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78화>
그러자 웜의 사체의 한 곳에 기운이 모여들더니, 내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웜의 마력 핵(S. 재료)]
- 땅속의 포식자 웜의 마력이 깃든 핵. 거대한 덩치로 수많은 존재를 집어삼켜 온 만큼, 강력한 기운이 모여 있다.
“잘됐군. 이건 쓸모가 있겠어.”
강한 몬스터인 만큼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추출되었다.
나는 얼른 다음 목표인, 먼저 처치했던 웜에게 다가갔다.
놈은 몸이 뚝 끊어진 데다가 불에 타 거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아이템 추출.’
잠시 후, 이번에도 내 앞에 아이템이 떨어졌다.
[그을린 웜의 이빨(B. 재료)]
- 강력한 불길에 타 버린 웜의 이빨. 불에 타는 바람에 원래의 강도를 잃어버린 상태다. 좋은 솜씨로 가공할 경우, 괜찮은 무기를 만들 수 있다.
이번에는 웜의 사체가 너무 심하게 훼손된 탓인지, 아이템의 등급이 떨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금방 포기하고 사방을 살폈다.
웜에게서 얻은 아이템들은, 이미 용처를 정해 놓았다.
그러기 위해 찾아야 할 인물이 있었다.
‘어디 있나, 데모릭스?’
주위엔 여전히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위에 연합과 노르트의 병사들이 활약하고, 그 뒤를 라로프의 주술사들이 지원하는 형세.
성벽 위의 화이트도 다양한 총탄을 사용해 화력 지원을 하고 있었다.
전방에서는 넬도르와 라라가 날뛰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조금 뒤쪽, 데모릭스가 몬스터의 사체에서 아이템을 추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데모릭스는 추출한 아이템을 즉시 사용하여, 자동으로 몬스터에게 발사되는 병기를 만들어 내거나, 참호와 바리케이드를 요소요소에 설치하고 있었다.
데모릭스는 일반 병력의 피해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긴 한데, 더 해 줄 일이 있다는 말이지.’
나는 데모릭스에게 다가갔다.
“데모릭스.”
“마스터, 오셨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놈은 내가 웜과 싸우는 모습을 본 모양인지 인사를 해 왔다.
“그래, 일단 이걸 받아라.”
나는 대뜸 웜에게서 얻은 아이템을 데모릭스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데모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것은? 굉장히 높은 등급의 재료군요.”
이제껏 데모릭스가 추출한 아이템 중에 S급은 없었을 것이다.
끽해야 와이번과 일반 몬스터를 추출해 왔을 테니, 아이템의 등급도 그 정도 수준이리라.
나는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는 녀석에게 지시를 내렸다.
“웜의 이빨은 그냥 필요할 때 사용해도 되지만, 마력 핵은 아직 사용하지 마라. 언제 사용해야 될지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예, 마스터. 감사합니다.”
데모릭스는 내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지금처럼 열심히 해라.”
막 데모릭스를 격려하고 전장을 살피려는 때였다.
[킥킥.]
머릿속에 들려오는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듣자 몸이 덜컥 정지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소름 끼치는 기운이 내 몸 주위로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놀라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전투 중인 인간과 몬스터 말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킥킥.]
다시 한번 들려오는 웃음소리.
온몸에 쭉 하고 닭살이 돋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소리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몬스터의 물결 건너, 지평선 끝자락.
그곳에 작고 검은 점이 하나 나타나 있었다.
너무 멀어 모양을 식별할 수 없는 무언가.
웃음소리는 그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방을 살폈다.
웃음에는 소름 돋을 만큼 사악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인간과 몬스터를 포함해 웃음에 반응하는 존재는 없었다.
아마 웃음소리는 나에게만 들리는 듯, 멀리 나타난 존재를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있다.
오직 옛 친구만이 고개를 돌려 검은 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옛 친구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두려움과 근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다시 한번 내 머릿속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킥킥, 이번엔 어떨 거 같아?]
앞뒤가 없는 질문.
나는 일방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거칠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냐? 이 저주받은 미친놈아!”
[저주는 받은 게 아니야. 나 스스로 건 거지, 키킥.]
들릴 거라고 생각지 않고 내뱉은 말에, 목소리는 대답해 왔다.
목소리의 정체는 드라코리치.
바로 지금 이 사달을 일으킨 원흉이었다.
놈은 회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사악하지만 마왕의 기운과는 다른 느낌.
이지를 반쯤 상실한 것 같은 광기가 놈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너도 나를 알고 있나? 도대체 이딴 짓을 벌이는 이유가 뭐지?”
제정신은 아닌 거 같았지만, 그래도 대화가 가능한 것 같아 질문을 했다.
그러자 비웃음을 담은 대답이 돌아왔다.
[키키킥. 너는 진짜 매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무슨 말이냐? 제대로 말해!”
[어차피 망쳐 버릴 거, 차라리 재밌게 놀자, 킥킥.]
놈은 대답 대신 딴소리를 하더니, 던지듯 말을 이었다.
[이게 내 마지막 장난감이야. 날 재밌게 해 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놈에게서 내게로 이어지던 소름 끼치는 느낌이 사라졌다.
아마도 통신을 위해 쓰던 모종의 술수를 거둔 듯했다.
그리고 검은 점으로 보이던 놈의 형상에서 무언가 나타나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얀 뼈로 이루어진 병사.
한 손에 검을 든 놈이 질풍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용아병. 이제 진짜 마지막이군.”
용의 이빨을 매개로 만들어진 병사.
저것은 회귀 전에도 드라코리치가 직접 나서기 전에 나타났던 마지막 부하였다.
‘쯧, 오만한 놈.’
저 용아병이 마지막 부하임을 미리 알려 주는 드라코리치의 태도는 광오했다.
스스로 보유한 전력을 알려 준 셈.
어쩌면 그냥 미친 것뿐일지도…….
내가 생각을 이어 가는 중에도 용아병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놈은 3미터 정도 되는 키에 해골만 남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스켈리톤과 달리 몸은 해골이 아니었다.
놈의 몸통은 마치 곤충처럼 뼈로 된 외골격이 갑옷처럼 둘러져 있었다.
내게로 똑바로 달려오는 용아병을 보며 상황을 살폈다.
일단 루스는 이번 전투에서는 배제하기로 했다.
불 능력은 어느 정도 다시 회복했더라도, 체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루스, 일단 빠져 있어.”
“주인, 괜찮겠어?”
드라코리치와 대화 후 심각해진 내 표정을 눈치챈 루스의 말투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쉬면서 체력이나 회복해 둬. 알았지?”
“응. 주인 다치면 안 돼.”
루스가 물러나는 것을 본 후 휴고를 찾았다.
휴고는 노르트인들과 섞여 몬스터들을 잡고 있었다.
콰콰콰콰쾅-!
지금도 멸세폭에 휘말린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휴고는 저대로 둬야 되겠군.’
당장 휴고가 빠지면 일반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휴우, 혼자 해야 하나?”
일단 다들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용아병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딱히 용아병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력을 완전히 쏟아부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
본 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막상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왜 안 오지? 올 때가 지났을 텐데.’
노즈도름이 늦어지고 있었다.
레어에서 로치데일로 갈 때의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도착했어야 하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용아병이 죽으면, 다음은 드라코리치가 직접 나설 것이다.
그러니 용아병을 무작정 빠르게 죽여 버리는 것도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골치 아프구만.”
혼잣말을 내뱉으며 여의검을 뽑아 들었다.
일단 마력만 있으면 후유증 없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구체를 만들어 공격할 생각이었다.
우우웅-
곧 검 끝에 푸른 구체가 생겨나 크기를 키워 갔다.
슬슬 용아병의 모습이 자세히 보일 즈음이 되어, 나는 칼을 휘둘러 구체를 발사했다.
쎄에엑-
구체가 공기를 밀어내며 날아갔다.
그리고 용아병에게 막 적중하려는 찰나.
서걱-
내려 벤 용아병의 칼에 구체가 반으로 싹둑 잘렸다.
“이런 미친!”
콰콰콰쾅-!
내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는 순간, 베어진 구체가 폭발했다.
‘투사체 확산’의 효과 때문인지, 구체는 베어졌음에도 넓은 범위에 영향을 미치며 폭발했다.
그 덕에 용아병의 몸에도 충격이 미쳤지만, 그래도 직격했을 때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구체를 베어 버린 용아병은 속도를 높여 내게 달려왔다.
용아병은 확실히 일반 몬스터와 달랐다.
놈은 검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았다.
‘노즈도름의 레어에서 봤던 가디언과 느낌이 비슷하군.’
덩치도 모양도, 가진 기운의 크기도 달랐지만, 기술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가디언이 떠올랐다.
어쨌든 이제 놈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황.
“그래, 한번 붙어 보자.”
나도 여의검을 움켜쥐고 놈에게 맞서 갔다.
내가 다가가자 놈이 뼈로 된 칼을 휘둘렀다.
나는 강기공을 잔뜩 끌어올린 채, 피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쾅-!
칼이 부딪치는 순간, 내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힘에서 밀리지 않더라도, 질량이 차이나니 어쩔 수 없는 상황.
밀려나는 몸을 추스르는데, 빠르게 다가온 용아병이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맞서 갔다.
쾅-!
하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폭음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밀려났다.
‘한 번 더 해 봐라, 이 뼈다귀 자식아.’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검을 들어 올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용아병이 다시 똑같은 패턴으로 검을 휘둘러 왔다.
힘으로 눌러 버리겠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나는 또다시 똑같은 자세로 놈의 칼에 내 검을 부딪쳐갔다.
그리고 막 칼이 충돌하기 직전, 여의검에 의지를 전했다.
‘작아져라!’
순간 여의검이 사라지며 용아병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미리 준비하고 자세를 낮춘 내 머리 위로 용아병의 칼날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커져라!’
다시 커진 여의검이 용아병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콰쾅!
처음으로 용아병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크르르르…….”
놈의 입에서 분노 섞인 괴성이 새어 나왔다.
여의검에 맞은 옆구리에는 금이 쩍 가 있었다.
나는 놈에게 칼을 까닥까닥해 보였다.
명백한 도발.
놈이 눈을 붉게 빛내더니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한 번 당한 수법에 다시 당할 생각은 없는지, 나와 칼을 맞부딪칠 때는 극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공수가 오갔을 때였다.
탕-!
총성과 함께 무언가 빠르게 날아와 금 간 용아병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용아병의 몸이 순간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화이트!’
성벽 위의 화이트가 내 싸움을 보고 지원을 시작한 것이다.
화이트의 총알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
원뿔 모양으로 생긴 총알이 용아병의 상처에 박혀 드릴처럼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지금도 상처를 파고드는 총알 때문에 용아병의 금 간 외골격이 더 벌어지고 있는 중.
용아병은 뒤로 물러나며 손을 뻗어 총알을 움켜쥐었다.
가가각-
회전하는 총알과 닿은 용아병의 손바닥뼈가 깎여 나갔다.
용아병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총알을 상처에서 뽑아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콰쾅-!
총알이 폭발했다.
그로 인해 금 간 옆구리에 충격이 더해져 구멍이 뻥 뚫리고, 총알을 쥐었던 왼손에서 손가락뼈가 몇 개 떨어졌다.
“후후. 좋은데?”
화이트의 지원에 흡족해하며 용아병을 살폈다.
구멍 난 놈의 옆구리 안쪽에 은빛이 도는 금속이 보였다.
‘아다만티움인가? 속에다 무슨 짓을 해 놓은 거야?’
회귀 전에는 영웅들의 마법 폭격으로 빠르게 처치했었기 때문에, 나는 용아병에 대해 구체적인 부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노출된 내부를 보니, 지금 보이는 모습 이외에 무슨 능력이 더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제대로 한 방 먹이면 끝날 것 같긴 한데. 이거 참. 힘은 아껴야 되고, 그렇다고 너무 빨리 죽여 버릴 수도 없으니……. 게다가 만만하게 데리고 놀기에는 또 껄끄러워. 골치 아프구만.’
결국 이 사태는 노즈도름이 늦어서 생긴 일.
새삼 노즈도름에 대한 원망이 샘솟았다.
‘도대체 뭐 하느라 아직 안 오는 거야?’
타탕- 탕-
그사이에 화이트의 총알이 몇 번 더 날아왔지만, 이번에는 적중하지 못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용아병의 칼이 총알을 베어 버린 것.
나는 화이트의 지원을 받아가며 적당히 용아병을 상대했다.
놈이 죽지는 않게, 그렇다고 다른 기술을 발휘할 여지는 주지 않은 채.
조금씩 놈을 무력화시켜 갔다.
마음먹었을 때,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놓기 위해.
그때 내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렇게 재미없게 할 거야? 이건 대충대충 한 벌이야, 키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