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5화>
놈은 예전 첫 번째 재앙 당시, 후작 파벌에 속해 있던 귀족 중 한 놈이었다.
내가 암흑 교단의 끄나풀이던 후작의 가면을 벗기고 처치하자, 놈이 오히려 내게 귀족을 살해했다며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암흑 교단이라기보다는 그냥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진짜 암흑 교단은 아니었나 보군.’
당시 기사들에게 쫓겨났었는데,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진짜 암흑 교단은 아니었던 듯했다.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 바라보고만 있자, 놈이 기고만장해 다시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다.
놈은 수배범이라느니 폭파범이라느니 진실도 아닌 것을 마구 떠들어 대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선을 내게 돌리고 있었다.
‘쯧, 안 좋은데.’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사람들을 설득해 피난을 보내야 할 상황이었다.
당연히 저런 소리가 나돌아서 내게 좋을 것이 없었다.
막 뭐라고 하려는 찰나, 옆에 있던 앨번이 한발 먼저 소리쳤다.
“에스호 자작님, 또 확인되지도 않은 일을 사실처럼 떠드는 겁니까? 저번에도 그랬다가 곤욕을 치렀을 텐데, 아직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습니까?”
마력까지 담아서 지른 앨번의 고함에 에스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이제 기억나는군. 놈의 이름이 에스호였지.’
앨번의 말에 기억을 떠올린 나와 달리, 에스호는 자존심이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그 탓인지 다시 입을 연 에스호의 목소리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네놈은 기사 나부랭이가 어디 자작의 행사에 끼어드느냐? 저놈이 수배범인 것은 여기 모인 귀족들이 모두 아는 일인데, 어째 확인되지 않은 일이라고 하느냐!”
저번 암흑 교단 건과는 달리 이번에는 에스호의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저놈 말대로 내가 수배범인 것은 맞지. 수배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지만.’
내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 했다.
막 나서려던 순간, 에스호가 한술 더 떴다.
“여봐라, 저놈을 당장 잡아라!”
에스호의 옆에는 놈이 데려온 사병들이 있었는데, 에스호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은 내가 탑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수많은 인명을 구했다는 것도, 그들의 힘으로 날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도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병사들은 주춤거리기만 할 뿐, 나를 잡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자 에스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앨번뿐 아니라 자신의 사병에게도 무시당하자 더는 참기 힘들어 보였다.
결국 에스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더니, 앞에 선 병사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네 이놈, 천한 놈이 감히 내 명령을 거부한단 말이냐! 당장 명을 따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당장이라도 찌를 듯한 기세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어쩔 수 없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군, 쯧.’
병사들을 제압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막상 그들에게 칼을 대기는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병사들의 잘못도 아닌데 다치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들을 상하게 하면 설득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어.’
잠시 어째야 하나 고민했다.
워낙에 황당한 일이다 보니, 재빨리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에스호만 재빨리 잡아다가 처리해 버릴까?
그러나 주위엔 시민들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백작과 상의하기 위해 모인 귀족들도 죄다 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듭된 고민이 에스호에 대한 살기로 슬슬 변하려는 찰나였다.
“대장!”
돌아보니 휴고가 피난민들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핏자국과 흙먼지로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은 채 장내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이목이 대번에 그쪽으로 쏠렸다.
잘 왔다는 인사로 휴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때 피난민들 쪽으로 이목이 쏠리는 것이 싫었는지, 에스호가 또다시 소리 질렀다.
“뭐 하는 것이냐? 빨리 저놈을 포박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병사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때 휴고가 데려온 피난민 무리 속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아빠다!”
그러자 다가서던 병사 한 명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휙 돌아갔다.
“아빠! 여기야, 여기!”
한 아이가 병사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버지, 여기예요!”
“아빠, 아빠-!”
곳곳에서 아빠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이은 소리에 내게 다가들던 병사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하, 안 그래도 아이와 여자밖에 없어 이상하다 했더니, 병사들 가족이었나? 근데 그럼 왜……?’
아이와 여자만 남겨 둔 이유가 뭘까?
길길이 날뛰는 에스호의 모습에 답이 떠올랐다.
‘저놈이 자기 몸 지키려고 병사들을 모조리 끌고 왔군. 그사이 영지에 탑이 나타났을 테고.’
그 바람에 병사들의 가족들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이가 없군. 그러고 보면 저놈 영지는 지금쯤 풍비박산이 났겠구만.’
“이, 이놈들! 당장 저 자식을 잡아들이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에스호의 난리는 이어졌다.
그러나 병사들은 더 이상 에스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아빠, 저분들이 우릴 구해 주셨어.”
“저 아저씨가 치료해 줬어요.”
아이들의 말을 들은 병사들은 내게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몇몇은 고개를 숙여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에스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양이었다.
이윽고 놈의 칼이 아이와 상봉 중인 한 병사의 등을 찌르려 했다.
그때 망설임 없이 에스호를 덮쳐 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퍽-!
번개같이 달려 나간 앨번이 에스호의 옆구리를 걷어차 날려 버린 것이다.
우당탕-
‘앨번 저 양반, 에스호에겐 가차 없군. 천적인가? 발길질이 아주 찰지군.’
왠지 속까지 시원해지는 발차기였다.
옆으로 처박힌 에스호는 한참을 꿈틀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이, 이 천한 기사 놈이……. 죽여 버리겠다.”
에스호가 부르르 떨며 광란을 벌이려는 찰나, 장내에 근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감히 내가 인정한 우리 가문의 기사에게 누가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느냐?”
스탄 백작이었다.
탑으로 인한 피해를 겨우 추스르고 있는데, 또다시 소란이 발생하자 결국 백작이 나선 것이다.
그리고 에스호가 병사의 등을 찌르려 하는 장면을 때마침 목격했다.
“에스호 자작, 암흑 교단 때의 일이 있었으면 자숙하고 있을 것이지, 어디서 또 분란을 일으키는가? 아베나스탄에서 함부로 날뛰는 것은 본 백작가를 모욕하려 함인가?”
추상같은 스탄 백작의 호통에 에스호는 기가 팍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쯧, 저런 놈인 것 같기는 했다만, 백작에게는 정말 한마디도 못 하는군.’
한심한 마음에 혀를 차는데, 휴고가 넌지시 다가왔다.
“하하, 피난민을 구한 것이 좋은 결과로 돌아왔군요.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하나 봅니다, 대장.”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시선을 스탄 백작에게로 향했다.
‘녀석 말대로 잘된 일이야. 이대로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탑이 얼마나 위험한지 근처에 모인 귀족들과 백성들이 모두 보았다.
그러니 잘만 하면 백작은 물론 다른 귀족들도 쉽게 설득이 가능할 것 같았다.
“주인, 주인! 또 나타났어.”
막 생각이 뻗어 나가려던 순간, 루스가 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뭐가?”
내가 돌아보자, 녀석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녀석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또 다른 탑이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뭐? 말도 안 되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탑을 하나 처리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조금 전에 또 하나의 탑을 부수었다.
‘근데 벌써 또 하나가 더 나타났다고? 어째서…….’
변화가 너무 심했다.
이제껏 한 번 나타났던 곳에 다시 나타난 경우는 아슬라의 마을 근처밖에 없었다.
그곳도 세계의 정수를 다 모으기 전과 후로 나뉘어 나타났으니, 제법 긴 시간 간격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베나스탄 근처에서만 벌써 세 개째였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관리자가 단순히 힘을 회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뭔지 모른다는 것이 문젠데. 일단은…….’
당장은 탑을 부수어야 했다. 이대로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장, 어서 부숴야 합니다.”
휴고가 걱정스레 재촉해 왔다.
“그래, 가자.”
나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탑을 향해 달렸다.
이쯤 되니 다른 사람들도 다시 나타난 탑의 존재를 눈치챘다.
“꺄악-! 탑이야!”
“또 나타났다. 도망쳐!”
“제기랄! 병사들은 대형을 갖춰라. 시민들이 성 안으로 대피할 때까지 자리를 피하지 마라!”
비명과 경악성이 난무하고, 병사를 지휘하는 기사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하고 탑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내가 바로 탑으로 가려는 것을 눈치챘는지, 휴고와 루스가 옆에서 황가수호대를 쓸어 버리며 엄호해 왔다.
“먼저 가마.”
녀석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나는 점멸을 사용했다.
스팟-
공간을 건너뛰어 최대한 빠르게 탑의 앞으로 다가간 나는 불의 검을 휘둘렀다.
불의 검은 앞을 가로막는 황가수호대를 단숨에 쓸어 버리고, 곧이어 탑을 향해 나아갔다.
콰르르
화염을 토해 내는 검날이 탑을 후려치는 순간, 나는 멸세폭을 사용했다.
콰콰콰콰쾅-!
굉음이 울리고, 탑에 쩍하고 금이 갔다.
황가수호대가 몸으로 가로막은 탓에 한 방에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나는 곧장 검을 회수해 다시 한번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굳이 멸세폭을 더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금이 간 곳이 쩍 갈라졌다.
쿠구궁-
결국 탑이 옆으로 쓰려지며 먼지구름이 자욱이 피어올랐다.
“후욱-.”
너무 서두른 탓인지 숨이 조금 가빠 왔다.
워낙 빠르게 탑만을 공략하다 보니, 아직 살아 있는 황가수호대가 많이 남아 있었다.
놈들은 내게 분노를 불태우며 달려들었다.
그런 황가수호대를 처치하는 휴고와 루스의 모습도 그 뒤로 보였다.
그런데 탑이 다시 나타났을 때 느꼈던 꺼림칙한 느낌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도대체 뭐지? 설마 탑이 부서지면 그 자리로 계속 보낼 생각인가? 관리자에게 그 정도로 힘을 쏟아부을 여력이 생긴 건가?’
콰르르- 콰쾅!
검을 휘둘러 남은 황가수호대를 처치하면서도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탑과 황가수호대로는 내게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 텐데……. 어째서지?’
의문은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져 갔다.
“주인-!”
그때 황가수호대를 처치하던 루스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주인, 저기 봐!”
녀석은 멀리 지평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바닥에서 환한 빛이 솟구치고 있었다.
‘설마!?’
나는 강하게 검을 휘둘러 엉겨 붙는 황가수호대를 떨쳐 버리고, 재빨리 빛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법진이잖아!’
그것도 이동 마법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이미 소환 영웅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이럴 속셈이었나?’
지금 탑을 손쉽게 부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러니 탑이 부서진 곳에 연달아 보냄으로써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려 한 것 같았다.
‘결국 나를 제자리에 묶어 놓고 영웅을 보낼 속셈이었군.’
미리 알아채지 못하는 바람에 영웅들의 이동이 이미 완료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저번처럼 기습도 불가능하다.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