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08화>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프의 열매를 가공한다는 말은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서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한 가지 기대를 품으며 진형기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사람에 대해 좀 자세히 얘기해 봐.”
“당신과 아지트에서 헤어지고 나서 말이오…….”
진형기는 미소 띤 얼굴로 자세한 사정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진형기가 시장을 회유해 블룸폰테인을 막 손에 넣었을 무렵, 한 명의 플레이어가 찾아왔다고 한다.
그는 ‘식물술사’란 스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스킬은 식물의 생장이나 가공과 관련이 있었다.
가진 스킬이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니 그 플레이어는 이제껏 가는 곳마다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며 진형기에게 하소연했다.
그렇게 겨우 목숨만 부지에 이곳저곳을 떠돌았는데, 식물이 다양하게 자생하는 남쪽이라면 자신의 쓰임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온 것.
“그런데 그 녀석이 요 엘프의 열매를 스킬로 가공하더란 말이오. 그랬더니 효과가 두 배는 더 좋아졌지 뭐요, 흐흐.”
진형기가 손에 든 열매를 연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식물술사라. 어쩌면 진짜 가능할지도…….’
내가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혹시나 어머니 나무를 옮겨 심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사람 아직 여기 있겠지? 내가 좀 만나 볼 수 있을까?”
“뭐, 음. 그렇게 하시오. 불러 드리리다.”
진형기는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별 거부감 없이 부하를 시켜 식물술사를 불러오도록 했다.
똑똑.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무실로 누군가 들어섰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학구적으로 생긴 남자였다.
하얀 피부가 갈색 머리칼과 어우러져 차분한 인상을 느껴지게 했다.
“부……르셨다고요, 형님?”
남자는 들어오다가 바닥을 가득 채우며 굴러다니고 있는 엘프의 열매에 놀라 움찔하더니 겨우 말을 이었다.
호칭을 보아하니, 진형기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어느새 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그래, 이리 와서 좀 앉아. 누가 자넬 좀 보자고 해서 불렀어.”
식물술사가 자리에 앉자 진형기가 그를 나에게 소개했다.
“여기 이 친구가 바로 우리 식물술사요. 이름은 누크지.”
그러더니 누크에게도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사람이 플레이어 중에 최강인 정해수야. 나랑 동포니까, 정이 성이고 해수가 이름이야.”
“아, 그렇군요.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누크입니다.”
소개를 들은 누크의 표정이 밝아지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저번 아지트의 싸움 이후, 진형기의 패거리들이 내게 강한 인상을 받은 듯했다.
평소에 내 얘기를 자주 했으니 새로 합류한 자까지 나를 아는 것이겠지.
뭐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나는 얼른 용건을 꺼내었다.
“정해수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좀 궁금한 게 있어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음, 그러시군요. 무엇이 궁금하신지?”
누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어 왔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엘프의 열매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게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에서 자라는 열매라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누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혹시 당신의 스킬로 어머니 나무를 옮겨 심을 수 있겠습니까? 엘프들에게 물으니, 땅에서 뽑으면 금세 말라 버린다고 하더군요.”
누크는 한동안 턱을 쓰다듬으며 말이 없었다.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생각을 다 정리한 듯 누크가 입을 열었다.
“제 스킬은 식물의 성질을 파악하고, 생장을 촉진시키고 기운을 북돋는 것이에요. 일반적인 나무를 대상으로라면, 땅에서 뽑더라도 오래도록 살아 있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머니 나무도 가능하겠습니까?”
기대 어린 내 표정에 누크는 미안한 얼굴을 지었다.
“열매를 만져 보고 알았습니다만, 굉장히 독특한 기운을 가지고 있더군요. 일단 나무를 직접 보기 전까지는 정확한 대답을 드릴 수가 없겠네요.”
당장 확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생겼으니 다행이었다.
어차피 그에게 나무를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나는 시선을 옮겨 진형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진형기, 여기 누크 님을 내가 좀 데려가도 될까?”
그러자 진형기의 표정이 떨떠름해지더니, 바닥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다 어쩌고? 이걸 제대로 섭취해야 자네가 시킨 일을 똑바로 할 거 아닌가?”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나는 다시 누크를 보며 물었다.
“누크 님, 저걸 다 가공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음, 너무 많아서 못해도 꼬박 하루는 걸리겠는데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하루 정도면 큰 문제는 없겠지.
중요한 것은 누크에게 어머니 나무를 보러 갈 의사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럼 저걸 다 처리하시고, 저와 같이 어머니 나무를 보러 가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하하. 당장 열매부터 가공하겠습니다.”
누크는 의외로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게 아니면 모처럼 찾은 자신의 쓰임새가 기뻤을 수도 있고.
어찌 됐든 내게는 좋은 일이였기에 같이 마주 웃어 주었다.
잠시 후, 진형기가 저번에 아슬라와의 거래에 함께했던 여자 플레이어를 불러 열매를 옮기게 했다.
아마 그녀가 진형기의 심복인 모양이었다.
곧이어 누크도 작업을 하겠다면서 그들과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
모두가 나가자 진형기가 나를 향해 눈을 반짝거렸다.
“정 형, 이제 뭐 할 거요? 어차피 하루 동안 기다려야 할 텐데, 술이라도 한잔하겠소?”
하지만 진형기의 제안에 어울려 줄 수는 없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일단 이거 먼저 수락해라.”
그 말과 함께 진형기에게 ‘계약’을 사용하자, 진형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건 또 뭐요? 이, 이거 막 노예 계약 그런 거 아니오? 도장 찍고 나면 막 이상한 일 시키는 거 아니냔 말이오.”
나는 허튼소리를 내뱉는 진형기를 노려보았다.
“자꾸 헛소리하면 굳이 계약 안 하고도 충분히 이상한 일 시켜 줄 수 있다. 앞으로 할 일에 필요한 거니까 얼른 수락해.”
이제껏 사용하면서 알아낸 바에 따르면 ‘계약’은 상대의 본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협박을 하거나 강요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대상에게 ‘계약’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진형기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생명을 몇 번이나 구해 주고 예전에 동료의 복수도 도와줬으니, 진형기라면 계약이 실패할 리 없다.’
저렇게 껄렁하게 보여도 의리만큼은 확실한 진형기니까.
[대상의 확고한 의지에 따라 ‘계약’이 성립합니다.]
[‘진형기’와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잠시 후,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진형기와 계약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원래 ‘계약’은 인간 이외의 지성체에게만 사용이 가능한 스킬이었다.
그러나 창조주의 마지막 힘이 팔찌와 마찬가지로 ‘계약’의 성능도 바꾸었다.
이제 ‘계약’은 지성을 가진 모든 대상에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주가 어디까지 예상했는지 모르겠지만, 스킬이 바뀌지 않았으면 계획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진형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다 되었소? 나한테 도대체 뭘 시킬 셈인데 거창하게 스킬까지 거는 거요?”
- 이상한 거 아니야. 자꾸 군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연습해 봐.
- 헉! 이게 뭐요? 머릿속으로 소리가 들려오네. 신기하구만.
몇 번 대화를 주고받는 것으로, 진형기도 어렵지 않게 마음을 전하는 법을 깨우쳤다.
이제 진형기가 플레이어들을 모아 서쪽으로 향하면, 진형기와는 물론 서쪽 국가 연합과도 빠르게 소통이 가능해진다.
굳이 옛 친구를 거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 서쪽 국가 연합이 몬스터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 버리면, 마법진을 통한 연락이 계속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다.
‘역시 진형기를 서쪽으로 보내는 게 맞아.’
이번 결정은 썩 만족스러웠다.
나는 신기해하는 진형기를 진정시키고 다음 용건을 꺼냈다.
사실 준비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기를 놓칠지 몰랐다.
“혹시 시장은 어디 있나?”
딱히 시장에게 관심이 있지는 않았었지만, 이제는 물을 필요가 있었다.
진형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문득 시장의 쓰임새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관저 한 귀퉁이에 방에 처박혀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거요. 딱히 할 일도 없을 테니.”
“좀 불러와 봐. 할 말 있으니까.”
“알았소. 잠깐 기다리시오.”
진형기는 다시 부하를 시켜 시장을 불러오도록 했다.
얼마 지나자 술 냄새를 풍기며 시장이 들어섰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눈 밑이 퀭한 것이 그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요?”
시장은 들어오자마자 대뜸 진형기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일단 좀 앉아 보시오. 여기 정 형이 할 말이 있다네.”
진형기가 능글맞게 이야기하자, 시장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는 모습이 굉장히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싸우는 걸 본 건가? 어쨌든 내 입장에서 나쁠 건 없지.’
의아하긴 했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겁에 질려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용하면 그만이다.
“이봐, 시장. 내가 좀 물을 게 있어.”
나는 일부러 평소보다 강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예, 예. 무, 물어보십시오.”
시장이 몸을 움츠리며 대답해 왔다.
나는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해 가며 말을 이었다.
“혹시 옆 도시들과 관계가 어때? 평소에 연락은 자주 하나?”
내가 알기로 남쪽의 도시 국가들은 서쪽과는 달리 연합을 구성하지도 않고, 힘을 합칠 일도 없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접 확인하기로 한 것이다.
“으음, 평소에 따로 연락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국의 관리가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내려옵니다. 그때마다 시장들이 모두 모여 연회를 엽니다.”
“그러니까 친분은 있다는 말이군.”
“친분이라기엔 좀 그렇고, 안면이 있는 정도입니다.”
뭐 그래도 괜찮다.
아주 모르는 사이보다는 나을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형기를 쳐다보았다.
“잠깐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갑자기 어딜 가잔 말이오?”
“어차피 하루 쉬어야 하니 그동안 가 볼 데가 있어. 일어나.”
진형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떼었다.
“당신도 일어나.”
곧이어 나는 시장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시장이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저, 저는 왜……?”
“왜긴 왜야. 같이 가야 하니까 그렇지.”
나는 진형기와 시장에게 어서 가자는 손짓을 하며 방을 나섰다.
그러자 시장과 진형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영문을 모르기는 휴고와 루스도 마찬가지, 녀석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둘러 내 뒤를 쫓았다.
얼마 후, 우리는 블룸폰테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 국가, 토호얀두 앞에 도착했다.
“헉, 허억-. 진짜 괴물들이 헉, 따로 없구만.”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진형기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의 속도를 어느 정도 따라온 걸 보면 이제껏 진형기도 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말 그만하고 숨이나 골라.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내가 턱짓으로 가리킨 것은 시장이었다.
그는 휴고의 어깨에 메여 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속의 것을 모두 게워 내고 실신하듯 쓰러져 있었다.
내 말에 살짝 진저리를 친 진형기는 조용히 앉아 숨을 가라앉혔다.
“대장, 여긴 왜 오신 겁니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정을 내리고 여기까지 달려온 탓에 아직 아무에게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궁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모두를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이곳의 시장한테 할 말이 있어서 말이야. 저 시장이 다른 시장들과 안면이 있다니, 완전 초면인 것보다는 말이 통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