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4화 (114/149)

 # 114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4화>

백작의 말을 들어 보니 반쯤은 설득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쐐기를 박아야 한다.

“당연히 악신에 맞서 세상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저 혼자서는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백작님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악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국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백작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백작은 제국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제국에서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백작뿐이기도 했고.

‘내가 제국인들을 직접 어떻게 하기에는 내 소문이 너무 안 좋으니 어쩔 수 없지, 쯧.’

억울한 마음에 속으로 혀를 차는데, 백작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뭔가?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백작의 질문에 나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생명을 흡수하는 탑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겠지요?”

“으음, 그렇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이던 참이었네.”

백작은 침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길에 본 피난민만 해도 수천 명은 가뿐히 넘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백작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백작에게 말을 이었다.

“그 탑은 악신이 만든 것입니다. 놈은 수도를 통째로 집어삼켰음에도 아직 힘을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 온 세상에 탑을 흩뿌리고 있지요.”

“그럴 수가…….”

“백작님, 더 늦기 전에 제국인들을 하나로 모아 살아남는 데 힘쓰십시오. 탑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악신을 막는 데 도움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나는 사람을 모은 후 남쪽 숲 깊숙이 피신할 것을 백작에게 권했다.

엘프와 이미 길 안내를 위해 계획을 짜 놓았고, 남쪽 도시 국가들도 피난을 위해 모여 있다는 사실도 백작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설명을 다 들은 백작은 오히려 살짝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되물었다.

“자네 말은 일단 몸을 피하란 말 아닌가? 그런다고 그 악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저는 악신에 대항할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

“백작님께서 사람들을 피난시킬 동안 제가 악신을 상대할 무기를 손에 넣을 겁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제게 힘을 보태 주시면 됩니다.”

힘을 보탤 방법에 대해서도 적당히 설명한 후 나는 이야기를 끝마쳤다.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 자네에게 믿음이 생기려 하는군. 흐음…….”

백작은 고민이 많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수배범이자 수도 사건의 용의자인 내 뜻을 따르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겠지.

백작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한 나는 가만히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윽고 백작의 입이 떨어졌다. 다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주변 영지 귀족들이 몇 명 모여 있다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자들도 몇 있고. 일단 그들을 모아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네.”

“…….”

아쉽지만 이 자리에서 확답을 받기는 무리인 듯했다.

실망 섞인 내 표정을 슬쩍 살핀 백작이 말을 덧붙였다.

“내 개인적으로는 자네 말을 믿네만…… 피난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내 영지민만 옮기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피난을 간다고 할지라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를 일이니 기약이 없어. 어쩌면 그냥 탑과 싸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백작이 아직 탑을 직접 보지 못해서 하는 소리였다.

“탑 주위에는 황가수호대 수십 명이 지키고 있습니다. 웬만한 병력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후우, 어쨌든 조금 기다려 보게. 일단 다른 자들과도 상의를 해 봐야겠으니.”

그렇게 말을 마치고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의논을 하러 가려는 모양새였다.

똑똑.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예전에 본 적이 있는 집사 대런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백작님, 큰일 났습니다!”

소리치며 들어온 대런은 나를 보더니 움찔하고 몸을 굳혔다.

그러나 노련한 백작가의 집사답게 어느새 평정을 찾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왔다.

짧은 눈인사 후 그는 곧바로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백작님, 큰일입니다.”

“대런,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인가?”

아닌 게 아니라, 대런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성 밖에 그 탑이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피난민들은? 병사는 파견했나?”

백작이 깜짝 놀라 질문을 쏟아 내었다.

나 역시 놀란 눈으로 대런을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탑을 하나 처리했는데, 벌써 이곳에 탑이 또 나타나다니.’

탑이 등장하는 빈도가 증가했다.

그렇다는 건 즉, 관리자가 그만큼 서두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아니면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니 탑에 기운을 더 투자하고 있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내게 좋은 일은 아니야. 서둘러야 해.’

내가 고민하는 중에 대런이 백작에게 보고를 이었다.

“탑 근처에 있던 민간인들이 탑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고, 그걸 막으려던 병사들은 탑을 지키는 붉은 옷을 입은 자들에게 당했습니다.”

“그럴 수가!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확실한가, 대런?”

“예, 경비대 한 명이 직접 말을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앨번 님이 기사들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하셨습니다. 다른 귀족님들의 사병들도 따라나선 것 같습니다.”

“허허, 황가수호대가 맞았다니…….”

백작은 황망한 표정으로 대런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에 나는 강한 어조로 백작을 향해 말했다.

“백작님, 일단 탑을 부수어야 합니다. 아마 기사들만으로는 힘들 테니, 저 또한 가서 싸우겠습니다. 그러니 백작님도 함께 가서 눈으로 직접 보고 결정하십시오.”

“아, 알겠네. 부디 도와주게. 부탁하네.”

내 실력을 아는 백작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내게 정중히 부탁해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백작과 대런을 대동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성문 근처에 도착해 성벽을 올랐을 때, 탑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적잖은 생명을 빨아들였는지, 탑은 수도 쪽으로 붉은 기운을 쏘아내고 있었다.

“으아악!”

“도, 도망쳐!”

성 밖에서는 연신 비명과 고성이 울려 퍼졌다.

하필 탑이 성문 근처에 생긴 바람에 성으로 들어오기 위해 한 곳에 몰려 있던 피난민들의 희생이 컸다.

“저, 저리 가!”

“으아악-!”

흩어져 도망치려는 피난민들을 황가수호대가 탑 쪽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때 기사 한 명이 황가수호대에게 맞서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는 다른 자들과는 달리, 기사는 끝까지 앞으로 나서며 피난민들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열의를 다한다고 해도 황가수호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를 쓰고 버티던 기사는 결국 황가수호대의 오러에 맞아 상처를 입고 비틀거렸다.

그런데 기사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저자는…… 앨번이군.’

그는 예전 수도에서 첫 번째 재앙이 있을 때 만났던 스탄 백작의 기사였다.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저대로 죽게 두긴 아깝군.’

“잠시 여기 있어 봐.”

나는 루스에게 말하고는 재빨리 불의 검을 뽑아 들고 성벽을 뛰어내렸다.

루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앨번을 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점멸.’

연이어 점멸을 써 다가가는 중에 앨번이 기어코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황가수호대가 쓰러진 앨번을 탑 쪽으로 휙 집어 던졌다.

스팟-

나는 날아가는 앨번을 향해 재빨리 점멸로 접근했다.

덥썩.

그리고 다행히 간신히 탑의 범위에 빨려들기 전에 앨번의 갑옷을 거머쥘 수 있었다.

“루스-!”

나는 루스의 이름을 부르며 성벽을 향해 앨번을 힘껏 집어 던졌다.

다시 한번 날아간 앨번은 성벽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으로 달려간 루스가 앨번의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무사히 받아 들었다.

잠시 후, 앨번을 백작에게 건넨 루스도 이내 성벽을 뛰어내려 전장으로 합류했다.

상황이 급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해 주는 루스였다.

‘이게 호흡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탑이 이 순간에도 작동하며 붉은 기운을 수도로 내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스, 여긴 맡긴다.”

나는 황가수호대를 향해 턱짓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에서 화염을 끌어 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할 틈도 없이 나는 탑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몇 번의 점멸을 거듭하여 나는 탑 아래에 도착했다.

마력을 끌어 올려 탑의 흡력을 막으며 불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탑을 지키던 황가수호대가 달려들었다.

‘늘어나라. 더, 좀 더!’

놈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선 채로 불의 검에 마력을 계속 불어넣었다.

콰르르르-

충분한 길이로 불의 검이 커졌을 때, 나는 점멸을 사용했다.

스팟-

이동한 위치는 달려드는 황가수호대의 측면.

나는 길게 늘어난 불의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지면과 수평으로 그어진 화염의 선이 달려들던 황가수호대와 맞부딪친 순간, 나는 그대로 멸세폭을 날려 버렸다.

콰콰콰콰쾅-!

일렬로 달려들던 황가수호대 무리의 몸통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황가수호대의 상하체가 분리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고, 나는 곧바로 탑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의 검을 탑에 칭칭 감은 후 다시 멸세폭을 사용했다.

다시 한번 폭음이 울리고, 탑의 아랫부분이 부서져 내렸다.

쿠구궁

그리고 곧이어 탑이 옆으로 쓰러지며, 주위를 잠식하던 불쾌한 기운이 사라졌다.

탑이 스러지고 나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몇 남지 않은 황가수호대는 루스와 손을 합치자 금세 처리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막 전투를 끝냈을 때쯤,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앨번이었다.

응급 치료를 마쳤는지 더 이상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앨번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내가 수배범이란 것을 알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는군.’

목숨값을 생각하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그 당연한 일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그를 가만히 보고 있자, 앨번이 거듭 감사를 표해 왔다.

“정해수 님, 이번에도 제 목숨을 구해 주셨군요. 저번에 받은 은혜를 갚지도 못했는데, 어찌해야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백성의 목숨까지 구하셨으니…….”

앨번의 말투와 몸짓에는 진심이 가득 묻어 나왔다.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를 잘했지. 역시 괜찮은 사람이야.’

모처럼 흐뭇한 마음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무사하셔서 천만다행입니다, 앨번 님.”

내 말에 앨번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 할 때였다.

“이놈, 정해수! 제국의 수배범 따위가 어째서 당당하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이냐?”

누군가 사방에 다 들리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돌아보자 그곳에는 음침하게 생긴 귀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놈인데. 누구더라?’

분명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름이나 직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썩 좋지 못한 느낌인 것으로 보아, 좋은 일로 엮였던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귀족이 거듭 소리쳤다.

“네 이놈, 정해수. 황제 폐하의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도를 폭파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 간 놈이 어째서 벌건 대낮에 백작령을 활보하고 있는 게냐!”

놈이 악을 쓰며 개소리를 떠들어 대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우겨 대는 모습을 보자 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놈, 그놈이잖아? 후작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이름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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