대장, 이거 그거 아닙니까? 옛날에 던전에서 잡았던 거. 그 뭐더라……. 후오른?”
휴고의 말대로 고목의 가지와 뿌리가 팔다리 모양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몸통에도 꼭 눈과 입처럼 보이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예전에 던전 보스로 등장했던, 나무 정령이 타락해 변해버린 몬스터 후오른과 비슷했다.
“닮긴 똑 닮았는데…….”
탁탁.
혹시나 하고 고목을 두드려 보았지만,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루스, 살아 있는 거 맞아?”
“응, 확실해. 살아 있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인지, 루스는 확신하는 태도로 대답했다.
바스락.
그때, 고목의 가지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응?”
그 소리에 슬쩍 그쪽을 돌아보는데.
바스락.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왔다.
“헉! 대, 대장, 움직였습니다!”
휴고가 무언가 본 듯, 다급히 내게 소리쳤다.
저게 살아 움직이더라도 딱히 무서울 것이 없는데도, 녀석은 호들갑을 떨었다.
“다 죽어 가긴 하지만, 기운이 맑아. 후오른 아니야.”
그때 루스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후오른이 아니라고?”
“응, 확실해. 그때 그거랑은 확실히 달라. 차라리 드워프 동굴에서 만난 물 덩어리랑 비슷한 느낌이야.”
‘물 덩어리면 워젤을 말하는 건가? 그럼 저게 혹시…….’
워젤과 비슷한 느낌이면, 정령이라는 소리였다.
후오른과 비슷하게 생긴 정령이라면.
“설마 엔트인가?”
“예에? 엔트요?”
후오른이 몬스터로 등장했을 때, 이 세계 어딘가에 엔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뱀파이어도 만난 판에 엔트라고 나오지 말란 법은 없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휴고가 내게 제안해 왔다.
“대장, 루스가 살아 있다고 했으니, 물이라도 좀 줘 보죠. 나무니까 물을 주면 좀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나는 모처럼 ‘물’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마력이 빨려 나가며 공중에 물방울이 생겨났다.
‘저쪽으로!’
나는 의지를 불어넣어 고목나무의 뿌리가 있는 쪽으로 물방울을 이동시켰다.
츄르르릅-
그러자 뿌리에서 격렬한 소리와 함께 물이 흡수되었다.
“오, 잘 마시는데요? 헉! 머리털이!”
말라비틀어졌던 엔트의 머리 부위에서 나뭇잎이 자라나고 있었다. 휴고의 말대로 그 모습이 꼭 머리털이 자라나는 것처럼 보였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엔트의 입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좀……더.”
왠지 피식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참으며 ‘물’을 다시 시전했다.
이번엔 마력을 좀 더 불어넣어 넉넉한 크기로 물 덩어리를 만들었다.
츄르릅-
이번에도 엔트는 물을 다 빨아들였다.
말라붙었던 가지에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기둥에 있는 눈은 아직 뜨이지 않고 있었다.
“물 좀 더 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러자 입이라고 추측되는 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물…… 말고…… 양……분.”
‘어, 음……. 양분?’
좀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휴고가 엔트에게 바짝 다가가더니 물었다.
“양분이라면 뭘 말하는 겁니까? 거름 같은 건 없는데. 혹시 고기는 안 먹죠?”
그러자 엔트의 입에서 다시 대답이 들려왔다.
“고기…… 말고. 양……분. 좋은…… 기……운.”
“역시 고기는 안 먹나 보네.”
다 말라 죽어 가는 나무뿌리랑 만담을 주고받는 휴고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엔트가 요구하는 양분에 대해서 생각했다.
좋은 기운이라……. 뭘 줘야 살아나려나.’
세계의 정수의 기운을 나눠 주면 간단할 텐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정화 말고는 내 의지로 뭘 할 수가 없으니. 쯧’
일단 정수는 안 된다.
그럼 남은 것이…….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뿌리에 부어 보았다.
그러나 엔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포션도 안 되는 것 같고, 뭐가 좋을까?”
“주인, 그거 줘 버려. 내가 먹다 남은 거 있잖아.”
“뭐 말이냐?”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되묻자, 루스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붉은색 보석 있잖아.”
아, 그거라면 될지도 모르겠다.
붉은 보석은 관리자가 수족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분명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
게다가 황가수호대를 하도 죽였더니, 양도 엄청 많다.
나는 붉은 보석을 인벤토리에서 한 움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엔트의 뿌리에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엔트는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고요했다.
막 실망하려는 찰나, 엔트에게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입……에…….”
그러면서 나무 기둥에 나 있던 금이 쩍 벌어졌다.
아마도 저곳이 입인 모양이었다.
‘다 죽어 가던 것치고, 할 말은 다 하는군.’
황당했지만, 일단 살려 놓고 보자는 생각에 보석을 입에 집어넣어 주었다.
우르르릉…….
잠시 후, 마치 자동차 엔진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엔트에게서 들려왔다.
보석이 소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오, 나뭇잎이! 대장,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엔트의 가지에 생기가 돌더니, 몸통에서 가지가 뻗고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엔트가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선 엔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후오른과는 달리 선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나는 빤히 들여다봤다.
“고맙다, 성스러운 기운이 흐르는 인간이여. 그대 덕분에 살았구나.”
‘성스러운 기운? 설마 세계의 정수를 알아본 건가?’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어쨌든 만난 김에 물어볼 것이 있으니 잘 되었다.
“혹시 나무의 정령인 엔트 맞으십니까?”
“그렇다, 인간이여. 왜 묻는 것인가?”
“그럼 근처의 지형이나 산에 대해 잘 아시겠군요?”
“그렇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도록 하여라. 목숨의 은혜를 입은 처지에 면목 없는 말이지만, 내가 급한 일이 있으니 빨리 물었으면 좋겠구나.”
엔트는 죽다 살아난 주제에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근엄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지 안절부절못하고 있기도 했다.
“혹시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가 어딘지 아십니까?”
내 말이 끝나자 엔트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것은 왜 묻는 것이냐?”
조금 전까지 바쁘다던 말은 잊었는지, 엔트는 이유를 되물어 왔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세계의 정수를 다루기 위해 자격을 얻으러 간다고 말하면 알아들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럼 뭐라고 한다?’
내가 고민하고 있을 때, 엔트의 말이 이어졌다.
“인간이여, 혹시 당신이 구원자인가?”
그 말을 듣자, 지금껏 품었던 의문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창조주가 이곳에 가면 저절로 단서를 찾게 될 거라고 하더니, 엔트가 바로 안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