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76화>
그것은 수만 마리의 몬스터로 이루어진 물결이었다.
재앙에 오염되어 검은색을 띤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대, 대장……. 저게 뭡니까……?”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휴고가 긴장이 역력한 말투로 물어 왔다.
나는 몬스터에 고정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휴고에게 대답했다.
“드라코리치의 본대다. 아마 저 뒤쪽 어딘가에 드라코리치가 여유 부리며 다가오고 있을 거야.”
내 말에 루스도 걱정스러운 말투로 질문했다.
“주인,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당연하지. 준비된 대로만 하면 돼. 걱정 마라.”
휴고와 루스를 다독인 후, 이를 악물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놈은 오만한 성격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드라코리치를 생각하며, 머릿속에서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사이에도 검은 파도는 바리살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삐유우우-
그때 성벽 감시탑에서 신호탄이 쏘아졌다. 연합에서도 검은 파도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연합의 병력들이 성문 주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잘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해야 되겠군. 먼저…….”
나는 골드 드래곤 노즈도름에게서 받은 스크롤을 찢었다.
번쩍-!
그러자 찢어진 스크롤에서 황금빛이 서쪽으로 쏘아졌다.
‘아마 조금 기다리면 나타나겠지. 힘을 아끼기 위해 직접 날아올 거라고 했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이제 다음 일을 할 차례.
“데모릭스!”
내가 크게 소리쳐 부르자, 와이번의 사체에서 아이템을 추출하고 있던 데모릭스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이제부터 병사들이 성벽 밖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그것을 고려해서 성 바깥에 무기를 설치해라.”
굳이 성벽 밖으로 병력을 내보낸다는 말에 데모릭스가 의아해했다.
“성벽을 강화하여 싸우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병력을 내보내려 하십니까?”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성벽이 제 역할을 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자세한 것은 조금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일단 시키는 대로 하도록.”
“예.”
데모릭스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딱히 반발하지는 않았다.
놈은 재빨리 아이템 추출을 마치더니, 성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재앙과 싸울 때만큼은 충신이 따로 없지. 쯧.’
괜한 짜증이 일었지만, 할 일이 태산이라 얼른 감정을 털어 내었다.
그런 후 인벤토리에서 ‘옛 친구의 맹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파삭
그것을 깨트리자, 금세 옛 친구의 환영이 나타났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요?”
평소와 달리 무거운 표정의 옛 친구에게 나도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예, 몬스터 떼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뒤편 어딘가에 놈도 오고 있겠죠. 그쪽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라로프도 노르트도 이미 며칠 전부터 준비를 끝마치고 대기 중이에요. 계획에 바뀐 점은 없나요?”
“예, 다음번 맹약이 깨어지면, 바로 건너오시면 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동에는 몇 분 정도 시간이 걸려요. 잊지 않았겠죠?”
“물론입니다. 시간을 맞추어 부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십시오. 그럼 조금 이따가 뵙겠습니다.”
“그럼 이따 만나요. 몸 조심하고요.”
또 하나의 ‘옛 친구의 맹약’이 바닥에 떨어지며, 옛 친구와의 대화가 끝났다.
이제 준비는 얼추 끝난 상태.
그사이 육안으로 몬스터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검은 파도는 가까워져 있었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성 밖에 참호가 생겨났다.
그리고 날카로운 창날이 달린 바리케이드도 드문드문 만들어졌다.
돌아보니 데모릭스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놈은 내 지시대로 와이번에게 추출한 재료를 이용해, 성 밖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성 위에 있던 대포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더니 더 크고 포신이 긴 대포들이 나타났다.
성 밖에서 전투가 일어나도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정거리가 더 긴 대포로 교체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차차 준비가 갖추어져 갈 때.
나는 검은 파도를 주시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드디어 몬스터의 무리가 내가 원하는 위치에 다다랐다.
‘발동, 터져라.’
콰콰쾅! 콰콰쾅-!
공들여 설치한 마법 함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발아래에서 부터의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몬스터들이 떼로 죽어 나갔다.
폭발에 깜짝 놀라 멈춘 몬스터가, 뒤에서 밀려드는 몬스터 떼에 밟혀 죽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터져라, 터져라.’
콰콰쾅-!
콰콰콰쾅-!
터트리고 또 터트렸다.
몬스터의 사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는 바다가 될 정도로 사방에 흘러넘쳤다.
‘터져라, 터져라, 터져라!’
콰콰콰쾅-!
계속해서 마법 함정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굉장한 기운이 내 몸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스탯이 마구 오른다.
모든 개체가 내 스탯을 올려 줄 만큼 강력하지는 않기 때문에, 죽는 숫자만큼 스탯이 오르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워낙에 많은 수가 죽고 있어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상태창에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게 아쉽네.’
상태창만큼 성과를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도 없다.
그런데 만들다 만 것 같은 상태창 때문에,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지 정확히 가늠이 안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마법 함정을 발동시켰다.
끝없는 폭발이 일어나며, 몬스터가 계속 죽어 나갔다.
하지만 드래곤 레어의 아이템을 싹쓸이해 만든 마법 함정으로도 몬스터를 모두 죽일 수는 없었다.
‘후우, 여기까지인가?’
준비해 놓은 마법 함정을 거의 다 사용했음에도, 남은 몬스터가 수천 마리는 되었다.
이제는 병사들이 직접 싸워야 한다.
폭음이 그치자, 미리 약속한 대로 성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뛰어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옛 친구의 맹약’을 힘껏 집어 던졌다.
그것은 밀려드는 몬스터 무리의 측면, 먼발치에 떨어졌다.
파삭-
구슬이 깨어지자, 그곳에서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러더니 바닥에 마력으로 그린 묘한 모양의 그림이 생겨났다.
‘저게 이동 마법진인가 보군. 몇 분쯤 걸린다고 했으니, 좀 기다려야 나타나겠지.’
잠시 그것을 지켜보는 사이,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성벽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의 전투는 연합의 병사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물러서지 마라. 가족을 지켜라!”
“죽어라, 이 괴물아!”
지휘관들의 독려와 악에 받친 병사들의 외침이 난무했다.
피, 피, 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방에 피가 가득했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나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 제가 내려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까 전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휴고가 물어 왔다.
마음씨 착한 휴고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가서 마음껏 날뛰어라. 죽지 말고.”
“예, 감사합니다. 대장도 몸조심하십시오.”
내 허락이 떨어지자 휴고는 훌쩍 몸을 날려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몬스터를 향해 돌진했다.
콰콰콰쾅-!
이내 휴고의 멸세폭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은 굳이 잡스러운 몬스터를 상대로 힘을 빼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렇게 피가 가득한 전장이라면 휴고는 끝없이 전투를 지속할 수 있을 터.
때문에 녀석을 내려보내는 것은 딱히 손해가 아니었다.
콰콰콰콰쾅-!
멸세폭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전장을 뒤흔들었다.
휴고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전장의 측면에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바다의 빛깔을 띤 거대한 거북이였다.
“드디어 왔군.”
“와! 거북이 완전 커!”
루스가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옛 친구의 옆구리에서 구멍이 생겨나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봉은 노르트의 대부족장, 라넬디드였다.
그는 커다란 전투 도끼를 들고 앞장서며 함성을 내질렀다.
“재앙을 물리쳐라! 우리는 승리한다! 우아아아아-!”
“우리는 승리한다아! 우아아아악!”
라넬디드의 선창에, 뒤이어 달리던 노르트인들이 따라 소리쳤다.
털가죽을 입은 거친 전사들은 몬스터 무리의 측면을 거침없이 들이받았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로프의 아이들아, 은혜를 갚을 시간이다! 라로프는 결코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묘한 울림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라로프의 ‘어머니’가 양손을 하늘로 든 채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와 라로프인들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라로프인들도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변신을 마친 라라가 앞장서 달리고, 그 뒤를 리첼이 뒤따르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옛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커다란 옛 친구의 머리가 나를 보며 슬쩍 끄덕였다.
‘계획대로 당장은 가만히 참고 있으세요, 옛 친구님.’
일단 옛 친구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열심히 날아오고 있을 노즈도름도 마찬가지.
그들은 오롯이 드라코리치와의 상대에만 힘을 집중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승산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잠시 후 있을 본 게임을 걱정하는 동안, 전투는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노르트와 라로프의 지원이 오며 전황이 유리해지긴 했지만, 피해는 꾸준히 누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쿠르르르-
땅거죽이 뒤집히며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싸우고 있던 병사와 몬스터를 한꺼번에 집어삼켜 버렸다.
“쯧, 결국 나타났군.”
그것의 정체는 땅속에 굴을 파 이동하며, 거대한 입으로 땅 위의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괴물.
거대한 지렁이같이 생긴 몬스터, 웜이었다.
애초에 성벽에 의지해 싸우지 않은 것도 저놈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웜이 있는 한 성벽은 쓸모가 없다.
놈은 언제든 성벽을 무너트릴 수도 있고, 성벽 안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웜이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 민간인을 덮치는 상황이 생기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그래서 차라리 성 바깥에서 싸우도록 한 것이었다.
‘그럼 다른 몬스터 때문에 놈의 행동에 최소한의 방해라도 되겠지.’
하지만 예상이 다 맞아 들어가지는 않은 모양.
웜은 다른 몬스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난 둥그런 입으로, 몬스터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걸리는 족족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나. 후우…….”
이대로는 병력 피해가 너무 심해진다.
결국 직접 나설 결심을 하고 성벽을 뛰어내리려다가, 문득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나는 상태창의 코인 항목을 다시 한번 살폈다.
- 랜덤 영웅 소환 (623700/256000 코인)
┗ 영웅 진화 (623700/1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 영웅 궁극 진화 (623700/100000)
: 진화 가능 영웅 [없음]
데모릭스를 뽑아 진화시키는 데 14만 가까운 코인을 소모했다.
그럼에도 60만이 넘는 코인이 다시 모여 있었다.
조금 전, 마법 함정에 죽어 나간 몬스터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많은 코인이 모여 있을 것이란 것은 이미 예상한 일.
하지만 영웅을 둘 이상 동시에 소환해 놓는 것은 적지 않게 부담이 갔다.
‘황가수호대 놈들이라도 또 나타나면 곤란하지. 그러니 그걸 써야겠군.’
내게는 단 한 번뿐이지만, 영웅의 배신을 대비해 쓸 수 있는 수가 있었다.
‘랜덤 영웅 소환.’
마음을 굳히고 영웅을 소환했다.
발밑에 마법진이 빛나고, 잠시 후 또 다른 영웅이 나타났다.
[시모 화이트(S. 총술사)]
-충성도 : 50(충성도가 낮으면 배신할 수 있습니다.)
나타난 것은 기다란 마법 소총을 든 남자.
나는 놈이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다시 스킬을 사용했다.
‘영웅 진화.’
발밑에서 솟아오른 기운이 화이트의 몸으로 흡수되며 놈이 진화했다.
진화 전의 놈은 전형적인 저격수.
멀리서 총을 쏴 적을 맞추는 것 말고는 별다른 능력이 없다.
하지만 놈을 진화시킬 경우, 총알에 다양한 효과를 부여하여 강력한 화력을 발휘한다.
화이트는 지금 상황에 최적화된 영웅은 아니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
소환하고 인사도 하기 전에 진화까지 시키자, 화이트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그래, 반갑다. 일단 이걸 받아라.”
나는 인벤토리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놈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