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06화>
놈에게 심장을 찔렸던 기억은 잊히지 않고 내 머릿속에 화인(火印)처럼 남아 있었다.
얼마 전 놈이 발록에게 죽는 모습을 보았지만, 내 손으로 처치하지 못한 탓인지 여전히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들끓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놈을 직접 죽여 그날의 원한을 풀 기회였다.
나는 이를 갈며 란슬롯에게 다가갔다.
‘바람의 걸음.’
마력을 아끼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불의 검에도 다시 한번 마력을 잔뜩 불어넣었다.
그러자 화염의 칼날이 채찍처럼 주욱 늘어났다.
옆쪽에서는 이미 루스와 휴고가 오를란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4단계까지 진화했다고는 하나, 오를란도의 성향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격력이 강하지 못한 것은 여전하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덕분에 내 분노는 오롯이 란슬롯에게 향했다.
‘죽여 주마!’
놈도 검을 뽑아 들고 내게 마주 들려 들고 있었다.
이윽고 검이 닿는 거리에 다다랐을 때, 나는 살기를 듬뿍 담아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검이 맞부딪치자 놈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확연한 모습이었다.
란슬론이 분노한 표정으로 검을 다잡더니 입으로 무언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결코…… 막지…… 필살의…… 하리라.”
들릴 듯 말 듯한 놈의 주문이 빠르게 이어지고 놈의 검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검이었다.
‘아론다이트.’
란슬롯의 애검 아론다이트.
결코 날이 상하지 않으며 그 어떤 보호막도 명검 아론다이트 앞에서는 쓸모가 없다.
그렇지만.
‘뭐, 나랑은 별 상관이 없지.’
애초에 내게 강기공 말고는 보호를 위한 기술이 없다.
용인화로 인해 몸의 내구도가 강하고, 초재생으로 회복이 빠를 뿐.
콰앙!
다시 한번 서로의 검이 부딪쳤을 때, 나는 놈의 힘을 완전히 파악했다.
놈은 더 이상 혼자서 내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리며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열 낸 건가?’
놈에게 분노를 불태운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어차피 놈들은 관리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을.
살의가 가라앉자 이성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자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결국 관리자를 도와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빨리 끝내자.’
내 마음이 변해 가는 사이, 밀려났던 란슬롯이 다시 달려들었다.
두 번이나 밀린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란슬롯은 이번에도 검을 맞부딪치려 들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꾼 이상, 굳이 계속 이런 식으로 어울려 줄 필요는 없었다.
또 한 번 검과 검이 맞부딪치려는 찰나.
‘점멸.’
놈의 뒤로 이동한 후 나는 곧바로 멸세폭을 날렸다.
허겁지겁 뒤돌아 검을 들어 올리는 란슬롯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강력한 폭발이 놈과 나 사이에서 일어났다.
먼지와 불꽃이 휘날리며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그 사이를 가르며 칼날이 찔러 왔다.
‘그래, 멸세폭 한 방에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바, 나는 놈의 칼날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명검 아론다이트와 내 왼손이 부딪혀 갔다.
그때를 맞춰, 나는 원혼의 거울에 ‘절대불변’을 사용했다.
캉-!
아론다이트는 단 한 치도 더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그 어떤 보호막도 꿰뚫는 검인 아론다이트조차 절대불변을 이겨 내지는 못한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야.’
애초에 절대불변은 보호막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 아니었다.
스킬이 적용된 무구의 존재를 단 1초에 불과할지라도 완벽하게 그 자리에 고정하는 것이 바로 그 효과였기 때문이다.
아론다이트가 손에 가로막히자 일순 놈이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허리를 베어 갔다.
스걱-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러나 걸치고 있는 두꺼운 갑옷 탓일까, 아니면 검의 주인이라는 클래스 때문일까.
놈은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버티고 있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오를란도 쪽을 살피는 것이, 치료라도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놈이 한눈을 판 순간, 내가 왼손을 기습적으로 들어 올렸다.
번쩍-!
원혼의 거울에서 발사된 광선이 놈의 머리를 노렸다.
란슬롯이 깜짝 놀라며 검을 얼굴 앞에 가져다 대었다.
파지직.
반사적으로 들어 올린 아론다이트와 광선이 부딪치며 소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상당한 몸으로 급하게 움직인 란슬롯의 신형이 살짝 비틀거렸다.
나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갔다.
‘멸세폭.’
안 그래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던 놈의 허리에 불의 검이 작렬했다.
폭발과 함께 놈의 옆구리가 터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크아아아악!”
폭음 사이로 놈의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스탯이 흡수되는 것으로 보아, 놈이 죽은 것이 확실했다.
‘생각보다 썩…….’
막상 죽이고 나니 특별히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날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아 과하게 반응했지만, 앞으로는 란슬롯에게 원한을 불태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쯧, 그래, 진짜 원흉은 관리자니까……. 놈을 처리해야 속이 좀 풀리겠지.’
머리를 내저어 상념을 떨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왠지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 저놈은 진화를 더 해도 별다를 게 없네.’
이번에도 보호막을 치고 버티는 오를란도를 휴고와 루스가 연신 두들기고 있었다.
저번에 확인한 바로는 놈에게 공격 기술이 생겼었는데, 사용할 틈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쩌저적-
계속된 공격에 보호막에 금이 갔다.
그러자 보호막을 다시 사용할 생각인지 놈이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다가가, 공격에 합류했다.
“대장, 잘 오셨습니다.”
열심히 망치를 휘두르던 휴고가 기뻐했다.
오를란도의 징그러운 방어력에 조금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휴고와 눈빛이 마주치며 말 없는 신호가 오갔다.
그리고.
“죽어라!”
휴고가 망치를 휘둘렀다.
그 순간에 맞춰 나도 검을 휘둘렀다.
‘멸세폭.’
콰콰콰콰콰콰쾅-!
양쪽에서 밀려드는 강력한 폭발에, 가운데 낀 오를란도의 보호막이 터져 나갔다.
그러고도 남은 멸세폭의 충격이 놈의 전신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크억…… 지키는 자의…… 컥!”
그 와중에도 다시 주문을 외려는 오를란도의 목을 재빨리 다가온 루스가 베어 버렸다.
그러더니 클로의 피를 털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으, 이놈 징그러워.”
루스도 이제 오를란도가 지긋지긋한 모양.
모처럼 셋이서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에임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구원자님.”
“아닙니다. 그보다 에임든 님, 잠시 할 일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치고 나는 죽은 영웅들의 사체로 다가갔다.
그리고 하나하나 아이템을 추출했다.
이제 란슬롯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제껏 나온 것은 붉은 보석뿐이었다.
‘죄다 꽝이군. 저놈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별 기대 없이 란슬롯의 사체로 다가가 아이템 추출을 사용했다.
그런데.
“헉!”
기대치 않았던 결과에 나는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 * *
[아론다이트(S. 장검)]
- 화룡의 목을 벤 명검. 절대 이가 빠지지 않는다. 칼날에 스며든 저주받은 화룡의 피로 인해 모든 종류의 보호막을 무시하고 피해를 입힌다.
* * *
“이게 진짜 나올 줄이야.”
나는 아론다이트를 주워 들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하필 불의 검을 구하고 나서 곧바로 이게 또 나오다니.’
보호막을 뚫는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평소에 사용하기에는 불의 검 쪽이 더 낫다.
‘그래도 확실한 쓰임새가 한 가지는 있겠어.’
이제 바퀴벌레처럼 질긴 오를란도를 빠르게 처리할 방법이 생긴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왠지 기분이 좋아져, 나는 피식 웃으며 루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영웅에게서 추출된 붉은 보석을 루스에게 내밀었다.
“자, 간식이다.”
그러자 루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이거 이제 질리는데…….”
그 말에 일순 놀랐지만,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루스도 발록을 먹고 한층 더 성장했다.
그 탓에 이제 영웅들이 뱉어 내는 보석이 더 이상 끌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보석은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나는 잠시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이것들을 어디다 쓰나?’
영웅뿐만 아니라 황가수호대에서 나온 것들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저것들을 활용할 방법을 언제고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장 정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기에 일단은 머리 한구석에 미루어 두었다.
* * *
* * *
잠시 후, 우리는 에임든의 인도하에 다시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목적지는 진형기가 있는 도시국가 블룸폰테인이었다.
타다닥-
쉴 새 없이 숲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재앙이 정화된 엘프의 숲에는 싱그러운 기운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바쁜 마음으로 길을 서두르고 있는데, 아슬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 구원자님, 큰일 났어요. 또 나타났어요!
- 무슨 일입니까? 침착하게 설명해 주세요.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저번에 그 탑이 또 나타났어요. 어떻게 해요?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 때문에 이렇게 서둘렀는데도 좀 늦는 모양이었다.
- 저번처럼 사람들을 피신시키십시오. 제가 가서 해결하겠습니다. 혹시 탑 주위에 있는 놈들의 병력 상황이 어떻습니까?
- 붉은 옷을 입은 자들이 잔뜩 있어요.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 다른 자들은 없습니까?
혹시 황가수호대만 보낸 건가?
- 네, 붉은 옷을 입은 자들만 있어요.
‘그렇단 말이지.’
아마 내 쪽에는 영웅들을 보내고, 엘프 마을에는 황가수호대를 보내 탑을 설치하게 한 모양이었다.
영웅을 소환하는 것이 관리자에게도 부담되는 일이라는 느낌이 갈수록 더 강하게 들었다.
- 최대한 서둘러 갈 테니, 섣불리 공격하지 말고 천천히 물러나세요.
엘프 마을의 전력으로는 황가수호대가 에워싸고 있는 탑을 부술 수 없다
성공하더라도 막대한 희생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다 내 힘이 될 사람들인데.’
머지않아 있을 관리자와의 싸움을 생각하면 무조건 많은 사람을 살려 둬야 했다.
그것이 내가 세운 계획의 핵심이었으니까.
아슬라와 대화를 끝내고 에임든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최대한 빨리 안내하겠습니다.”
자신의 마을이 또다시 침략을 당하자 에임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력을 다하는지, 에임든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굉장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그 덕에 갈 때 닷새가 걸렸던 거리를 이틀 만에 주파했다.
한숨도 자지 않고 달린 결과였다.
“헉, 헉……. 구원자님, 헉,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허억-.”
마을 근처에 이르자 에임든이 간절한 표정으로 외치더니 철퍼덕 주저앉았다.
오는 길에 잔뜩 무리한 탓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에 비해 우리 일행은 멀쩡한 상태였다.
이제껏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성장한 것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니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슬라가 마을 사람들을 잘 대피시킨 모양이니, 그쪽도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돌아오는 중에도 나는 아슬라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다행히 빠르게 대처한 덕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이제 탑만 처리하면 당장은 한숨 돌릴 수 있다.
“가자!”
일행을 이끌고 탑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머지않아 탑으로부터 강한 흡력이 느껴졌다.
몸속의 기운을 강제로 빨아들이려는 느낌이 들어 굉장히 불쾌했다.
“마력을 끌어 올리면 저항할 수 있어.”
저번에 탑을 파괴할 때 익힌 요령을 일행에게 전달하며, 나도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탑에서 작용하던 흡력이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음, 이거 엄청 찝찝한 느낌이네요, 대장.”
휴고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마력을 잔뜩 끌어 올렸는지, 몸에서 강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래, 꼭 그날 느낀 것과 비슷하지?”
제국 수도가 망하던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휴고도 대번에 알아들었는지 껄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부숴 버리죠, 대장.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맞다. 저 탑은 빨리 부술수록 좋다.
탑에서는 지금도 붉은 기운이 하늘로 쏘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수도가 있는 북쪽으로 전해지는 중이었다.
“그래, 빨리 처리하자.”
그렇게 일행과 내가 좀 더 접근하자, 이윽고 탑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