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95화>
“으으, 이건 좀 심하네요.”
휴고가 어깨를 주무르며 내게 다가왔다.
오를란도를 그 꼴로 만든 당사자 중 한 명인 주제에 마치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놈은 워낙 질겨서 이렇게라도 해야 죽지.”
“그렇긴 한데, 어째 전보다 더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휴고의 의문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던 것보다 더 위 단계의 진화가 존재하는 것 같아. 굳이 따지자면 4단계인 셈이지.”
“헉, 그럼 앞으로 상대하기 만만치 않겠군요. 이번에는 그나마 대장이 광선으로 쓸어버려서 다행이지.”
휴고의 말이 맞았다.
4단계 진화를 마친 놈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면,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지만, 당장 고민해도 의미가 없었다.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일단 수학을 위해 킨조른에게 다가가 ‘아이템 추출’을 사용했다.
녀석은 이제까지와 별다를 바 없는 붉은 보석을 떨어트렸다.
다만 한 단계 더 강해진 상태라 그런지, 보석이 가진 기운이 더 정순해 보였다.
‘장비 아이템이 좀 나와 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껏 ‘아이템 추출’을 사용해 본 결과 장비류가 나올 확률은 몹시 낮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곧바로 다음 대상으로 다가갔다.
‘본 게임은 이놈이지.’
나는 오를란도의 주검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나와라…… 제발 나와라, 듀랜달!’
듀랜달이 나오면, 아마도 여의검은 인벤토리행이 되지 않을까?
김칫국을 한 사발 마셔 가며 ‘아이템 추출’을 실행한 결과.
뭐가 나오긴 나왔는데…….
[수호자의 신념(S. 비약)]
- 성검 듀랜달의 기운이 검의 주인을 위해 오랜 시간 모여 만들어진 비약. 상처 회복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다.
“음, 이것도 나쁘진 않은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괜히 실망스러웠다.
그때, 내 앞에 떨어진 비약을 보며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대장? 비약 종류 같은데.”
그러고 보니, 수호자의 신념에는 상당히 고마운 기억이 있다.
다름 아니라 휴고의 부활에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 물건이 아닌가.
나는 수호자의 비약을 휴고에게 던져 주었다.
“이거 네가 보관하고 있어. 너랑 인연이 깊은 물건이니.”
“네? 인연이요?”
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템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헉! 이거 엄청 좋은 거 아닙니까?”
사실 휴고의 말대로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 맞다.
하지만 내게는 엘릭서가 있으니, 유사시를 대비해서라도 굳이 내가 전부 다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때 에임든이 조심스레 전장에 고개를 내밀었다.
“구원자님, 무사하십니까? 탑은…… 무너졌군요!”
“네, 이제 끝났습니다, 에임든. 근데…….”
기뻐하는 에이든에게 상황을 정리해 주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만약 끝이 아니라면?
‘혹시 이런 탑이 잔뜩 있는 건 아닐까? 온 대륙에 탑을 뿌려서 기운을 흡수하면 어떻게 되지?’
그럴 경우 과연 막을 수 있는가?
막지 못할 경우 관리자의 회복이 빨라질 것은 자명한 사실.
‘결국 빠르게 정수를 모으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시간 싸움이었다.
일단 탑이 단 하나밖에 없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랬다면 탑을 좀 더 신중히 운용했을 테니까.
‘더 만드는 데에 시간이 걸리기를 바랄 수밖에. 일단 지금 다른 곳에 더 나타났는지 좀 살펴봐야 하겠군.’
생각을 마친 나는 아슬리에게 말을 걸었다.
- 아슬리 님, 일단 탑을 파괴했습니다. 마을은 이제 안전합니다.
- 아! 정말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구원자님. 정말 고마워요!
- 근데 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 근처 다른 마을로 가서 그곳은 무사한지 좀 알아봐 주십시오. 그런 탑이 또 있을까 걱정되는군요.
- 헉! 그렇네요. 그게 또 있으면 진짜 큰일이에요. 당장 다녀올게요.
그렇게 아슬리를 보내 놓고, 이번에는 옛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 옛 친구님.
- 해수, 무슨 일이에요? 혹시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요?
예상대로 옛 친구는 농담을 건네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받아 줄 상황이 아니었다.
- 세 개 국가에 모두 연락을 해서, 주변에 탑이 설치되지 않았는지 확인하게 하세요.
- 탑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 탑이 뭐냐면…….
나는 탑의 생김새와 그 기능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줬다.
그러자 옛 친구도 목소리에 가벼운 기색을 지운 채 응답해 왔다.
-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요. 그런데 해수,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 저는 원래 계획한 대로 서둘러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쪽에서도 탑이 생기면 어떻게든 부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놓으세요.
- 으음……. 알았어요.
옛 친구의 목소리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탑 주위를 감싸고 있던 병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
‘그래도 아직은 소환 영웅을 마음껏 뽑지는 못하는 것 같아 다행이군.’
이제껏 보였던 숫자를 생각하면, 영웅을 뽑는 데 제한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황가수호대는 그렇지 않았다.
최근 일행이 많이 강해지는 바람에 황가수호대가 만만한 느낌이지만, 원래 놈들은 마스터를 상회하는 실력자들.
황가수호대가 떼로 몰려들면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터.
‘다른 곳에도 탑이 설치되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지 않고는 파괴할 수 없을 거야.’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어쩔 수 없다.
발을 빨리 움직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
“에임든 님,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예, 최대한 빠르게 안내하겠습니다.”
사태의 심각함을 느낀 에임든이 지체 없이 앞장섰다.
* * *
닷새 후 우리는 드디어 일차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예상보다 상당히 이른 시간이었다.
워낙에 빠르게 길을 이끈 에임든 덕이기도 했고, 중간에 거쳐 온 마을에서 어머니 나무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생략한 때문이기도 했다.
의외로 어머니 나무를 당장 회복시키지 말자고 제안한 것은 에임든이었다.
“어차피 다시 오염되지 않습니까? 당장 기운이 탁하긴 하지만, 엘프들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는 시간이 좀 있습니다. 오히려 탑이야말로 더 큰 위협입니다. 그러니 구원자님은 빨리 할 일을 하십시오.”
엘프인 에임든이 먼저 그렇게 말하자,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부담을 던 채 목적지로 직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눈앞에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고생했습니다, 에임든 님. 얼른 마을로 돌아가 보세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구원자님.”
탑 때문에 마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상황.
아슬라에게 틈틈이 전해 들은 바로는 이주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당연히 마음이 급하기는 에임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 이 동굴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겁니까? 어째 후끈한 것이, 쾌적할 것 같지는 않네요.”
휴고가 영 불편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그의 말대로 동굴에서는 숨 쉬듯이 뜨거운 기운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여기 들어가야 하는 건 맞는데, 그다지 헤매지는 않아도 될 거야. 이곳 주민을 찾는 방법을 알거든.”
“하하, 역시 대장. 믿고 있었습니다. 저, 근데…….”
휴고는 웃다 말고 말꼬리를 흐리며 내게 뭔가 갈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뭔데 그렇게 말하다 마냐?”
“혹시, 이 뜨거운 열기도 해결하실 수 있습니까?”
녀석은 동굴에서 뿜어지는 더운 공기가 영 껄끄러운 듯 내게 물어 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까진 어쩔 수 없다.
“그냥 참아.”
나는 녀석에게 씩 웃어 보이며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안 뜨거운데?”
옆에서 루스가 해맑은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휴고도 별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2차선 도로 정도 너비의 동굴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나는 아무 방향이나 선택해, 발 닿는 데로 막 나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고, 나는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그러자 휴고가 슬그머니 물어 왔다.
“저, 대장. 제가 대장을 안 믿는 건 아닌데, 지금 너무 아무 데로나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정말 길을 알고 계신 겁니까?”
“그래, 안 그래도 이쯤에서 멈출 생각이었다.”
대답과 함께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고기를 꺼내었다.
“응? 나 주려고? 히히.”
루스가 고기를 보며 싱글벙글했지만, 아쉽게도 이건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음, 일단 넌 이거라도 먹고 있어.”
대신 나는 영웅에게서 나온 붉은 보석을 꺼내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럼 고기는? 주인이 먹을 거야? 엄청 많은데…….”
붉은 보석을 입에 날름 집어넣고도 고기까지 욕심을 내는 루스.
아쉬움 가득한 눈빛이 고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인벤토리에서 장작을 꺼내었다.
“루스, 이거 불 좀 붙이자.”
“아싸, 고기!”
녀석은 신나서 장작에 불을 붙였다.
잠시 후,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그 위에 고기가 올라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기 시작했다.
주위로 고소한 고기 냄새가 퍼져 나갔다.
“오오, 고기, 고기!”
루스가 노래라도 부를 기세로 흥얼거릴 때였다.
저벅-
멀리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고기 냄새가 확실해! 우리 땅에서 허락도 없이 고기를 굽다니, 내가 용서할 수 없지. 감히 내 맥주를 곁들이지도 않고 고기를 먹으려 드는 자,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장광설과 함께 땅딸막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찬 가죽 부대를 풀어 작은 손에 들고 외쳤다.
“맥주랑 나눠 먹자!”
“푸흡. 저, 저게 드워픕니까, 대장?”
희극적인 드워프의 등장에 휴고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생김새는 소설책의 드워프처럼 키 작은 근육질의 털보였다.
그런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아이 같았다.
그 모습에 휴고가 웃음을 터트렸지만, 드워프는 기분 나쁜 티도 없이 계속 맥주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드워프에게서 맥주를 받아 들며 웃었다.
“그래, 좋다. 고기와 맥주를 나눠 먹자, 친구.”
그러자 드워프가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치켜 올렸다.
“오오, 여기서 뭘 좀 아는 인간을 다 만나는군. 내 맥주는 최고야. 후회하지 않을 거야, 친구.”
그 후로는 왁자지껄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한동안 분주히 움직이느라 피로가 만만치 않게 쌓였었다.
딱 좋은 타이밍에 취한 식사와 휴식은 꿀맛이었다.
“야, 야, 땅딸보야. 천천히 먹어.”
“어이, 꼬맹이. 이래 봬도 우리 가문에서 최장신이야. 그런 헛소리 그만하고, 씹고 나서 삼켜. 말 시켜 놓고 막 삼키면 반칙이지.”
모처럼 루스가 적수를 만나 식사 자리는 더욱더 화기애애했다.
인벤토리에 고기는 넉넉했고, 드워프가 두 손 들 때까지 식사는 계속되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른한 휴식이 시작되었을 때, 이제까지와는 달리 차분한 태도로 드워프가 말했다.
“자, 이제 여기 온 목적을 얘기해 봐. 고기를 대접받았으니 웬만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할게.”
내 가슴에도 닿지 않을 작은 키의 드워프.
하지만 단단한 근육이 온몸을 갑옷처럼 둘러싸고 있어, 분위기를 잡자 자못 위압감이 느껴졌다.
맥주와 고기 기름이 잔뜩 묻은 턱수염도 이제는 적의 피를 바른 듯 강렬해 보였다.
‘역시 강하단 말이지.’
사실 드워프의 기세는 단순히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드워프는 내가 아는 한 이 세계의 모든 종족 가운데에서도 최고 수준의 강함을 자랑한다.
바로 그 강함이 지금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유를 잃지 않고 드워프에게 말했다.
“아마 당신이 결정하기 힘든 문제일 거야. 그러니 당신들의 ‘화로의 주인’에게 안내해 줘.”
내 말에 드워프의 표정이 굳었다.
“그 단어를 아는 것을 보니, 진짜 작정하고 온 모양이군. 왕을 찾아왔으니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지. 그럼 따라와,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