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90화>
사방을 살피며 미적거리고 있는 자가 보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진형기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플레이어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늑장 부리는 진형기를 그 일행이 재촉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됐어! 이제 됐어. 가자!”
그때 진형기가 소리치더니 갑자기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진짜 조울증이라도 생겼어요? 도대체 오늘 왜 이래요?”
“하하하, 어쨌든 이제 됐어. 오늘 일은 다 잘 풀릴 거야. 얼른 일 보러 가자.”
진형기와 그 일행 중 여자가 대화를 나누더니, 그들은 어디론가 바삐 이동했다.
그사이 휴고도 눈치챘는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대장, 저거 진형기 아닙니까?”
“맞아. 어째 엄청 자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여기 먼저 와 있었으니, 길잡이 찾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수완도 좋지 않습니까?”
휴고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진형기는 상당한 수완가였으니까.
비록 나 때문에 수도에서 일궈 놓은 사업은 홀라당 말아먹었을 것 같지만, 그동안 시간이 있었으니 여기서도 뭔가 해 놓았을 터.
“그러고 보니, 네 말이 맞아. 진형기가 또 나름 사람 구슬리는 재주는 있으니, 도움이 되겠어. 따라가 보자.”
“히잉……. 내 바압-.”
루스가 식당으로 직행하지 못하는 것에 못내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진형기를 쫓아가 보는 게 우선이었다.
결정을 내리고 막 진형기의 뒤를 따르려는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저것들은 뭐지?’
진형기 일행을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뒤쫓는 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그쪽을 보는 사이, 휴고도 그들을 발견한 모양.
휴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장, 저놈들 꼭 군인 같은데요?”
가만 보니 휴고 말대로였다.
제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절도 있는 발걸음.
이동할 때도 제식을 하듯 오열을 맞춘 모습이 군인처럼 보였다.
“맞아, 군인이야. 마스터급도 한 놈 있군.”
“그렇군요. 한 명은 제법 강해 보이네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휴고의 어조는 담담했다.
이제 마스터 정도에 흥분할 일행은 없었다.
어쨌든 그들까지 진형기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에 나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진형기 일행은 계속 이동하더니, 결국 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서야 그들의 걸음이 멈추었다.
울창한 열대 우림에 둘러싸인 숲길을 해치고 도착한 곳은 제법 큰 공터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군. 나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자를 싫어한다.”
“알아. 그래도 우리 사이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이쪽도 사정이 있었다고.”
진형기는 기다리던 자에게 넉살 좋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상대는 여전히 무표정.
“헉, 저, 저게 엘프입니까?”
그때 휴고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대로 진형기를 기다리던 자는 엘프였다.
흔히 책에 나오든 긴 귀에 아름다운 얼굴을 한 엘프 여성.
“그래, 엘프야. 어때, 예쁘지?”
“그, 그렇군요. 예쁘긴 예쁜데…….”
휴고가 영 애매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얼굴과 영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근육질의 몸 때문이다.
이곳의 엘프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식스팩은 기본, 팔뚝에는 타조 알을 하나씩 얹고 있다.
게다가 여성 엘프조차 키가 2미터를 넘는다.
그러니 평범한 심미관을 가진 지구의 남성이라면 딱 지금의 휴고 같은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저나 이렇게 엘프를 만나다니, 운이 좋군.’
내가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는 사이, 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진형기, 매번 그렇게 능글맞게 구는군. 어서 거래나 끝내자.”
시종일관 웃고 있는 진형기에게 엘프 여성이 말했다.
이쪽도 역시 한결같이 건조한 목소리를 유지 중이었다.
“알았어. 만날 때마다 꼭 그렇게 차갑게 굴더라.”
진형기도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거래라는 말이 나오자 더는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는 금세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그때, 이제껏 묵묵히 걷기만 하던 진형기의 남자 일행이 한 걸음 나섰다.
그러더니 대뜸 칼을 뽑아 들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일단은 보고만 있는데, 곧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그가 진형기를 향해 칼을 휘두른 것이다.
‘응!?’
내가 깜짝 놀라 손을 쓰려는 찰나, 무언가 느낀 진형기가 휙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역시 칼을 뽑아 일행의 칼을 막았다.
“크윽……!”
하지만 방어가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진형기의 팔에서 선혈이 튀고, 입에서는 신음이 흘렀다.
그때 휴고가 어딘가를 손짓했다.
“대장, 저놈들이 움직입니다.”
휴고가 가리킨 것은 이제껏 미행해 오던 군인들.
그들이 수풀을 헤치고 장내로 진입했다.
그때 진형기와 그를 기습한 자의 대화가 들렸다.
“시모어, 이게 무슨 짓이냐?”
“닥쳐, 이게 다 진형기 너 때문이야.”
어이없어하는 진형기를 향해, 기습을 한 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칼을 진형기에게 겨눈 채 연신 소리쳤다.
“네가 허튼짓만 안 했어도, 수도에서 쫓겨날 필요는 없었어! 그리고 엘프의 열매도 네놈이 다 차지할 속셈이잖아!”
“무슨 헛소리야? 열매는 순서대로 분배하고 있는데. 너도 알잖아!”
“닥쳐! 어쨌든 이건 다 너 때문이야.”
시모어란 자는 막무가내였다.
그리고 그때 군인으로 보이는 자들 중 마스터가 끼어들었다.
“시모어, 더 떠들 필요 없다. 약속대로 열매는 너에게 줄 테니 조용히 손이나 보태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군인들이 일제히 진형기 일행을 포위했다.
엘프와는 싸울 생각이 없는 듯, 거리를 두는 모습.
그것은 엘프도 마찬가지인지, 어느새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시모어, 이 미친 자식! 설마 열매가 탐이 나서 그런 거야?”
그때 진형기의 옆에 있던 여자가 꽥 소리를 질렀다.
시모어에 대한 배신감이 대단한 듯 보였다.
하지만 시모어는 군인의 시킨 대로 더 이상 여자의 말에 대거리하지 않았다.
대신 다친 진형기에게 칼을 겨눈 채 다가갔다.
이쯤 되니 상황 파악은 얼추 끝났다.
나도 검을 뽑아 들고 행동을 시작했다.
‘점멸.’
지체 없이 시모어의 바로 옆으로 이동한 후, 놈에게 칼을 휘둘렀다.
서걱-
놈은 애초에 내 한 수를 버틸 실력도 없었다.
게다가 점멸을 통한 기습이라 그런지 쇳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툭-
시모어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장내의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한동안 사방에서 놀란 눈빛이 쏘아지는 가운데,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진형기였다.
“역시! 내 감이 틀릴 리가 없다니까? 캬아, 생존왕 진형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네, 네놈은 뭐냐?”
그때 마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일행을 불렀다.
“휴고, 루스!”
그리고 군인 무리를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그러자 휴고와 루스가 재빨리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일행의 실력이라면 놈들을 처리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터.
나는 마음 놓고 진형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형기, 너는 또 왜 여기 있냐?”
“뭐 그딴 질문이 다 있소? 이게 다 당신 때문 아니오?”
진형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가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기는 했다.
수배범 신세인 내가 찾아가는 바람에 그 또한 쫓기는 몸이 되었을 테니.
“그래, 그날 일은 좀…….”
그런데 막 사과를 하려던 찰나,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하던 말을 끊고, 내용을 바꾸었다.
“아니지, 넌 나한테 고마워해라. 네 목숨 내가 살려 준 거야, 인마. 수도에 있었으면 넌 진작에 죽었어.”
지금 수도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진형기의 목숨을 구해 준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거, 사람이 그렇게 억지 부려서 되겠소?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황당하다는 듯 말하는 진형기를 보며 슬쩍 웃고 있는데, 곁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진형기, 이제 대충 정리도 된 거 같은데, 거래를 계속할 건가? 안 할 거면 나는 갈 거야.”
팔짱을 끼고 사태를 주시하던 엘프 여성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엘프의 말대로, 휴고와 루스가 벌써 군인들을 다 처리하고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마스터조차 일행의 실력에 얼마 버티지 못했는지, 별달리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진형기는 휴고와 루스의 실력에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태연한 얼굴로 엘프에게 말했다.
“당연히 거래해야지. 그러려고 온 건데. 자, 물건은 여기 있어.”
그러면서 가방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살펴보니 그것은 각종 포션과 치료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었다.
‘저걸 어디 쓰려고 그러지?’
엘프들에게도 저 정도의 물건은 충분히 있을 텐데?
의아함을 느끼는데 이번에는 엘프가 물건을 꺼내 진형기에게 건넸다.
그것은 초록색을 띤 주먹만 한 열매였다.
그 정체를 알고 있던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프의 열매잖아! 저걸 포션과 바꾸다니, 엘프 쪽에 뭔가 문제가 터진 게 분명하군.’
저것은 엘프 마을마다 한 그루씩 있는 나무에서만 열리는 열매였다.
인간이 먹을 경우, 높은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마력을 성장시켜 준다.
엘프들에게도 그리 흔하게 남아 도는 것은 아니어서, 인간이 쉽게 구할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진형기는 열매를 받고 흡족해했다.
그리고 엘프도 딱히 불만은 없어 보였다.
다만 조금 조급해 보였을 뿐.
‘진짜 무슨 일이 있나 본데…….’
의심이 거의 확신으로 변했다.
“다음은 사흘 후면 되겠나?”
“그래,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물건을 주고받은 그들은 다시 약속을 잡고 곧바로 헤어지려 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용무가 남았다.
나는 엘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잠깐 나와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모르는 자와 딱히 나눌 이야기가 없다.”
예상대로 딱딱한 반응. 엘프들은 인간에게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말을 했다.
“그걸 어디 쓰려는 거지?”
내 질문에 엘프의 표정이 굳었다.
“알 것 없다.”
분명 엘프가 원하는 것은 치료나 회복 효과를 갖춘 물건.
그럼 내게도 아주 좋은 것이 있다.
지금 엘프의 손에 들린 것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물건이.
나는 말을 더 하는 대신,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냈다.
그리고 엘프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진형기가 가져온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헉! 그, 그건 어디서 났지?”
“어디서 났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내 말에 움찔하던 엘프 여성은 이내 질문을 바꾸었다.
“……부탁이 뭔가?”
“일단 왜 이걸 원하는지부터 듣고 싶은데?”
캐서린이 분명 남쪽에서 정수를 완성할 수 있다고 했다.
엘프의 일이 그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엘프 쪽의 이변을 그냥 무시한 채 길 안내만 부탁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엘프는 결국 엘릭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무가 병들었다. 우리가 가진 약으로 치료가 되지 않아, 인간들의 물건을 구해 보는 중이다.”
엘프가 말한 ‘어머니 나무’는 좀 전에 봤던 엘프의 열매를 맺는 나무다.
한 마을에 한 그루씩 있으며, 단순히 나무가 아니라 정신적인 지주 같은 역할도 겸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프들은 어머니 나무가 뿜는 기운을 오래 접하지 못하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엘프의 숲에 묘한 기운이 흐르는 것도 아마 그 나무 때문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생각을 하는 중에 조급한 엘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든 마을의 어머니 나무가 검게 병들었다. 부디 그것을 나에게 다오.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마.”
엘프의 눈은 간절하게 엘릭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길잡이가 필요해.”
“길잡이 따위 내가 당장이라도 해 줄 수 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엘프는 엘릭서가 어머니 나무를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다급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화염의 지옥으로 간다. 일단 드워프에게 안내를 해 주었으면 좋겠군.”
내 말을 들은 엘프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그, 그곳은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가야 해. 그러니 안내를 하고 이걸 받을지, 아니면 네 갈 길을 갈지 정해라.”
나는 다소 강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온 숲의 어머니 나무가 병들다니. 아무리 봐도 재앙의 기운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엘릭서로 어머니 나무가 치료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다른 방법이 있다.
“엘릭서가 아니라도 내게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 지금 재앙의 기운을 치료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서 나뿐이야.”
굳이 세계의 정수를 꺼내 보여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실을 담아 강하게 뱉은 내 말투에 엘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계약을 걸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