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09화>
시장에게 할 말이 있다는 내 대답은 휴고의 궁금증을 다 풀어 주지 못했다.
“할 말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시민들 이끌고 피난 가라고 해야지. 일단 블룸폰테인으로 모은 다음에 남쪽으로 보낼까 생각 중이야.”
덧붙여 설명하니 휴고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시장들이 순순히 말을 들을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모으는 중에 탑이라도 나타나면 어떻게 하죠? 이들만으로는 못 버틸 텐데요. 플레이어들이 도와도 힘들 텐데…….”
나도 그 문제를 걱정하던 중이었지만, 딱히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그래도 마냥 방치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휴고도 연신 고민을 하는 눈치였지만, 역시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지 미간만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진형기가 기운을 차리자 우리는 토호얀두 안으로 진입했다.
도시에 들어서자 어수선한 분위기가 대번에 느껴졌다.
가게는 장사를 하지 않았고, 집집마다 문이 꼭 닫혀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한데, 설마 탑이 벌써 나타났던 것은 아니겠지요?”
휴고는 아까부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으면 사람 기척이라고는 없었겠지. 그냥 안 좋은 소문이 퍼진 거 아닐까?”
아마 어느 도시가 망했다든가 하는 소식이 퍼진 모양이다.
사람들이 모조리 집 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었다.
어쨌든 걸음을 재촉해 시장 관저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눈에 들어올 때쯤, 나는 휴고의 어깨에 매달린 시장의 뺨을 두드렸다.
찰싹-
“이봐, 정신 차려. 당신 얼굴이 필요하니까.”
잠시 얼굴을 꿈틀거리던 시장은 내 고압적인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휴고의 어깨에서 내려온 시장이 비굴한 태도로 물어 왔다.
“저기 가서 블룸폰테인의 시장이 토호얀두의 시장을 만나러 왔다고 해.”
내가 경비병을 가리키며 말하자,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시장은 이내 체념한 듯 내 지시를 이행했다.
한동안 소란이 일더니 우리는 경비병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안내되었다.
창을 든 경비병 여럿이 우리를 사방에서 에워싼 채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결코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시장 관저 뒤편의 공터에 이르자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자 두툼한 살집을 가진 중년 남성이 호위를 대동하고 장내에 등장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사방을 훑어보다가, 블룸폰테인 시장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허, 난 또 웬 머저리가 시장을 사칭하나 했더니, 진짜 시모어 자네일 줄은 몰랐군.”
그러고 보니 블룸폰테인 시장의 이름조차 여태껏 몰랐는데, 그의 이름이 시모어인 듯했다.
“뭐, 그렇게 되었네. 네드.”
이곳 토호얀두의 시장의 이름은 네드인 모양.
시모어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네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도대체 여긴 왜 온 건가? 우리가 딱히 기별도 없이 찾아올 만한 사이는 아닐 텐데. 그리고 그 꼴은 또 뭐고?”
“어, 음. 난 잘 모르겠으니, 여기 이분들과 이야기를 하게.”
시모어는 더 이상 말할 기력도 없는지 조용히 물러섰다.
그러자 네드의 눈빛이 우리를 날카롭게 훑었다.
“너희들은 뭐지?”
네드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시모어의 태도를 보아 우리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가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이자 사방을 둘러싼 병사들의 창날이 우리를 찌를 듯이 겨누었다.
“저는 정해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누군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계십니까?”
일단은 정중하게 말했다.
썩 통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뭐? 이름을 보니 플레이어란 놈들인가 보구나. 근데 시모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네놈들, 감히 도시 국가의 수장에게 손을 댄 것이냐?”
역시나 말이 통할 기미가 전혀 없다.
게다가 평소에 썩 친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시모어를 겁박한 것에 굉장히 분노한 것 같았다.
‘조선 시대에 양반들끼리 그렇게 물고 뜯고 싸우다가도 반란이 일어나면 똘똘 뭉쳤다더니.’
꼭 그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네드의 호통에 창날이 한층 더 우리에게 다가들었다.
순간 손을 써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설득을 해 보기로 했다.
“지금 세상 곳곳에 탑이 나타나 생명체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곳도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피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 말이 이어지는 동안 네드의 표정이 갈수록 일그러지더니, 말이 끝나자마자 내게 호통을 쳤다.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느냐? 헛소문을 퍼트려 시민들을 혼란하게 만드는 놈이 누군가 했더니, 네놈이었구나! 여봐라, 저놈들을 잡아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예상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네드는 아무리 봐도 나를 자신의 권력을 흔들려 드는 반란분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말로 안 되면…….’
결국은 완력으로 해결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와중에 병사들이 움직였다.
죽여도 좋다는 시장의 말 때문인지, 병사들은 창날을 과감히 찔러 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휴고와 루스에게 슬쩍 눈짓했다.
파바박-
쿠당탕-
잠시 소란이 이는 듯싶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병사들이 모조리 나자빠졌다.
그러자 네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지, 놈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네 이놈들, 감히 토호얀두에서 내 병사를 해치다니. 진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말을 마친 놈은 나타날 때 함께 데려온 호위에게 우리 쪽을 손짓했다.
그러자 호위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마스터군. 도시마다 마스터가 하나씩 있는 건가?’
왠지 제국이 파견해 놓은 놈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결국 말로는 안 되는군.”
내가 중얼거리는 찰나 호위 무사의 검이 새파란 오러를 머금고 찔러 들어왔다.
덥썩
나는 강기공을 살짝 끌어 올려 놈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 버렸다.
그러나 호위 무사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퍽-
그 틈에 빈손으로 명치를 후려치자, 놈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컥, 커흑……!”
숨이 잘 안 쉬어지는지 호위 무사가 컥컥댈 동안 네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멈춰 있었다.
‘마스터가 한 방에 제압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겠지.’
어쨌든 이미 주먹질을 한 이상, 조용하게 대화로 풀 수는 없어졌다.
그럴 필요도 없고.
내가 새로운 방식으로 시장을 설득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멀리서 불쾌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 몸의 기운을 빨아들일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지만, 탑이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쯧, 이곳에도 나타났군. 아니, 어쩌면 잘되었을지도.’
“주인, 탑이야.”
루스의 목소리에 돌아보니, 휴고 또한 이미 눈치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탑이 나타난 이상 네드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놈에게 다가가 뒷목을 콱 움켜쥐었다.
“컥, 커억.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놓아라, 이놈아!”
놈이 반항을 하든 말든 나는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하며 놈에게 말했다.
“조용하고 지켜봐.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해 버렸는지.”
그리고 놈을 든 채,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우리 일행은 물론 시장의 부하들도 뒤따랐다.
나는 빠르게 걸으며 손에 들린 시장을 노려봤다.
‘그래도 살려 두는 게 낫겠지.’
어쨌든 지금 이곳의 시장은 이놈이니, 이곳 시민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는 이놈의 말발이 먹힐 것이다.
피난을 시키든, 이주를 시키든 말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 도망치라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도망칠 리가 없을 테니.’
그런 이유만 아니라면 굳이 이놈을 설득할 이유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멀리 탑이 보이는 위치까지 도착했다.
이미 탑이 가동을 시작했는지, 탑 주위의 들판이 퍼석하게 메말라 가고 주변의 나무들이 시들어 죽어 갔다.
“저, 정 형, 저게 설마 정 형이 말했던 그거요?”
탑이 생명을 빨아들이는 모습을 직접 보자, 제법 간덩이가 큰 진형기조차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나무만 빨아들이지만, 근처에 가면 사람이고 몬스터고 다 잡아먹힌다.”
“미, 미친! 저런 걸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가 만들었단 말이오?”
나는 진형기에게 대답하는 대신, 손에 쥔 네드의 얼굴을 탑이 있는 방향으로 내밀었다.
“저걸 봐라. 곧 네 도시가 저 탑에 모조리 빨려 들어갈 거다. 네놈의 병사는 물론 네놈까지도 말이지.”
움켜쥔 놈의 목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겁을 잔뜩 집어먹은 네드는 어느새 한결 공손해진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저걸 처리하고 나서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 알겠나?”
“예, 예.”
놈이 내게 목을 잡힌 채 어떻게든 고개를 끄덕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놈을 뒤로 집어 던졌다.
‘이만하면 시키는 대로 잘하겠지.’
시장을 설득했으니, 이제 탑을 처리할 차례였다.
탑이 생명을 빨아들이는 모습이 불쾌한지, 휴고는 이미 아까 전부터 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휴고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그 뒤를 루스도 재빠르게 쫓아갔다.
일행이 갑자기 나타나자, 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황가수호대가 대응해 왔다.
콰콰콰쾅-
콰르르르……!
곧이어 전투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나는 바로 전투에 가담하는 대신 진형기를 불렀다.
“진형기, 잠시 이쪽으로 와 봐.”
나는 진형기를 이끌고 탑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바로 끈적한 기운이 몸을 에워싸더니 생명력을 빨아 가려 들었다.
마력을 끌어 올려 탑의 기운을 몰아내면서 나는 진형기에게 말했다.
“이렇게 어느 정도는 마력을 끌어 올려 막을 수 있어.”
진형기는 나를 따라오다 갑자기 느껴지는 탑의 기운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다 내 말이 들리자 얼른 마력을 끌어 올려 저항했다. 그리고 그 효과를 보고는 감탄을 흘렸다.
“오오, 탑의 기운이 물러났소. 이거 신기하군.”
“그것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통해. 실력이 아주 좋으면 문제없지만.”
나는 말과 함께 휴고와 루스를 턱짓했다.
그러자 진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정도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구만. 그럼 우리 수준으론 좀 어렵겠는데……. 기운이 느껴지면 열심히 도망치는 수밖에 없겠군.”
진형기는 내 뜻을 잘 파악했다.
어차피 플레이어들의 실력으로 탑을 부수기 힘들뿐더러 성공할지라도 희생이 너무 크다.
그러니 마력을 끌어 올려 저항하면서 도망치라는 것이 내가 진형기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 괜히 싸우지 말고. 최대한 몸 사려. 많이 살려두고 버티는 게 네가 할 일이야. 싸움은 내가 한다.”
진형기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밖에 못 도와서 미안하오, 정 형.”
“됐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한결 다행이야.”
그나마 진형기라도 있어서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쿠구구궁-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탑이 쓰러졌다.
휴고의 멸세폭이 탑에 거듭 작렬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밑동이 부서진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남은 황가수호대는 루스의 손에 전멸했다.
“그래도 이번엔 미리 감지해서 거의 피해가 없었군.”
별탈 없이 일이 마무리되는 듯해 안심하고 있을 때, 일을 끝마친 휴고와 루스가 돌아왔다.
황가수호대 정도는 이제 어려운 상대가 아닌지,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대장, 다 처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좀 쉬고 있어. 나는 저치들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는 휴고에게 네드와 시모어를 턱짓하며 말한 후, 그들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