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2화>
계약이 완료되자 나는 의사소통하는 법을 전할 겸 그에게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 이제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잠시 놀라던 촌장은 소통하는 법을 깨달았는지 이내 대답해 왔다.
- 오오, 이제 구원자님과 연결되었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마치 이제야 용서를 받았다는 표정으로 연신 감사를 표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감격하는 모습이 마치 사이비 종교라도 보는 듯했다.
‘기분이 영 찜찜한데.’
- 이제 되었으니, 어서 일어나세요.
내가 강한 어조로 뜻을 전하자 그제야 촌장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엘프들도 촌장을 따라 꿇었던 무릎을 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육성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더 남쪽으로 피신하세요. 최대한 드워프 영역 가까이 갈수록 좋습니다. 싸움은 제가 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살아 있어야 싸움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적잖이 감동한 듯, 엘프들이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관리자를 이기려면 당신들이 살아 있어 줘야 해.’
내 뜻과 그들이 이해한 바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별 상관없겠지.
그때 촌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저, 구원자님. 구원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희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가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피난을 하기가 좀…….”
“알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프의 열매를 꺼내었다.
그것은 누크가 미리 작업해 놓은 것으로, 파란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헉, 열매가 싹을 틔우다니. 그것을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구원자님?”
촌장이 깜짝 놀라 물어 왔다.
나는 전투를 피해 멀찌감치 숨어 있던 누크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누크를 가리키며 엘프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의 능력으로 엘프의 열매를 싹 틔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매는 심으면 며칠 안에 성목으로 자라날 거고요.”
“그, 그럴 수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촌장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 이주에 관한 문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가 되셨으면 어서 가서 피난 준비를 하세요. 그리고 촌장님? 촌장님은 저와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촌장은 다음 마을로 함께 데려갈 계획이었다.
촌장을 데리고 가면 그나마 설득이 조금이라도 쉬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매번 탑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그걸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없는 일이니.’
어쨌든 이번에는 일이 잘 처리되어 다행이었다.
“아슬라 님, 다음 마을로 안내를 부탁합니다.”
“네! 구원자님. 빠르게 안내할게요.”
조금 전 어머니 나무가 탑에 흡수되는 광경을 봐서 그런지 아슬라는 더욱더 열심이었다.
* * *
엘프들을 피신시키는 데에는 사흘이 걸렸다.
그리고 그동안 탑도 5개나 파괴했다.
처음 한두 번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을마다 촌장이나 원로를 한 명씩 뽑아서 데리고 다니자 나중에는 설득이 한결 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난을 떠난 엘프는 전체의 3할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제국 국경에 인접한 엘프 마을들만 들렀기 때문이다.
남쪽 엘프 영역 모두를 돌아다닐 만한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나머지 마을들은 엘프들이 스스로 설득하기로 했다.
‘그래도 계약을 잔뜩 했군.’
한 가지 성과라면, 들르는 마을마다 촌장들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 구원자님, 점심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바로 가시는 바람에 얼마나 아쉽던지.
- 구원자님, 누크라는 분의 기술이 정말 신묘하더군요. 어떻게 열매에서 강제로 싹을 나게 만들 수가 있을까요.
물론 시도 때도 없이 걸어오는 말 때문에 좀 성가시기도 했다.
하지만 다 나중을 위한 보험이니, 마냥 조용히 하라고 하기도 뭐했다.
나는 대충 말을 받아 주고 나서 마차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우리는 지금 제국의 영토로 다시 들어와 있었다.
엘프의 영역을 떠나, 다음번 목표인 아베나스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제 아슬라와 누크 등과는 헤어진 상태로, 루스와 단둘만 남았다.
‘휴고는 잘하고 있으려나.’
잠시 휴고 녀석에 대해 생각하는 와중에 또 누군가 마음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 해수, 해수.
또 어떤 엘프인가 하고 귀찮은 마음이 들려는 찰나, 익숙한 음성에 옛 친구의 목소리란 것을 깨달았다.
- 아, 옛 친구님이셨군요.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로프에 나타난 탑을 부수라고 시켜 놓고는, 내 쪽의 일이 바빠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멋쩍어하고 있는데, 옛 친구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 탑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어요!
- 오, 잘하셨습니다. 피해는 크지 않았습니까?
- 네, 브레스부터 한 방 쏘고 나서 쳐들어가니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었어요. 라로프인들이 조금 다치긴 했지만, 죽은 사람은 없고요.
예상대로 옛 친구라면 황가수호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다행입니다. 그런데 노르트와 서쪽 연합은 어찌 되었습니까?
- 노르트는 바삐 사람들을 수습해 피난을 오는 중이에요. 아직 도착하진 않았지만, 몬스터들이 약해져서 별문제 없을 거라고 해요. 그런데…….
밝던 옛 친구의 목소리에 근심이 어렸다.
- 혹시 서쪽에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 그런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 지시한 대로 서쪽 더 깊이 숨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그들만으로 잘 버틸 수 있을지…….
그러고 보니 플레이어들을 서쪽으로 보낼 계획이란 것을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 제가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머지않아 서쪽으로 플레이어들을 모아서 보낼 예정입니다.
- 플레이어들이요?
- 예, 황가수호대를 처치할 역량은 되지 않겠지만, 몬스터를 상대로는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탑을 상대로 이겨 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관리자를 처치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때까지 버텨 내는 것이다.
어쨌든 내 대답에 근심이 조금 가셨는지, 옛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 서쪽에 플레이어들이 합류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제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겠어요.
- 예, 어떻게든 조금만 버티십시오. 제가 방법을 마련하겠습니다.
- 알았어요.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또 연락하도록 할게요. 당신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요. 몸조심하고요.
옛 친구와의 대화를 그렇게 끝내고 나자, 마음이 조금 다급해졌다.
버티라고 말을 해 놓았지만, 신격을 얻기 위한 행보는 아직 시작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너무 조급해지지 말자. 일단 사람들이 버틸 방법을 마련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자격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관리자를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마음을 다잡는 중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장,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안 그래도 궁금했던 휴고의 목소리였다.
- 이제 제국 국경으로 들어선 지 두어 시간쯤 되었어. 너는 어디야?
- 저는 세 시간쯤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조금 기다렸다가 같이 갈까요?
이번에 우리가 향하는 곳은 스탄 백작의 영지인 아베나스탄이었는데, 제국 수도를 기준으로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남쪽 엘프 숲에서 출발한 우리는 북상하는 중이었고, 그보다 좀 더 북쪽에서 출발한 휴고가 우리보다 조금 앞서 있었다.
- 괜히 길이라도 어긋나면 시간을 더 잡아먹을 거야. 아베나스탄에서 만나자.
- 하하, 알겠습니다. 근데 여긴 피난민이 정말 많군요. 대장 쪽에도 피난민이 있습니까?
이곳에도 마차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른은 등에 짐을 바리바리 지고, 어린아이는 엄마의 손을 붙잡은 채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하루 이틀 걸은 것이 아닌지, 신발이 해져 있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 여기도 피난민이 한가득이다. 아무래도 탑에 대한 소문이 많이 퍼졌나 보다.
휴고에게 대답하는 중, 어디선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도대체 그 탑은 뭐란 말이오. 어디서 나타나서 사람을 잡아먹는지.”
한 남자가 푸념하듯 내뱉자 옆에 있던 자가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오. 이미 수도 근처에 있던 도시들은 죄다 사라졌다고 합디다. 당장 목숨 건진 게 다행이긴 한데.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아베타스탄에는 무슨 대책이 있을까요?”
“그곳은 그래도 제국 10대 도시 중 한 곳이니 무슨 수가 있지 않겠소? 그나저나 우릴 받아 주기나 할지. 온 사방에서 피난민이 몰려들 텐데.”
그 이후로도 계속된 두 남자의 푸념은 우리 마차가 행렬을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듣느라 잠시 생각을 멈췄었는데, 문득 이상한 것이 느껴졌다.
‘이야기하다가 뭐 하는 거지? 보통 이렇게 말을 끊을 녀석이 아닌데?’
갑자기 휴고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 휴고, 혹시 무슨 일 있어? 휴고?
- …….
하지만 휴고는 시간이 흘러도 대답이 없었다.
* * *
도시 국가의 시민들을 피난시키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휴고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진형기가 아슬라에게 시민들을 인도하면 그들은 엘프를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갈 것이다.
‘그럼 헛되이 목숨을 잃을 사람이 줄어들겠지.’
보람찬 마음으로 아베나스탄을 향하는 휴고의 눈에 앞서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제국인 같은데. 피난 가는 건가?’
거의 백 명은 되어 보이는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부분 여자 아니면 어린아이잖아? 남자는 다 어디 간 거야?’
그때 옆에서 칭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왜 이렇게 힘들게 멀리 가는 거야?”
“아버지는 군인이시잖니. 나라를 지키려고 멀리 가셨단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나타나서 잠시 피하는 거고. 그러니 조금만 참으렴.”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피곤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전부 다 군인 가족인가?’
아이들이 새까매진 얼굴로 힘겹게 걷는 것을 보니 좋았던 휴고의 기분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이게 다 관리자 때문이야. 대장이 빨리 자격을 얻어야 할 텐데. 뭐하시고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휴고는 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계약을 맺으며 얻은 이 능력은 신묘하기 그지없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대화가 가능했다.
- 대장, 어디쯤 오고 계십니까?
그러자 금세 해수의 대답이 들려왔고, 잠시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피난민들을 보고 근심스러웠던 마음이 대장의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휴고는 대장에게 피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곳에도 피난민이 있나 궁금하기도 했고, 대장이라면 무슨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대답이 들려오기 직전, 휴고는 깜짝 놀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결코 지금 이 순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젠장! 저게 왜 여기!’
휴고는 애병, ‘무거운 분노’를 뽑아 들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도망쳐! 모두 저 탑에서 멀어져라!”
휴고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아이들과 여성들이 휴고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직 무슨 일이 있어 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그들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쳐! 어서 도망치라고!”
다시 한번 고함친 휴고는 망치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아앙-!
굉음이 터지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피난민들만이 아니었다.
탑 주위에 나타난 황가수호대 역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탑이 가동되며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