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100화>
붉은색을 띤 둥그런 구슬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거대 화염 슬라임의 핵(S. 재료)]
예상대로 화기를 강하게 띠고 있는 S급 재료 아이템이었다.
“주인! 주인!”
아니나 다를까, 루스가 입맛을 다시며 연신 나를 부른다.
나는 슬라임의 핵을 녀석의 입에 던져 넣어 주었다. 그리고 뒤쪽으로 돌아가 드워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드워프들이 동굴로 진입을 시작했다.
“벌써 불러들여도 될까요?”
어느새 다가온 휴고가 드워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 여긴 방금 그놈 하나뿐이니까.”
이번 구역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는 방금 잡은 거대 슬라임이 유일하다.
따지고 보면 완전히 격리된 공간에 몬스터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둘이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군.’
첫 구간에서 잡은 라바 골렘과 이번에 잡은 슬라임을 떠올리며 든 생각이었다.
둘 다 핵이 존재하고 비정형의 물질이 그것을 둘러싼 구조였다.
‘흐음, 그럼 기운이 뭉쳐서 자연 발생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드워프들도 모두 이쪽으로 건너와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 봉인을 향한 행군이 다시 시작되었다.
얼마 후 우리는 다시 통로를 매운 검은 광석 앞에 서 있었다.
“작업을 시작하라.”
일족의 부하들에게 작업을 지시한 드워프 왕이 내게 다가왔다.
“자네들이 들어가고 나면, 여길 다시 막는 수밖에 없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드워프 왕은 곧 한숨과 함께 이어 설명을 해 주었다.
“아는지 모르겠네만, 이 안은 이제껏 지나온 통로들과는 다르다네. 그 안은 아주 넓고, 또한 수많은 몬스터가 살고 있지.”
하지만 그것은 회귀 전에 이미 겪어 봐서 알고 있는 일.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희가 들어가면 일단 막아 두십시오. 제가 듀에르가와 언제든지 대화가 가능하니, 일이 끝나면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맙네. 듀에르가와 함께 입구를 다시 뚫을 몇 명을 남겨 두고 가겠네. 자리를 계속 비울 수가 없어서 나는 기다려 주지 못하겠군.”
“예, 괜찮습니다. 길을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드워프 왕은 두꺼운 손으로 내 등허리를 툭툭 두드려 주고 돌아섰다.
단단하던 그의 태도가 제법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 * *
다시 꼬박 이틀의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통로가 거의 뚫렸다.
이번에도 듀에르가가 다가와 그 사실을 내게 전했다.
“알겠어. 지금 바로 출발하지. 길을 열어 줘.”
“그래, 지금 당장 뚫어 주지.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친구. 몸조심하고.”
우리는 듀에르가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 봉인 너머로 들어섰다.
“우와! 엄청나네요.”
휴고가 대번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드워프 왕의 말대로, 이곳은 더 이상 통로가 아니었다.
한쪽에는 용암으로 된 강이 흐르고 있고, 반대편에는 삐쭉 솟은 바위 숲이 펼쳐져 있었다.
붉은빛이 도는 커다란 세상이 이곳에 외따로 존재했다.
“그래, 넓긴 엄청 넓구나.”
나 역시 눈앞에 펼쳐진 경관에 감탄하고 있는데, 루스가 내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주인, 저기 저놈!”
돌아보니 멀리 흐르는 용암에서 라바 골렘 한 마리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암의 강을 빠져나온 놈은 우리를 보고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들어오자마자 몬스터가 나타나는 걸 보니 역시나 이곳에 몬스터가 많긴 한 모양이다.
“대충 처리하고 빠르게 이동하자.”
말과 함께 놈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일행도 각자의 방법으로 놈에게 공격을 가했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라바 골렘이 쓰러졌다.
그리고.
“냠, 맛나다.”
골렘은 용암 파편으로 화해 루스의 간식이 되었다.
루스는 이곳에 온 이후로 불 속성을 띤 아이템이 많이 나와 한껏 신나 있었다.
“먹는 건 좋은데, 얼른 가자.”
용암 파편을 사탕처럼 녹여 먹고 있는 루스를 데리고 빠르게 길을 재촉했다.
굉장히 넓은 공간이지만, 이미 한 번 가 본 길.
정확히 방향을 잡고 일직선으로 달려 나갔다.
‘회귀 전에는 고생 꽤나 했었는데.’
이 넓은 공간을 소환 영웅들과 함께 며칠이고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잡지 않아도 될 수많은 몬스터를 때려잡아야 했고, 밤을 지새워 가며 전투에 전투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의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번에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 언덕 위에 돌로 지어진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가 목적지야. 여기서 좀 쉬고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근처에 털썩 앉았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마주친 몬스터들은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지나쳐 왔다.
잡는다고 해서 큰 이득도 없었고, 세계의 정수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덕분에 크게 지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쉬어 가려는 것도 체력 회복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놈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부스러기 하나뿐일 텐데…….’
막상 목표가 눈앞에 보이니, 이제껏 묵혀 왔던 고민이 자꾸만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캐서린은 도대체 뭐지? 아니, 캐서린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군.’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계속 고민만 깊어졌다.
머리를 좀 식힐까 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휴고와 루스도 생생한 모습.
그래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만 가자. 다 끝내고 쉬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다.”
“저도 딱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장.”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휴고가 냉큼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루스도 불만 없이 바닥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아무래도 쉬기에 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언덕을 올라 신전 앞에 다다랐다.
돌로 지어진 신전은 이곳저곳 낡아 부스러져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입구에는 두 개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검은 얼룩이 드문드문 묻어 있는 모습.
머리는 새의 모양을 하고 몸은 인간의 모습을 한 병사의 석상이었다.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길고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자못 위협적이었다.
나는 석상을 향해 다가가며 일행에게 말했다.
“힘 적당히 써. 안에 들어가야 진짜 싸움이 시작되니까.”
그 순간 석상이 부르르 떨리더니,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고일.’
놈의 정체를 속으로 되뇌며 빠르게 놈에게 달려들었다.
가고일의 큰 낫이 내게 휘둘러져 왔다.
나도 여의검에 강기공을 잔뜩 끌어 올려 마주쳐 갔다.
쾅-
여의검에 실린 강력한 힘에 낫이 뒤로 튕겨 나가며 놈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나는 그곳을 향해 검을 찔러가며 스킬을 사용했다.
‘멸세폭.’
놈의 가슴이 단번에 터져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털썩.
가고일 한 마리를 처리한 나는 재빨리 고개를 일행에게 돌렸다.
휴고와 루스도 나머지 가고일을 연신 몰아붙이고 있었다.
스팟-
나는 곧바로 점멸을 사용해 가고일의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놈의 등을 향해 다시 한번 멸세폭을 날렸다.
한차례 폭음이 더 울려 퍼졌다.
이번에도 가고일은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그 모습에 휴고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 왔다.
“저, 대장. 힘을 아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 쓸데가 있어서 그래.”
휴고에게 대답하며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그리고 일행에게 손짓했다.
“너희는 여기 좀 앉아서 기다려.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나는 아이템 추출도 하지 않은 채,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공터로 향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멸세폭.’
공중에서 터진 폭발에 땅거죽이 뒤집혔다.
그리고 멸세폭의 반동이 차곡차곡 원혼의 거울에 쌓여 갔다.
나는 중간중간 포션을 마셔 가며 작업을 반복했다.
그리고 15분쯤 지났을 때, 작업을 멈추었다.
뒤로 갈수록 몸에 부담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사용한 후 다음번까지의 시간도 갈수록 길어졌다.
결국 어느 순간이 되자, 더 이상의 축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신전 쪽을 슬쩍 바라봤다.
‘한 방에 죽어 줘야 할 텐데.’
안에서 기다릴 놈을 생각하며, 나는 마지막으로 포션을 마시고 짧은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우리는 신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신전 안의 벽에는 흉물스러운 그림들이 가득했다.
머리에 뿔이 돋은 악마들이 사람을 찢어 삼키는 모습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난잡한 벽과는 대조적으로 공간 자체는 텅 비어 있었고, 맞은편 끝 쪽에는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위에는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몸을 가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몸에는 검은 재앙의 기운이 연기처럼 맴돌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중.
나는 놈을 노려보며 일행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언제 합류해야 할지는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이제껏 수많은 싸움을 함께해 왔다.
그래서인지 녀석들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놈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상태, 미동도 없다.
‘조금만 더 그대로 있어라.’
나는 회귀 전의 기억으로 놈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우리가 이곳에 들이닥쳤을 때에도 놈은 태만한 자세로 우릴 맞이했다.
먼저 공격을 당하기 전까지 턱을 괸 채 움직이지도 않았었다.
이번에도 내가 노리는 것은 놈의 태만함.
그런데 회귀 전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이제 왔나? 빨리 좀 끝내 줘. 미적거리지 말고.”
“뭐?”
내가 놀라 되물었을 때.
놈은 턱을 괴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가리켰다.
“여기. 여길 찔러.”
‘이게 무슨!?’
나는 그 모습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놈이 가리키는 곳은 정확히 놈의 심장이 있는 위치.
저곳이 놈의 약점이었다.
놈이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도저히 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놈은 턱을 괸 손을 여전히 풀지도 않은 상태였다.
“어서 여길 찌르라고. 물론 그걸로 끝은 아니야. 뭐 그래도 나한테는 끝이겠지. 그 이상의 기억은 없을 테니.”
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종잡을 수 없는 태도와 말이 내 머리를 어지럽혔다.
‘도대체 무슨 짓이지?’
그때 놈이 외쳤다.
“빨리 좀 하자고! 구원자.”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놈이 이상 행동을 보이지만, 깊이 생각하고 있을 여유가 내겐 없다.
머리를 휘저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서 왼손을 들어 놈의 가슴 정중앙을 겨냥했다.
그리고 곧이어 원혼의 거울을 발사했다.
번쩍-!
강력한 광선이 쏘아졌다. 여러 번 축적한 수고가 아깝지 않은 위력이었다.
츠지지직-
놈의 가슴에서 녹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잠시 후, 구멍이 뻥 뚫리며 피가 쏟아졌다.
풀썩-
의자 아래로 놈의 몸이 미끄러져 내렸다.
놈은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진 상태.
가슴에서 새어 나온 피가 놈의 상체를 적시고 바닥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며 뒤로 슬쩍 물러났다.
‘이제 시작이다.’
놈의 피가 점점 퍼져 바닥에 한바탕 고인 순간.
갑자기 후루룩하고 다시 놈의 몸 쪽으로 피가 빨려 들어갔다.
그러더니 놈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찌이이익-
뼈 부러지는 소리와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놈의 피부가 반쯤 식은 용암처럼 검붉게 빛났다.
놈의 덩치는 아까 전보다 더 커져, 키가 7미터는 되어 보였다.
‘지금 공격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군.’
적의 변신을 기다려 주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
하지만 회귀 전 이미 놈이 변신할 때 공격을 가해 보았다.
그때 공격을 했던 영웅은 빈사 상태가 되었다.
공격을 당한 순간 놈의 몸에서 일어난 폭발 때문이었다.
결국 캐서린이 신성력을 한참이나 퍼부어 소환 영웅을 겨우 살려 내었던 기억이 있다.
잠시 후 놈이 몸을 일으켰다.
두 눈이 시뻘건 귀화를 피워 올리고 있다.
“발록.”
내가 놈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변신은 계속 진행되었다.
머리 양쪽에 두 개의 굵은 뿔이 자라났다.
어느샌가 놈의 손에는 불로 만들어진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그리고 마치 화룡점정인 양, 등 뒤에 한 쌍의 날개가 불타올랐다.
“주, 죽은 거 아니었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휴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놈은 원래 한 번 죽어야 본모습을 드러낸다. 조심해. 발록은 드라코리치만큼 강하다.”
물론 드라코리치를 잡고 난 후 우리도 더 강해졌다.
때문에 나는 노즈도름과 옛 친구가 없더라도 승산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캐서린의 말이 있더라도 휴고와 루스를 이곳으로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크와와아아앙-
발록의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변신을 마친 놈에게 더 이상의 지성은 없다.
이제 눈앞의 적을 말살하는 괴물만이 남았다.
표효를 끝낸 발록이 내게 검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