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9화>
어쨌든 루스가 냄새를 맡았으니 가 보기로 결정하고, 다 같이 조심스럽게 왕궁 뒤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죽어 있는 황가수호대의 숫자가 많아졌다.
그리고 황가수호대가 아닌 자들의 주검도 발견되었다.
‘탑을 파괴하고 나서 황가수호대에게 당한 건가?’
의문을 가지고 조금 더 나아갔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누군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휴고가 소리를 꽥 내질렀다.
“이런 미친-!”
그렇게 소리친 휴고는 망치를 뽑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휴고의 격한 반응이 의아했다.
그래서 우선 칼을 뽑아 들고 한 걸음 다가가며, 맞은편에 보이는 인영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는데.
‘뭐야? 물어뜯고 있었잖아?’
자세히 보니, 껴안고 있는 게 아니라 금발의 남자가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목을 물어뜯는 중이었다.
그때쯤 휴고가 남자의 뒤에 도착해 망치를 휘둘렀다.
깜짝 놀란 남자가 뒤돌아서며 손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휴고의 실력은 믿을 만하니, 나는 더 다가가지 않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쾅-
그런데 폭음이 울린 후 보이는 장면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의 손에 휴고의 망치가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도대체 뭐지?’
내가 미간을 찌푸린 것은 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배가 훤히 뚫려 장기가 다 드러나 있었고, 배에서는 지금도 선혈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런 상태에서 살아 있는 데다가, 휴고의 공격까지 막았다고?’
나도 모르게 한 발을 앞으로 내미는 사이, 다시 한번 휴고의 망치가 휘둘러졌다.
이번에도 남자는 손을 들어 휴고의 망치를 막아 갔다.
콰아앙……!
다시 폭음이 울렸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남자는 휴고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져 있었다.
공격이 한 번 막힌 탓에 휴고가 힘을 더 실은 것 같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휴고도 꽤 놀란 듯 보였다.
곧이어 자빠진 남자의 머리 위로 다시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아마 눈 깜빡할 시간만 지나면, 남자는 죽을 것이다.
설사 장기를 내놓고 살아 있을 수 있다고 해도, 망치에 온몸이 곤죽이 되면 죽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때 남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남자에게 목을 물어뜯기던 소녀였다.
‘저런!’
갑자기 끼어든 소녀 때문에 휴고의 눈이 치떠졌다.
망치를 애써 멈추려 하고 있지만, 이미 망치가 소녀의 머리통을 으깨 놓기 직전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점멸을 사용했다. 그리고 휴고의 망치 앞으로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절대불변.’
콰아앙-!
간발의 차이로 망치가 멈췄다.
왼손 주위로 거센 기운이 스쳐 지나가며 몸이 저릿했지만, 다행히 소녀가 다치는 상황은 막았다.
휴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치가 막히는 바람에 손이 저린지, 휴고가 손을 주무르며 소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소녀가 빽 하고 소리쳤다.
“이 나쁜 놈들!”
소녀의 말을 들은 휴고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러더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일은 네가 벌였잖아.’
속으로 어이없게 생각하고 있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 이 악당들. 나쁜 놈들…….”
소녀는 급기야 울먹이기 일보 직전이었다.
쓸데없이 곤란한 상황에 엮인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뒤돌아 떠나기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소녀 대신 금발의 남자를 보며 물었다.
“넌 뭐지? 몸이 그 모양인데도 살아 있다니, 정체가 궁금하군.”
가까이 오는 바람에 남자의 몰골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배에는 여전히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입가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휴고의 망치를 막은 손목도 부러져 덜렁거리는 중이었다.
내가 신기하게 쳐다보자 남자의 입이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미나, 물러나거라.”
“하지만…….”
“어서!”
작은 실랑이 끝에 소녀가 물러섰을 때야 남자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나는 블라디 왐피르, 이곳 왐피르 왕국의 왕이다.”
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왕이 누군지 정도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왕은 일흔이 넘은 노인이야.”
“나는 노인은 아니지만, 일흔이 넘긴 했지.”
“무슨 헛소리냐?”
남자는 아무리 많게 봐도 2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추궁에 잠시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마당에 숨겨 봐야 소용없겠지. 나는 삼백 살이 넘었다.”
“……?”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냥 정신병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뱀파이어다. 왐피르 왕국은 내가 세웠고,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다스려 왔지.”
“뱀파이어라고?”
“헉! 뱀파이어?”
내가 되물을 때, 옆에서 휴고의 놀란 목소리도 들려왔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채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다 하다 별것이 다 나오는군.”
어이없기는 했지만, 어차피 창조주가 만든 세상. 뱀파이어라고 없으란 법도 없었다.
‘좀 전에는 그럼, 피를 빨고 있었던 거였군.’
아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 안 그래도 안색이 창백하던 블라디의 얼굴이 더욱더 하얗게 질렸다.
그러더니.
털썩.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겨우 눈만 뜬 채 부들부들 몸을 떠는 것이, 그냥 두면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러자 미나라 불린 소녀가 얼른 남자를 부축해 앉히더니, 남자의 입가로 목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블라디는 피를 빨 힘조차 없는지 움직이지 못했다.
소녀는 안절부절못하고 한참을 당황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야. 폐하께서 우리를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하셨는데…… 흑흑.”
특히 휴고를 노려보는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저, 대장. 일단 살려 놓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녀의 눈빛을 견디지 못한 휴고가 기어코 내게 속삭였다.
“후우, 사고는 네가 치고, 수습은 나한테 맡기냐?”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휴고에게 웃으며 한마디 하니, 휴고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녀석의 어깨를 툭 쳐 준 후, 나는 블라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물잔과 함께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이걸 이런 데서 쓸 줄은 몰랐는데. 이거 참.’
그것은 쇠로 만든 빨대였다.
끝이 날카롭게 사선으로 잘려져 있는 것이 특색.
예전에 죽을 뻔한 루스에게 피를 마시게 하려다가, 초재생 때문에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손가락을 아예 잘라서 상황을 해결했었고, 심지어 손가락을 먹이기까지 했었지만.
어쨌든 그 일이 있고 난 뒤, 비슷한 상황을 대비하여 피를 쉽게 뽑기 위해 준비한 것이 이 빨대다.
나는 주저 없이 빨대를 들고 손목으로 꽂았다.
푹-
빨대가 내 손목을 뚫고 들어갔다.
“헉!”
소녀가 경악성을 토해 내는 순간, 나는 물 잔을 빨대 끝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물 잔에 내 피가 흘러 들어갔다.
잠시 후 잔이 가득 찬 것을 확인하고 빨대를 뽑아내자 손목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허억!”
기이할 정도로 뛰어난 내 회복력에 소녀가 다시 한번 헛숨을 토했다.
‘역시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군.’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스스로의 준비성에 왠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고, 나는 소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먹여라. 장담하는데, 먹이면 살아날 거야.”
아마 뱀파이어라면 일반적인 포션으로는 치료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번거롭더라도 피를 주기로 한 것이었다.
‘용혈(龍血)이 포함된 내 피라면, 뱀파이어의 회복에 도움이 되겠지.’
미나는 나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더니, 정신을 잃기 직전인 블라디에게 서둘러 피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블라디의 배에 난 상처가 눈에 띄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용혈이 보약이군.’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휴고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대장, 손목은 괜찮습니까?”
그 말에 나는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손목에서 피 한 방울조차 새어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며 휴고에게 짧게 대답했다.
“괜찮아.”
휴고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역시 대장이라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
그때, 때마침 블라디가 정신을 차렸다.
“이건…… 정말 대단한 피군. 내 생에 이런 피는 맛본 적이 없어.”
피 맛에 대한 감탄을 터트리는 블라디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감상은 되었고,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 봐.”
“음, 우선 인사가 먼저겠구려. 살려 주어서 고맙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블라디가 말을 이었다.
“저 빌어먹을 탑과 붉은 옷을 입은 놈이 나타난 것은 오늘 아침이오. 처음에는…….”
몸을 회복한 블라디는 기운이 나는지 힘차게 설명을 이어 갔다.
탑이 나타나고, 막아 보려다 실패하고, 결국에 블라디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투입한 일 등을, 그는 차분히 말했다.
“탑이 힘을 빨아들이는 것을 깨닫고, 부하들을 총동원해 어찌어찌 탑을 파괴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소. 그러자 붉은 옷을 입은 놈들이 광분해서 달려드는 것이 아니겠소?”
결국 황가수호대에 밀리고 밀리다가 수하를 모조리 잃고 직접 나선 끝에 양패구상했다는 것이 설명의 끝이었다.
“그럼 살아남은 것은 당신들 둘이 끝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미나가 대답해 왔다.
“아니에요. 폐하께서 아이들을 따로 모아 숨겨 두셨어요.”
‘아이들이라……. 뱀파이어라도 성품이 나쁘진 않은 건가?’
“미, 미안합니다.”
그때 휴고가 블라디에게 사과했다. 뱀파이어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미나는 그 말에 다시 휴고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아까의 일 때문에 화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괜히 분위기가 딴 데로 흐르기 전에 내가 끼어들었다.
“당신들은 이제 어쩔 셈이지?”
“으음, 일단 트란실로 갈 생각이오.”
트란실은 왐피르의 북쪽에 위치한 소국이었다.
상황은 이곳과 그리 다르지 않을 터였기에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거기라고 안전하지는 않아.”
“거기 왕이 내 동생이오.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힘을 모아 봐야지.”
“……?”
“동생도 당연히 뱀파이어요, 하하.”
그렇게 말하며 블라디가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어이가 없군.”
동쪽의 두 국가가 모조리 뱀파이어의 소굴이었다니.
어쨌든 이왕 이렇게 인연을 맺은 것, 그냥 보내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래서 악신을 막기 위해서 우리가 동분서주하고 있는 거야. 나한테 협조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낼 만한 곳을 소개해 주지.”
처음에는 이들을 엘프 영역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남쪽은 너무 멀다. 아이들도 여럿 있다니, 도저히 저들이 가는 길을 버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이곳의 위치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을 바꿨다.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라로프가 나오지.’
이곳은 제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라로프와 오히려 가까운 편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옛 친구에게 합류하게 할 생각이었다.
뱀파이어라면 훌륭한 전력도 될 것이고.
내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블라디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협조하리다. 근데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처지라,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겠소?”
“협조라고 해서 딱히 날 따라다니거나 할 필요는 없어.”
그 뒤로는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계약’을 맺고, 마음으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가르쳐 준 후, 나는 라로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블라디가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라로프는 나도 알고 있소.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름다운 섬이라더군.”
확실히 오래 묵은 뱀파이어라 그런지 아는 게 많았다.
“그럼 잘되었군. 그곳으로 가면 돼. 가는 길에 동생도 데리고 가든가.”
“알겠소. 그럼 바로 출발하면 되겠소?”
그렇게 하라고 막 대답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루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주인, 또 탑이야!”
아직 내 감각에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루스의 말이라면 틀릴 리 없다.
‘탑을 부순 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벌써 다시 나타나다니. 쯧.’
골치 아픈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이곳에서 탑을 부수면 머지않아 영웅들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