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87화>
잠에서 깬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려 칼날 앞으로 가져갔다.
캉-
칼이 황제의 손짓에 튕겨 나갔다.
그 모습에 나는 내심 놀랐다.
‘맨손으로 내 칼을 막았다고?’
물론 목숨은 붙여 놓아야 하기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멸세폭을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강기공은 끌어 올린 상태였다.
그런 내 칼을 맨손으로 튕겨 낸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한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
황제는 칼을 막은 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나는 재빨리 왼손에서 강기공을 길게 뽑아 올렸다.
그리고 황제의 몸을 후려쳤다.
그러자 황제의 손에서 붉은 오러가 생겨나 강기공과 맞부딪쳤다.
콰쾅-!
황제는 나의 이번 공격도 피해 없이 막아 내었다.
그러더니 분노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놈, 정해수!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나는 놈의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놈을 무릎 꿇려 놓고 하면 된다.
대신 스킬을 사용했다.
‘점멸.’
놈의 뒤로 돌아간 후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챙-
황제가 재빨리 뒤돌아 내 공격을 막아 내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한 자루 검이 들려 있었다.
‘뭐지? 인벤토리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검 자체의 옵션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놈의 검에는 오러가 솟아나 있었다.
비쩍 마른 황제의 몸에서 마스터를 아득히 넘어서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강했다.
하지만 나는 황제의 강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 느낌이…… 그냥 인간과 별다를 바가 없어.’
이 모든 일을 꾸민 흑막이라면, 최소한 뭔가 다른 기운이 풍겨야 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냥 강하다는 느낌만 주는, 보통의 인간이었다.
끽해야 황가수호대나 소환 영웅 정도의 이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어느새 황제가 내게 검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이놈, 조각을 내놓아라!”
여전히 놈은 세계의 정수에 집착하고 있었다.
쾅-!
황제의 검과 내 여의검이 맞부딪쳤다.
강한 저항감이 검 끝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더 강하다.’
나는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음을.
그리고 황제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
놈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놈의 옆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인영이 갑자기 나타나 내게 오러를 날렸다.
나는 훌쩍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해 내고 소리쳤다.
“황가수호대! 역시 황제 네놈이 소환했었구나!”
“이 건방진 놈이 감히……! 절대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 말투에 기분이 상했는지, 황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나는 놈의 기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짜 다른 점이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일의 원흉이라기엔 황제의 태도가 너무 가벼웠다.
황가수호대를 소환한다는 것 말고는, 딱히 이 모든 일을 꾸밀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고민만 할 수는 없는 일.
일단은 놈을 제압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루스, 휴고. 이놈들을 맡아라.”
“응, 주인!”
루스가 얼른 황가수호대에 달려들었다.
“문은 어떻게 할까요, 대장?”
휴고는 누가 들어올 것이 걱정인지 당장 달려들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
“이미 조용히 처리하기는 글렀다. 그냥 대충 내버려 둬.”
“예.”
내 말에 휴고는 옆에 있는 테이블을 들어 문 앞을 막아 둔 다음 전투에 합류했다.
그사이 황제는 계속 웅얼거리며 주문을 외고 있었다.
그때마다 황가수호대의 숫자가 계속 늘어났다.
아무래도 역시 황제를 빨리 처리해야 할 듯했다.
“이얍!”
콰르르르르-
루스가 기합과 함께 불길을 내뿜었다.
피하지 못한 황가수호대 한 놈이 온몸이 불타 쓰러졌다.
콰콰콰콰쾅-!
어느새 합류한 휴고도 황가수호대에게 멸세폭을 날렸다.
이미 바닥에 흥건한 핏물이 휴고에게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휴고까지 합류하자 황가수호대가 소환되는 속도와 줄어드는 속도의 균형이 맞추어졌다.
나도 달려드는 황가수호대의 목을 베어 버리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끝없이 소환할 수는 없을 텐데. 직접 놈부터 노려야 하나?’
어느새 놈의 주변은 새빨간 물결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십 명의 황가수호대가 놈을 철통처럼 에워싼 것이다.
황제는 여전히 검을 뽑아 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네놈이…… 이렇게 강한 거지? 플레이어 주제에 벌써부터 이렇게 강할 수가 없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 나와 일행의 실력에 살짝 얼이 빠진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정도도 못 할 것 같으면, 오지도 않았다.’
나는 자신 있게 황제에게로 내달렸다.
황제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더 이상 주문을 외지 않는데도 황가수호대는 하나씩 계속 소환되고 있었다.
황제의 주위에 있던 수십 명의 황가수호대가 내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놈들과 계속 어울려 줄 필요는 없지. 황제부터 잡는다.’
내심 생각을 정하고, 황제의 틈을 노리기 위한 방법을 구상했다.
바로 황제에게 덤벼들면 놈이 대비하고 몸을 뺄 터.
나는 일단 눈앞의 황가수호대에게 집중하는 척했다.
서걱-
강기공을 강하게 끌어 올려 달려드는 황가수호대 한 놈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그리고 놈의 주검이 황제의 시선으로부터 내 몸을 가리는 순간.
‘점멸.’
나는 황제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재빨리 여의검에 의지를 전했다.
‘커져라!’
그러자 여의검이 재빨리 크기를 키워 갔다.
‘멸세폭.’
그리고 황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황가수호대가 순간적으로 황제의 앞을 에워쌌다.
콰콰콰콰쾅-!
멸세폭은 황가수호대에게 적중했다.
직격당한 황가수호대 한 놈이 완전히 박살 나고, 그 옆에 있던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휘날려 갔다.
황제는 그 틈에 재빨리 뒤로 몸을 물린 상태.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강한 거지!?”
놈은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여전히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콰르르르-
그때 새파란 화염이 황제를 둘러싼 황가수호대를 덮쳤다.
“크윽! 막아라, 막아!”
황제는 연신 황가수호대를 닦달하며 정작 본인은 뒤로 물러났다.
황가수호대는 몸이 불타는 상태에서도 신음 하나 내뱉지 않고 불길을 몸으로 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쯧,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
이번에는 휴고가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휴고가 고함을 내지르며 ‘무거운 분노’를 휘둘렀다.
콰콰콰콰쾅-!
노즈도름의 레어에서 얻은 망치는 그 이름답게 압도적인 무게를 가지고 황가수호대를 휩쓸어 버렸다.
황제의 앞이 일순 텅 비었다.
여전히 근처에서 황가수호대가 소환되고 있었지만, 루스와 휴고의 화력에 의해 일시적인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점멸.’
재빨리 비어 버린 공간으로 파고든 후, 놈에게 검을 휘두르며 스킬을 사용했다.
‘멸세폭.’
콰콰콰콰쾅-!
강력한 기운이 담긴 일격이 황제의 옆구리를 노렸다.
내 실력에 놀라, 생각이 복잡해졌던 탓일까.
황제의 반응은 생각보다 굼떴다.
내 공격이 거의 몸에 닿기 직전에야 다급히 검을 들어서 막았지만, 충격이 고스란히 놈에게 전달되었다.
멸세폭의 파괴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황제가 날아가 구석으로 처박혔다.
우드득-
그리고 운이 나쁘게도 놈의 목이 벽에 부딪히며 이상한 각도로 꺾여 버렸다.
아무리 봐도 치명상이었다.
‘이런! 이 정도에 죽지는 않을 실력이었는데.’
멸세폭 한 방 정도는 버틸 실력이란 것을 미리 확인하고 한 공격이었다.
충격을 입더라도 즉사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을 확신했었다.
그런데 황제가 정신을 딴 데 판 탓인지, 너무 과한 부상을 당해 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 황제에게 달려갔다.
어떻게든 놈을 살려야 한다.
황제에게 알아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놈이 이대로 죽어 버리면, 모든 것이 미궁으로 빠져 버린다.
‘죽지 마라, 제발.’
인벤토리에서 포션과 엘릭서를 한꺼번에 꺼내 들었다.
일단 포션을 먹여 보고, 안 되면 엘릭서라도 먹여서 살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황제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놈을 살폈다.
황제의 목은 여전히 기이한 각도로 꺾인 채였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모습.
일어선 황제의 눈에서 붉을 빛이 번쩍 빛났다.
놈의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긴급 상황 발생, 긴급 상황 발생.”
마치 기계 같은 놈의 모습에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짓거리지?’
그러나 내 태도와 상관없이 황제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현시점에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직면. 비상 프로토콜에 따라 ‘천신 강림 프로젝트’를 실행합니다.”
황제의 목소리는 마치 ARS 안내 음성 같았다.
‘이런 미친! 이게 도대체 뭐야?’
황제의 행동을 보자, 초기화되어 버린 것 같던 바간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소환 영웅처럼, 황제조차도 일종이 꼭두각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황제의 몸에서 붉은빛이 한 가닥 하늘로 뻗어 나갔다.
엄청난 기운의 폭풍이 놈의 몸 주위를 소용돌이쳤다.
그리고 황제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천신 강림 프로젝트’ 실행 완료까지 1분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충격에 대비해 주세요. 남은 시간 1분, 남은 시간 57초, 남은 시간…….”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장. 저게 도대체 뭡니까?”
“……나도 모르겠다.”
어느새 황가수호대를 다 처리한 휴고와 루스가 다가와 있었다.
황제가 이상해진 후 더 이상 소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렵지 않게 마무리한 듯 했지만, 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주인, 느낌이 안 좋아.”
루스의 말대로 나도 불길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 없다는 생각에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막상 다가가기는 꺼림칙했기 때문에 멀리서 공격해 볼 생각이었다.
‘원혼의 거울.’
번쩍-!
뻗어 나간 광선이 황제에게 명중했다.
하지만.
파스슷-
광선은 황제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 같은 느낌.
황제의 몸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남은 시간 42초, 남은 시간…….”
그리고 황제에게선 여전히 알 수 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까이 가서 공격해야 하나? 왠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내 발을 붙잡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해수, 들리나요?
그것은 옛 친구의 목소리.
옛 친구와는 계약에 의한 효과로 언제든 마음을 통해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 지금 좀 바쁩니다.
의사소통 기술의 성능을 테스트한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던 옛 친구였다.
얼마나 떨어진 곳까지 사용이 가능한지 알아 둬야 한다는 것이 이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내 단호한 음성에도 그치지 않았다.
- 해수, 소환해야 해요.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왠지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바쁜 가운데서도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영웅을 소환하세요. 그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옛 친구가 말을 이었다.
- 영웅을 소환하세요. 지금 바로! 영웅을 소환해요!
그녀의 말에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 혹시…… 지금 말하는 것이 당신의 ‘역할’입니까?
- 네, 빨리 영웅을 소환해요. 늦으면 안 돼요!
나는 그 즉시 상태창의 영웅 소환 항목을 확인했다.
- 랜덤 영웅 소환 (1010820/1000000 코인)
┗ 영웅 진화 (1010820/1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 영웅 궁극 진화 (1010820/10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정말 아슬아슬하게 소환이 가능한 코인이 모였다.
이번부터는 소환을 하더라도 소모되는 코인이 두 배로 증가하지 않는다.
최고 금액인 100만에 도달했기 때문.
이것이 회귀 전 내가 수많은 영웅을 거느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에 겨우 소환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졌다.
‘랜덤 영웅 소환.’
비록 이곳이 제국의 심처일지라도.
어쩌면 소환 영웅이 오히려 내게 칼을 들이밀 확률이 더 높을지라도.
나는 주저 없이 영웅을 소환했다.
무언가 정상적인 범위 밖에서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인간의 사고 능력 밖의 무언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역할’에 따라 행동하는 옛 친구의 말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마법진의 빛이 사라지자 그곳에 영웅이 나타났다.
“아!”
나는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해수 님, 시간 없으니 빨리 진화부터 시켜 줘요!”
나타나자마자 내게 버럭 소리를 지른 영웅은 성녀, 캐서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