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97화>
* * *
잠시 후, 나는 일행과 함께 드워프 왕의 거처에서 나왔다.
옆에는 처음에 우리를 안내했던 드워프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듀에르가.
우리 일행이 이곳에 있는 동안 안내인 겸 감시 역으로 함께할 예정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훌륭한 대장장이이면서 뛰어난 전사이기도 하다는 드워프 왕의 칭찬이 있었다.
“이봐, 듀에르가. 혹시 이곳에 구원자의 전설 같은 건 전해 내려오지 않나?”
라로프에서도 그랬고, 엘프들에게도 그랬지만, 구원자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곳에서는 비교적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귀찮기는 할지언정, 사람 상대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
그런 곳에서는 대부분 세계의 정수를 보고 나면 고분고분해지고는 했었다.
그런데 드워프 쪽은 영 마음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어, 혹시나 하고 물어본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없는데. 우리는 이곳으로 이주한 지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아서, 딱히 전설 같은 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아.”
“그런가…….”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래, 그럼 당신들이 평소 사용하던 지하수 수맥으로 안내해 줘.”
듀에르가는 짧은 다리를 바삐 놀려 앞장섰다.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다시 한참을 가자, 커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에는 시커멓고 불길한 빛이 돌고 있어, 보는 순간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오염되었군.”
“으음, 저런 상태면 도저히 못 마시겠는데요.”
휴고도 나와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겼다.
나는 앞에 있는 듀에르가에게 다가가 물었다.
“듀에르가, 물이 이 모양인데 이제껏 식수는 어떻게 해결했나?”
“물이 이렇게 된 지는 며칠 지나지 않았어. 그동안은 밖에 나가서 물을 길어 오곤 했지. 자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곧 무슨 수를 썼어야 할 상황이었다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휴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 재앙의 기운이 퍼진 건 이미 오래전 일이 아닙니까? 이제껏 괜찮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니, 좀 이상한데요.”
“그래, 이상하구나. 그리고…… 몬스터나 생명체가 오염되는 것은 봤어도, 물이 오염되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그것도 그렇네요. 어머니 나무가 오염된 엘프들도 물은 잘만 마시고 있었는데…….”
얼마 전 들른 엘프들의 숲에서도 물이나 공기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좀 더 상류로 가 봐야 하겠어. 오염이 이곳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문제가 있어도 위쪽에 있겠지. 안내해 줘, 듀에르가.”
듀에르가는 지하수 옆의 암반을 따라 잘도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또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우리는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길이 아예 벽으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못 가. 가려면 구멍을 뚫어야 해.”
듀에르가가 앞쪽을 짤막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가 굴을 꽉 막고 있었고, 그 아래로 지하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부술까?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괜히 큰 충격을 가했다가 동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난감해하고 있던 찰나, 그를 눈치챘는지 듀에르가가 말을 건넸다.
“가고 싶으면 내가 뚫어 줄게.”
그 말을 듣자 내 머릿속도 같이 시원하게 뚫렸다.
‘그래, 드워프들에게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
이곳 동굴의 드워프들은 굴을 파고 길을 내는 것에 전문가.
애초에 이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한 것도 그것이 이유였는데, 눈앞에 사건에 너무 집중하느라 잊어버리고 있었다.
“얼른 뚫어 줘, 듀에르가.”
내가 부탁하자 듀에르가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배낭에서 자기 머리만 한 드릴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기운을 주입하자.
우우웅-
드릴이 진동하더니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날 끝에는 어느새 새파란 오러가 생겨난 상태.
듀에르가는 드릴을 들고 곧바로 바위로 향했다.
가가가각-
드릴이 바위에 닿자, 거친 소음과 함께 바위가 깎여 나갔다.
오러에 둘러싸인 날은 드릴의 크기보다도 훨씬 더 큰 구멍을 뚫어 내고 있었다.
30분쯤 지나자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한 통로가 만들어졌다.
“여기부터는 나도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조심하라고, 친구.”
듀에르가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 걸었다.
그러면서 스킬 ‘식수 탐색’을 발동했다.
‘이것도 써먹을 일이 있긴 있군.’
그러자 사방에 존재하는 물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바로 옆으로 흐르는 지하수는 먹을 수 없다는 느낌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상류로 갈수록 더 강해졌다.
‘역시 위쪽에 뭔가 재앙의 기운을 내뿜는 것이 있어. 그래서 물이 계속 오염되고 있는 거야.’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물줄기를 따라 오르는 일.
우리는 계속 지하수를 따라 나아갔다.
그 와중에 듀에르가가 몇 번이나 나서서 통로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길을 뚫느라 걸리는 시간도 있다 보니, 진행은 상당히 더뎠다.
꼬박 하루가 다 되어 갈 때에야 이제까지와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수네요. 지하에 이런 곳이…….”
휴고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눈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비록 오염되어 좋지 못한 기운을 풍기고 있지만, 이곳이 지하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주인, 저기 뭐가 있어.”
그때 루스가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검푸른 색을 띤 무언가가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마치 사람 모양으로 만든 젤리가 수면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건…… 설마 정령인가?’
노즈도름의 레어에서 땅의 정령이 오염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
다만 이번에는 물의 정령인 것 같았다.
물이 오염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며칠 전까지 오염에 저항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재앙의 기운에 버틸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옛 친구와 노즈도름이 그랬듯이.
“물의 정령이다. 아주 강한 놈이야. 조심해.”
일행에게 말을 남기고, 정령에게 가까운 쪽을 향해 조심스레 호숫가를 걸었다.
어느 순간, 정령이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섰다.
그러자 놈의 모습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원래 파란색이어야 할 몸의 곳곳에 검은 반점이 생겨나 있었다.
몇 걸음 더 다가가자 정령이 양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호수의 물이 대포처럼 덩어리져 쏘아졌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건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지만, 정령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펑, 펑!
나는 날아오는 물덩이를 검을 휘둘러 터트리며 정령을 상대할 방법을 궁리했다.
정령은 기운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
강한 충격을 누적시켜 기운을 흩어 버려야 처치할 수 있다.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놈이 물 위에 떠 있으니, 상대하기가 영 껄끄럽군.’
일단 물 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은 일행 중 나밖에 없다.
“너희는 방어에 집중해. 공격은 내가 할 테니.”
일행에게 말을 남기고 나는 바로 점멸을 사용했다.
스팟-
목적지는 정령의 바로 옆.
나는 공중에 뜬 상태로 놈에게 멸세폭을 날렸다.
콰콰콰콰쾅-!
강한 폭발이 일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하지만 멸세폭이 적중하기 직전, 놈의 몸 주위에 물로 이루어진 벽이 솟아나 공격을 막아 내었다.
‘점멸.’
콰앙!
내가 점멸로 다시 몸을 피하자, 그곳 수면에서 사람 허리통만 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물줄기는 천장을 후려치고서야 멈출 정도로 거세었다.
온 호수가 놈의 무기나 다름없는 상황.
나는 점멸을 거듭 사용, 위치를 계속 이동하며 놈에게 공격을 가할 틈을 찾고 있었다.
“주인!”
그때 루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힐끔 돌아보니 녀석이 양손을 정령에게 내뻗고 있었다.
그리고.
콰르르르르-
새파란 불줄기가 정령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곧 정령의 앞에 물로 만든 벽이 솟아올라 불줄기를 막아 내었다.
치이이익-
불과 물이 만나 수증기를 잔뜩 피워 내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점멸을 써 정령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곧바로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멸세폭!’
루스의 공격 덕분에 정령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콰콰콰콰쾅-!
멸세폭이 정확히 정령의 몸통을 후려쳤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정령의 몸이 퍽 하고 터지더니 이내 물로 변해 호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조금 옆쪽의 수면에서 물줄기가 쑥 솟아올랐다.
그러더니 금세 다시 원래의 형체를 갖추었다.
‘역시 이 정도 충격으로 없앨 수는 없겠지.’
아무래도 놈을 처치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내가 각오를 다지며 다시 점멸을 사용해 놈에게 다가가려 할 때, 이전과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놈의 몸에 있던 검은 반점의 수가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세히 살피자,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령이 더 이상 공격을 해 오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점멸.’
나는 일단 일행 쪽으로 물러나 정령을 가만히 바라봤다.
“주인, 쟤 좀 이상해.”
정령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루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혹시 충격으로 정신이 돌아온 것 아닐까요?”
왠지 그럴듯해 보이는 휴고의 말이었다.
내가 생각에 잠기자 휴고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정신이 돌아온 거면, 처치하지 않고 해결할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휴고의 말대로였다.
정령이 이성을 되찾은 상태라면, 세계의 정수로 정화를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우웅-
그때 호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떨림은 한동안 이어지더니,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변했다.
“도오……와…… 주…….”
정령의 얼굴은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몸은 여전히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
나는 그 모습에 정령이 이성을 되찾았음을 확신했다.
얼른 인벤토리에서 세계의 정수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예의 경우와 같이 정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한동안 떨림을 유지하던 정수에서 한 가닥 새파란 기운이 뻗어 나가, 정령의 몸에 연결되었다.
부르르-
그러자 정령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온 호수의 물이 요동치며 들끓어 올랐다.
우리는 호숫가에 선 채로 그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세계의 정수가 떨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연결된 기운이 사라졌다.
나는 정수를 인벤토리에 돌려놓고, 물의 정령을 응시했다.
정령의 몸은 어느새 청아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후, 호수의 수면이 잘게 떨리며 소리가 전해져 왔다.
이전보다 훨씬 더 명확해서, 확실히 언어라고 불러도 좋은 소리였다.
“고마워요. 당신이 내가 기다리던 구원자로군요.”
정령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드워프에겐 안 전해졌는데, 정령에겐 또 구원자의 전설이 전해졌다. 혹시 정령에게 역할이 주어진 건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얼른 정령에게 대답했다.
“내가 구원자인 것은 맞을 겁니다. 당신은 물의 정령이 맞습니까?”
정령의 물로 만들어진 몸이 수면을 미끄러져 호숫가로 다가오는 것과 동시에 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나는 물의 정령이에요.”
“혹시 이곳의 물을 정화할 수 있습니까?”
정령을 정화한다는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긴 했지만, 처음의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
“제가 재앙의 기운에서 벗어났으니, 물은 자연히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물론 당장 깨끗이 만들 수도 있고요.”
그러더니 정령이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정령의 주위에 있던 호수의 물이 깨끗한 푸른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기운을 되찾은 지 얼마 안 되어 힘에 부치는 모양.
잠시 후 정화를 멈춘 정령이 말을 이었다.
“아직은 힘이 부족해요.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면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어요. 다른 부탁은 없나요? 당신이 나를 구해 주었으니, 나는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른 정령에게 대답했다.
“그럼 저와 계약해 주십시오.”
눈앞의 정령을 부릴 수 있다면, 전력에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은 정령사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아요.”
나는 정령의 동의를 얻자마자 스킬을 사용했다.
‘계약.’
[대상과 특별한 유대를 형성합니다. 대상을 선택해 주세요.]
[지정 가능 대상 : 듀에르가, 워젤]
한데 뜻밖에도 지정 가능 대상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드워프인 듀에르가도 계약의 대상이 될 수 있지.’
하지만 아직 시도하기는 좀 섣부른 감이 있었다.
듀에르가와는 제대로 호감도를 쌓은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일단은 물의 정령에 집중하기로 했다.
‘워젤.’
물의 정령의 이름을 선택하자, 계약이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