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10화>
시장 둘은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지 나란히 서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며 조금은 강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봐, 너희 둘. 조금 전에 봤지? 탑이 어떤 짓을 하는지?”
탑이 생명을 빨아들이는 모습은 그들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내 질문에 두 시장의 고개가 맹렬히 끄덕여졌다.
“봤으니 알겠지만, 저건 너희가 가진 병력으로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이번에도 두 시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장면을 보았으니, 그들도 알량한 도시의 병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방법을 절망 어린 표정을 짓는 두 시장에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너희는 나머지 도시를 돌아다니며 시장들을 설득해. 그래서 사람들을 모두 블룸폰테인으로 모아. 그 이후에 갈 곳은 내가 마련해 주지.”
내 말에 가만히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시모어와 달리 네드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 저기. 다른 시장들이 우리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긴 시장들끼리 사이가 돈독해 보이지도 않았으니, 설득이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나도 당장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도시 국가를 돌아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당장 내일 누크를 데리고 엘프 마을로 가기로 했으니…….’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앉아서 쉬고 있던 휴고가 일어나더니 옆으로 다가왔다.
“대장,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응? 다녀오겠다니, 무슨 말이야?”
“제가 여기 두 시장을 데리고 도시들을 돌면서 나머지 시장들을 설득하겠습니다. 혹시 탑이 나타나더라도 제가 가면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어쩐지 토호얀두에 들어서기 전부터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매번 붙어 다니다 보니 휴고를 보낸다는 선택지는 생각을 못 했었는데, 가만 보면 휴고의 말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휴고가 도시를 돌아다닐 동안, 나는 엘프 쪽의 일을 처리하고 다시 만나면 될 일이고.
실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도 않을 것이다.
‘소환 영웅이 한꺼번에 여러 명 나타나는 경우만 제외하면 휴고가 위험할 일도 없을 테지.’
스탯이 많이 성장한 데다가 두 번째 스킬의 위력이 워낙 사기적이다 보니, 휴고를 위협할 만한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 휴고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위험할 일도 없을 거고요. 오히려 대장 쪽이 걱정입니다. 영웅이라도 나타나면…….”
사실 휴고를 노리고 관리자가 영웅을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영웅을 보낸다면…… 내 쪽이 타깃이 되겠지.’
휴고가 전력에서 이탈하면 그만큼 이쪽의 위험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녀석은 오히려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내 쪽도 큰 문제는 없었다.
든든한 전력인 루스도 함께 있는 데다가, 여차하면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다.
이제 영웅은 더 이상 꼭 싸워 무찌르거나 복수를 할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루스도 함께 있으니 나는 괜찮아. 휴고 너는 혼자서 괜찮겠어?”
다른 도시의 시장들은 순순히 말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번에야 탑이 적시에 나타나면서 오히려 설득이 쉬웠지만, 매번 그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 말이다.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잘 해낼지 걱정이군.’
설득이 여의치 않을 경우, 과연 휴고가 시장들에게 매몰차게 손을 쓸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휴고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해 왔다.
“괜찮습니다. 저도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말과 함께 주먹을 꽉 쥐어 보이는 것이, 여차하면 두들겨 패서라도 말을 듣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그런 자세면 혼자 보낼 수 있겠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예, 대장.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 근데…….”
* * *
휴고는 그 길로 두 시장을 이끌고 다른 도시 국가를 향해 길을 나섰다.
급하게 나서는 통에 시장들이 죽을상을 지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길을 재촉하는 휴고를 보니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자식. 확실히 옛날이랑은 다르군. 뭐, 녀석도 산전수전 다 겼었으니, 더 이상 물러터지게 굴 수만은 없겠지.”
물론 창조주를 고민에 빠지게 만든 내가 남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휴고를 보낸 우리는 다시 블룸폰테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엘프의 열매를 다 가공한 누크가 채비를 마치고 내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해수 님, 언제 출발하나요?”
누크는 뭔가 굉장히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식물에 대해 탐구심이 유달리 강한 것 같다는 내 추측이, 점점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제 가면 됩니다. 가시죠.”
휴고가 없으니 왠지 허전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나 갔을까.
- 대장, 출발하셨습니까? 저는 니제르에서 막 일을 마쳤습니다. 이쪽 시장과는 나름 원만하게 일을 끝냈습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휴고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전달되어 왔다.
어제 막 헤어질 무렵, 휴고가 자신에게도 ‘계약’을 걸어 달라고 했다.
워낙 붙어 다니다 보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제 플레이어인 휴고에게도 계약이 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지. 아니, 따지자면 이득만 있군. 근데…….’
너무 시시콜콜 보고해 온다.
- 그래. 잘했다, 휴고. 나도 아슬라네 마을로 이동 중이다.
- 그러시군요. 하하. 저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대장 말씀대로 시민들은 블룸폰테인으로 보내고 있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 안 했다.
문득 휴고가 빨리 다시 합류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래, 수고해라.
- 예, 대장. 곧 이따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
휴고와의 대화를 마치고 열심히 달렸다.
실력이 떨어지는 누크가 연신 헐떡이긴 했지만, 그래도 퍼지지 않고 따라오는 중이었다.
‘여차하면 업고 달리려 했더니, 그래도 제법이군.’
적당한 속도로 한참을 더 나아가자,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아슬라가 보였다.
“구원자님, 오셨어요? 근데 어머니 나무를 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랬다.
원래는 바로 다른 엘프 마을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누크를 만나며 계획이 바뀌었다.
그래서 오는 길에 아슬라에게 미리 귀띔을 해 두었던 것이다.
“예, 잠시 좀 실험해 볼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 나무에 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안심하고 안내해 주십시오.”
“아무렴요. 구원자님이 하시는 일인데, 혹시 어머니 나무에 해가 되더라도 괜찮아요. 다 필요한 일이겠죠.”
어느새 절대적인 신뢰가 쌓인 모양인지, 아슬라는 굉장히 긍정적인 태도로 우리를 어머니 나무로 안내했다.
‘그나저나 어머니 나무에 종교적인 의미는 없나 보군.’
소설책에 나오는 세계수니 하는 것들은 그냥 나무가 아니라 정신적인 지주 역할도 했었다.
그에 반해 이곳의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를 특별히 신성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이나 식량처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원으로 보는 건가?’
혼자 생각을 이어 가는 중에, 멀리 어머니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오오, 저것이 바로 어머니 나무!”
그리고 옆에서 누크의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이쪽인 것 같군.’
누크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연신 나를 쳐다봤다.
다가가서 만져 보게 해 달라는 뜻이 눈빛으로 전해져 왔다.
그런 누크의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아슬라에게 허락을 구했다.
“아슬라 님, 여기 이분이 어머니 나무를 조금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접촉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해가 갈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 구원자님께 필요한 일이면 뭐든 하셔도 돼요. 이미 할아버지랑 마을 어른들도 모두 허락한 일인걸요.”
나는 아슬라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누크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누크가 재빨리 어머니 나무로 다가갔다.
누크는 어머니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눈을 감았다.
스킬을 사용하는지 그의 몸에서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누크는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슬슬 질릴 때쯤, 나는 누크에게 질문했다.
“누크 님, 어떨 것 같습니까?”
“으음…….”
이미 몇 십 분은 저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대답이 없다.
고개만 계속 갸웃거리는 것이 뭔가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잘 안 될 것 같으면,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슬쩍 재촉하자 누크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어머니 나무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제힘으로 어떻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옮길 수 있게 만들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실패인가?
어머니 나무만 옮길 수 있다면, 엘프들을 피난시키는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후우- 아쉽군.’
그때 내 표정을 살피던 누크가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저걸 하나만 따 주시면 안 될까요? 한번 실험을 해 보고 싶은데.”
그가 가리킨 것은 어머니 나무에서 막 열린 싱싱한 열매였다.
무언가 방법이 떠올랐는지, 누크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슬라를 돌아보았다.
“아슬라 님, 혹시 열매 하나만 따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따다 드릴게요.”
말을 마친 아슬라가 풀쩍 뛰어올라 가장 싱싱해 보이는 열매를 하나 따 왔다.
“여기요.”
아슬라도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던 터라, 열매는 곧장 누크에게 전달되었다.
누크가 열매를 응시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 초록색 빛이 어리더니 열매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진동은 점차 커지더니 열매를 든 누크의 손이 덜덜 떨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누크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흐음, 뭘 하는 거지?’
궁금증을 갖고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을 때, 겨우 진동이 멎었다.
누크가 이마를 훔치며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이제 됐어요.”
피곤해 보이지만 밝은 그의 표정을 보고 내가 되물었다.
“혹시 무슨 방법을 찾아내셨습니까?”
“네, 이걸 한번 보세요.”
누크는 대답과 함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가 내민 엘프의 열매에는 손가락만 한 싹이 돋아나 있었다.
‘설마…….’
“이제 이걸 다른 곳에 심으면 됩니다. 제가 스킬을 통해 생장을 촉진시켜 놓았으니, 땅의 양분만 충분하다면 며칠 안에 성목(成木)으로 자라날 거예요.”
옮겨 심을 수 없으니, 새로 키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럼 진형기에게 줬던 열매로 진작에 이렇게 했으면 되지 않나?’
막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누크의 설명이 이어졌다.
“방금 딴 열매의 강한 생명력이 있어 가능했던 거예요. 오래된 열매는 마력을 품고 있기는 한데, 생명력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그렇군요. 어쨌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지겠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정해수 님이야말로 힘든 걸 마다치 않고 세상을 위해 동분서주하시잖아요. 제가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되죠, 하하.”
진형기에게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누크는 내게 굉장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힘든 것도 내색하지 않고, 누크가 내게 씩 웃어 보였다.
“혹시 방금 같은 일을 계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연이어서 하지만 않으면 충분히 가능해요. 중간중간 마력을 회복하려면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요.”
어차피 방금 같은 일을 연이어 계속할 필요는 없다.
각 마을마다 한 번씩만 하면 될 테니까.
나는 기분 좋게 누크에게 받아 든 열매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제 어머니 나무에 관한 문제는 얼추 해결되었다.
다른 엘프 마을에 들러 탑에 관해 이야기하고 피난을 권하기만 하면 된다.
“아슬라 님, 바로 출발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준비는 다 끝났어요. 최대한 북쪽에 위치한 마을들로 최단 경로를 짜 놓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감사하긴요. 저희 엘프들이 구원자님께 감사드려야죠.”
말을 마친 아슬라가 이동을 시작했다.
우리도 서둘러 아슬라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