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81화>
“이런 미친! 점멸.”
나는 점멸을 사용해 즉시 자리를 이탈해야만 했다.
그사이 내 옆에 있던 검은 불덩이가 다시 터졌기 때문이다.
점멸을 연속으로 사용해 여러 번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나는 겨우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곳은 데모릭스의 옆.
그가 만들어 놓은 벙커 안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마스터?”
“괜찮다. 후우-.”
나는 데모릭스에게 대답한 후, 그간 참았던 숨을 내쉬며 전장을 살폈다.
콰르르르르-
일단 새파란 불길이 드라코리치에게 쏘아지고 있는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내가 위기에 처하자 루스가 드라코리치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온몸에 금속 빛이 돌며 새파란 불길을 쏘아 내는 모습.
루스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즈도름은 불덩이를 만들어 드라코리치의 검은 불덩이와 상쇄시키고 있었다.
나는 잠깐의 여유를 틈타 드라코리치의 상처를 다시 한번 살폈다.
놈의 옆구리에 커다랗게 금 간 자국이 확실히 보였다.
“생각보다 할 만하군. 이제 한두 방이면 놈에게 확실한 타격을 줄 수 있겠어.”
다행이라는 듯이 중얼거리니, 옆에서 데모릭스가 내 말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생각보다 놈의 방어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군요. 재료가 떨어져 제대로 싸울 수 없는 것이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데모릭스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지? 왜 이렇게 쉬운 거지?’
회귀 전의 기억을 되짚으며 드라코리치의 전력을 비교했다.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은 노즈도름과 옛 친구라는 강력한 아군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때는 궁극 진화를 마친 영웅이 여럿 있었고, 2단계 진화 영웅도 잔뜩 있었다.
게다가 오래도록 손발을 맞추며 서로 간의 호흡도 뛰어났다.
그런데도 회귀 전에는 드라코리치에게 쉽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었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쉽다고?
‘아무래도 이상해. 분명 뭔가 있어.’
나는 벙커의 틈으로 드라코리치를 다시 관찰했다.
하지만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마스터?”
갑자기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데모릭스가 질문했다.
회귀 전과 달라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니 대신 말을 돌렸다.
“화이트는 어디 갔지?”
“드라코리치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 뒤쪽으로 갔습니다. 화이트는 사정거리가 기니, 오히려 빠져 있는 것이 더 도움 될 것입니다.”
그때 루스의 불길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쯧, 방전됐군. 가 봐야겠다.’
더 이상 관찰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다시 점멸을 몇 번 사용하여 루스 근처로 이동했다.
“헥, 헥……. 주인,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녀석은 녹초가 된 상태에서도 내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 나는 괜찮아.”
대답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루스에게 던졌다.
포션이 불의 기운을 충전시켜 주지는 못하겠지만, 체력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루스, 일단 뒤로 빠져 있어. 체력이 좀 돌아오면 그때 다시 합류하고.”
“……으응, 잠깐만 쉬고 돌아올게.”
루스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내 목소리에 섞인 단호함을 읽었는지 군소리 없이 뒤로 물러났다.
콰콰쾅! 콰콰콰쾅-!
그 순간에도 전장에는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노즈도름과 드라코리치의 불덩이가 쉴 새 없이 부딪치며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래 못 버티겠는데.’
역시나 노즈도름이 밀리고 있는 상황.
나는 곧바로 싸움에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여의검에 다시 마력을 불어넣었다.
검 끝에 구체가 생겨나 막 크기를 키워 가려는 순간.
쎄에에엑-
드라코리치의 얼음 창이 내게 쏘아져 왔다.
내가 기운을 모으는 것을 드라코리치가 알아차린 것이다.
비록 불덩이의 바다를 벗어났지만, 얼음 창의 사거리를 벗어나진 못한 모양이었다.
“젠장!”
쾅-!
다시금 내게 공격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연이어 점멸을 사용해 겨우 공격을 피해 내었다.
하지만 그사이 마력 주입이 끊기며, 여의검에 맺혀 있던 구체는 사라져 버렸다.
드라코리치는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접근전밖에 답이 없나?’
회심의 일격을 위해 원혼의 거울을 아낄 경우, 남는 것은 접근 후 멸세폭밖에 없었다.
결론을 내린 나는, 다시 점멸을 거듭하며 드라코리치에게 접근했다.
가가가각-
여전히 드라코리치 주위에는 작은 얼음 칼날이 휘날리고 있었다.
점멸로 이동하는 짧은 순간에도 갑각이 긁혀 나가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나는 피해를 감수하고 계속 점멸을 사용해 드라코리치의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목표 지점에 이르는 순간, 놈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 기운은 뭉치더니 거대한 창이 되어 내게 쏘아져 왔다.
이제껏 쏘아 대던 얼음 창의 두 배는 되는 크기.
하지만 바로 앞에 놈의 옆구리가 있었다.
여기서 점멸로 자리를 피하면, 공격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제껏 피해를 감수하고 접근한 소득이 없다.
‘놈은 아직 절대불변을 파악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나는 점멸로 이동하는 대신 왼손을 들어 올렸다.
‘절대불변.’
비스듬히 내민 원혼의 거울에 검은 창이 부딪친다.
콰콰쾅!!
손바닥에 비켜 맞은 검은 창이 절대불변을 이기지 못하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멸세폭.’
휘둘러진 여의검의 끝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콰콰쾅-!
폭발의 충격에 내 몸도 뒤로 주르륵 떠밀렸다.
“크르라아아악……!”
이번 공격에는 확실히 고통을 느끼는지, 드라코리치의 입에서 처음으로 조롱이 섞이지 않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놈의 옆구리가 부서져 심장이 노출된 것을 확인했다.
‘이제 됐다!’
막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드라코리치의 입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내 몸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온몸을 커다란 젖은 수건에 넣고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었다.
“크으윽!”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도 강한 압력에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점멸.’
순간 나는 놈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빨리 점멸을 사용했다.
하지만 몸이 제자리에서 이동되지 않았다.
‘어째서……? 점멸, 점멸!’
다시 사용해 보았지만, 스킬은 발동되지 않았다.
드라코리치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젠장, 뭐 이딴 기술이!’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는 순간에도 몸에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우드득-
기어코 다리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쪽 무릎을 꿇는 자세가 되었다.
여의검을 바닥에 박아 넣고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나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피해가 대부분 옛 친구에게 전이됨에도, 몸에서는 초재생에 의한 증기가 계속 뿜어졌다.
너무 강한 충격이 온몸에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탓이었다.
[킥킥.]
순간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소리.
아무 내용 없는 웃음일 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방심하다 입은 상처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콰콰쾅-!
겨우 버티느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폭음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노즈도름과 드라코리치는 계속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놈에게 여유가 있는지, 내게 건 마법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시간이 너무 흐르면 옛 친구가 버틸 수 없을 정도의 피해가 누적될 수도 있다.
게다가 몸의 자세가 더 낮아지면, 아예 찌그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지탱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여의검으로 멸세폭을 사용해 보았다.
혹시나 스킬이 사용되어 폭발이 일어날지라도, 그 힘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었다.
‘멸세폭.’
하지만 점멸처럼 멸세폭도 사용되지 않았다.
‘스킬이 다 막혔다. 젠장, 어쩌지?’
생각을 거듭하다가, 이번에는 여의검에 의지를 전해 보았다.
‘커져라!’
그러자 여의검이 조금 커졌다.
‘아이템의 스킬은 사용이 돼. 그럼…….’
순간적으로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나는 검 손잡이를 쥔 왼손을 풀어 검의 코등이(Cross Guard)로 미끄러트렸다.
툭-
압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코등이 위로 떨어져 내린 왼손.
나는 안간힘을 써 손바닥을 드라코리치에게 겨누었다.
“크으윽.”
고작 손목을 조금 비트는 데에도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용을 쓰자 이윽고 손바닥이 드라코리치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힘껏 외쳤다.
‘원혼의 거울!’
순간 왼손에서 검푸른 광선이 뻗어 나갔다.
번쩍-!
비록 ‘천벌’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원혼의 거울에는 거듭된 멸세폭의 반동과 여러 공격을 허용한 충격이 모여 있었다.
왼손에서 발사된 광선은 이제껏 내가 사용한 그 어떤 기술보다도 강한 위력을 품은 채 드라코리치의 가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파스슥-
뭔가 녹으며 뚫리는 소리가 나더니.
채애앵-!
연이어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드라코리치의 심장이 산산이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후드드득-
그리고 드라코리치의 몸이 뼛조각으로 분해되어 떨어져 내렸다.
“크윽-”
드라코리치의 스킬이 풀리며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얼른 인벤토리를 뒤져 포션을 마시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해의 대부분이 옛 친구에게 전이된 덕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는 말끔히 회복되었다.
“아이템의 기술이라도 사용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후우-.”
안도하는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며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드라코리치의 사체에 ‘아이템 추출’이라도 사용해 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기분 좋게 뼈 무덤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문득 뭔가 허전했다.
당연히 이뤄져야 할 것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음…… 스탯이!?’
드라코리치의 사체로부터 기운이 흡수되지 않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이런 미친!”
내가 욕설을 내뱉는 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킥킥, 재밌었어!]
드라코리치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렇게까지 재밌게 해 줄 줄은 몰랐어. 이번엔 정말 나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 키키킥.]
놈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주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갑자기 사방이 검은 안개로 뒤덮이더니 뭔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변이 지형지물이 전혀 인식되지 않았다.
‘결계인가? 젠장. 심장이 깨어졌는데 왜 죽지 않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상황.
분명히 회귀 전에는 드라코리치의 심장을 파괴하는 순간, 놈의 생명도 끝이 났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검은 안개는 더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세상이 온통 검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하늘도 땅도 모두 검었다.
그 속에서 인식되는 것은, 몇 안 되는 생명체뿐.
먼저 거대한 노즈도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데모릭스도 보였다.
뒤로 빠진 루스나 화이트와 달리, 계속 전장 근처에 있다가 결계에 끌려 들어온 것 같았다.
‘나까지 셋이 다인가? 젠장, 옛 친구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안타깝게도 옛 친구가 건 스킬의 효과도 사라져 있었다.
순간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내 불찰이다. 미안하구나.]
그것은 노즈도름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지의 정령을 이용해 땅에 ‘용살(龍殺)의 마법진’을 설치했다. 그러느라 합류가 늦어졌었지. 그래도 마법진 덕에 놈의 힘이 깎여 그나마 상대할 수 있었다.]
비록 용살의 마법진이 뭔지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떤 것인지는 짐작이 갔다.
‘드래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스킬인가?’
왠지 회귀 전보다 드라코리치가 약한 느낌이 들더니, 노즈도름의 마법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노즈도름이 사과를 해 오는 이상,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이곳은 드라코리치의 결계 안.
괜히 놈에게 정보가 흘러 들어갈까 싶어, 나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듣고만 있었다.
[‘용살의 기술’은 고금을 통틀어 온 세상을 뒤져도 아는 존재가 거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놈도 ‘용살의 기술’을 가진 모양이다. 차라리 내가 없었더라면, 심장을 파괴하는 순간 놈이 죽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지금 시커멓게 변해 버린 이 공간이 드라코리치가 가진 ‘용살의 기술’인 것 같았다.
노즈도름이 없었다면, 아마 기술은 발동되지 않았을 터.
하지만 상황이 어려워졌다고 딱히 노즈도름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노즈도름이 전위에서 잘 버텨 준 덕에 그나마 드라코리치를 상대할 만했으니.
어쨌든 고민만 하고 있어 봐야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리는데, 사방으로 드라코리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키킥. 이렇게까지 재밌어질 줄은 몰랐는데, 너무너무 좋아! 저 늙은 용을 데려온 걸 봤을 때, 얼마나 즐겁던지, 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