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74화>
나는 그를 보며 공손하게 물었다.
“노즈도름 님이십니까?”
“그래, 이건 내가 인간으로 유희를 즐길 때의 모습이니라. 그나저나 내 피가 담긴 물건을 복용한 모양이군. 어때, 효과가 좀 있나?”
“예, 감사합니다. 덕분에 몸이 정말 강해졌습니다. 다른 아이템들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래, 그나마 자네가 구원자라 이틀 정도로 끝난 거지, 웬만한 인간은 오히려 그걸 먹었다가 죽을 수도 있어. 드래곤의 피는 너무 강한 기운을 담고 있거든.”
노즈도름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틀이나 흘렀다고? 젠장, 시간이 없는데.’
한두 시간 지났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렀다.
바리살까지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이 아까웠다.
그때 노즈도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간이 촉박해 그러는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몸이 조금 회복되었으니, 로치데일까지 데려다주마. 나도 그곳에 할 일이 있어 어차피 가야 한다.”
노즈도름은 아마도 라스본의 일을 해결하러 가려는 것 같았다.
어차피 로치데일까지 이틀 거리.
노즈도름이 로치데일까지 빠르게 데려다준다면, 시간 손해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가는 김에 올리버 놈이 당하는 꼴도 구경하면 되겠어.’
놈의 일그러진 표정을 떠올리니 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십니까?”
“잠깐만 기다리거라. 금방 한 가지 일만 처리하고 가도록 하자.”
그러더니 노즈도름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잠시 후, 바닥에 작은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러더니 그곳에서 조그마한 흙덩이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잠시 후 흙으로 만들어진 인형으로 변했는데, 아마도 땅의 정령인 것 같았다.
‘전에 봤던 그놈인가?’
문 앞을 지키던 정령과 같은 느낌이 났다.
“노즈도름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에요!”
정령에게서 굉장히 유창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깜짝 놀라고 있는데, 정령이 노즈도름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더니 노즈도름 앞에서 팔짝팔짝 뛰며 기뻐했다.
노즈도름은 왠지 뻘쭘한 표정을 짓더니, 짐짓 근엄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너는 그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도록 해라.”
“앗, 아직 몸이 편찮으실 텐데, 어딜 가세요?”
“잠깐이면 될 일이니 괜한 짓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거라.”
“예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왠지 근엄한 골드 드래곤의 이미지가 깨어지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시 소환된 땅의 정령을 보자, 문득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즈도름 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무엇이냐?”
“저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노즈도름 님뿐만 아니라 격 높은 존재들은 다들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저 정령도 그렇고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 질문을 들은 노즈도름은 드래곤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너는 구원자이니, 세계의 법칙에 따라 맡은 역할이 있는 자들은 너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계의 법칙은 또 무엇입니까?”
노즈도름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말하는 역할이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만큼 자세히 알지 못한다.”
옛 친구는 창조주를 언급했었다.
이제 드래곤은 세계의 법칙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저것 듣기는 했지만, 속 시원히 밝혀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격 높은 존재들은 각자 맡은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리고 맡은 역할 이외의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내가 맡은 역할이, 다른 존재들도 알고 있어야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된 셈.
‘이 세상 사람도 아닌 내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맡게 된 건지 모르겠군. 진짜 창조주라도 만나야 속 시원하게 알 수 있으려나?’
생각이 복잡해지려는 찰나, 노즈도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그냥 너의 일을 해라. 그러면 족하다.”
그 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방금 노즈도름이 한 말은 옛 친구에게도 들었었다.
결국 내가 할 일은, 황제와 영웅들의 비밀을 밝히고, 복수를 하는 것.
괜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다가, 문득 한 가지 해 보고 싶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노즈도름을 염두에 두고 팔찌의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전이가 시전됩니다. 대상을 정해 주세요.]
[지정 가능 대상 : 없음]
‘역시 안 되나?’
그때 노즈도름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성한 기운을 품은 물건이군.”
노즈도름은 정확히 내 손목에 걸린 팔찌를 쳐다보고 있었다.
팔찌를 사용할 때 누군가 알아챈 것은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고 있는데 노즈도름이 말을 이었다.
“아직 내게 사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의문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중에는 뭐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구나.”
노즈도름은 완고한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의문을 담아 내 손목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팔찌에도 무언가 비밀이 있는 건가?’
튜토리얼에서 구한 아이템에 불과한데, 팔찌의 성능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리고 사용 기준이 모호하다는 느낌도 받았었다.
라로프와 노르트를 거치며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그럼 튜토리얼에서부터 그 역할이라는 것이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친 건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제 가도록 하지. 준비하거라.”
번쩍-!
그때 노즈도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눈부신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노즈도름은 어느새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준비되었느냐?”
“……예.”
머릿속이 복잡하고, 궁금한 것도 잔뜩 남았다.
하지만 단호해 보이는 노즈도름의 태도에 긍정의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나와 일행의 몸이 떠오르더니, 노즈도름의 손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우리를 손으로 감싸 쥔 채 노즈도름이 날아올랐다.
로치데일에서 노즈도름의 레어까지 올 때는 이틀이 걸렸지만, 돌아갈 때는 눈 깜빡할 사이였다.
불과 몇 분 후, 우리는 로치데일의 왕성 위를 빙글빙글 돌며 날고 있었다.
크롸아아아-
노즈도름의 피어가 로치데일 왕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와 일행에게는 노즈도름이 따로 조치를 했는지 별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왕성의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더 흐르자, 머리에 왕관을 쓴 노년의 남자가 나타나 왕성 마당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머리를 땅에 처박고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의 뒤로 많은 사람이 나타나,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노즈도름이 바닥으로 착륙했다.
노즈도름은 우리를 한쪽에 놓아 주고는 왕관을 쓴 자에게 말했다.
“네가 당대 라스본의 가주냐?”
그 말에 왕관을 쓴 자가 머리도 들지 않은 채, 극도로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미천한 몸이 라스본을 이끌고 있습니다. 위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자 노즈도름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차갑게 빛났다.
“너는 내게 이름을 받은 자의 후손으로서, 어째서 나를 기만한 것이지?”
그 말에 로치데일의 왕이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저는 결코 위대한 분께 무례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크르르르-
노즈도름의 코에서 콧김이 뿜어지며, 사방으로 강력한 기세가 퍼져 나갔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왕족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죽었다고 거짓을 말하고 다닌 자가 너희 중에 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왕은 진짜 관련이 없는 건지, 금시초문인 표정이었다.
그사이 나는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당연히 올리버를 찾는 중이었다.
올리버는 왕의 뒤쪽에 엎드린 채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노즈도름과 왕의 말이 이어질수록, 놈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었다.
“네가 끝까지 부인한다면 어쩔 수 없지. 오늘 라스본의 이름을 거두어 가겠다.”
노즈도름이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러자 왕이 부르르 몸을 떨더니 애원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모습을 보던 내가 노즈도름에게 다가갔다.
“노즈도름 님, 범인을 찾았습니다.”
내 목소리가 들리자 엎드려 있던 올리버 라스본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노즈도름에게 말했다.
“저기 엎드린 저놈이 범인입니다. 암만 봐도 저놈이 혼자 저지른 일 같으니, 저놈만 벌을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즈도름은 내 제안이 썩 마뜩잖은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왕이 다시 한번 애원해 왔다.
“위대한 분이시여, 저희 가문에서 변절자가 나왔다면 그것은 저의 책임이 큽니다. 변절자를 벌하시고, 저를 벌하시는 것으로 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왕은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용서을 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노즈도름이 조금 화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놈은 내가 벌하겠다. 그리고 너희 라스본은 앞으로 여기 정해수의 명을 내 말처럼 따르도록 해라. 그것으로 이번의 무례를 용서해 주도록 하겠다.”
“위대한 분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위대한 분께 감사드립니다.”
왕이 감격해 외치자, 뒤를 이어 왕족들이 한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올리버는 벌떡 일어나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노즈도름의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더니, 올리버의 몸이 공중에 떠올라 노즈도름 앞으로 끌려왔다.
올리버가 허공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노즈도름의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하자, 올리버는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네놈은 나를 기만한 대가를 영원토록 치르게 될 것이다.”
노즈도름의 냉혹한 목소리에 올리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내가 끼어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즈도름 님, 제가 그놈한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영혼을 뽑아 가디언으로 만들 생각이다. 질문이 아니라 고문을 해도 무방하느니라.”
레어에서 상대한 가디언이 굉장한 검술을 발휘하더니, 누군가의 영혼을 뽑아 만든 것이었던 모양.
괜스레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궁금증부터 풀기로 했다.
“이봐, 올리버. 나를 속인 이유가 뭐지? 당신과는 딱히 척을 진 기억이 없는데.”
올리버는 망설이다가 노즈도름이 두려운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그, 그것은 어차피 이곳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네놈을 잡으면 귀족 지위를 준다고 약속했다. 망해 버릴 나라의 삼 왕자보다 제국의 귀족이 훨씬 좋은 게 당연하지 않나?”
놈은 드라코리치에게 연합이 멸망하리라 확신한 것 같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겠지.’
시장도 그렇고, 올리버도 그렇고.
결국은 제국의 꼬임에 넘어가 나를 해하려 한 것이었다.
“드라코리치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어, 어차피 왕위는 큰 형님의 것이 될 텐데, 막는다고 해서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제국의 귀족이 되는 것이 훨씬 낫다.”
“제국과는 어떻게 줄이 닿았지?”
“시장이 연결해 주었다. 그도 나처럼 제국의 귀족이 되기로 했다.”
올리버는 한번 입을 열자 술술 불기 시작했다.
나는 놈에게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연합 중에 또 누가 제국 측에 붙었나?”
“모, 모른다. 그것은 정말 몰라! 시장이 주선해 준 후로는 계속 개인적으로 연락했다. 그러니 누가 제국에 붙었는지는 아는 건 시장뿐이야.”
옆에서 노즈도름이 눈빛을 빛내고 있는 상황.
올리버의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어 노즈도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제발 살려 줘! 내가 잘못했다, 제발!”
그러자 올리버가 내게 매달렸다.
노즈도름에게는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뭘 할 틈도 없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노즈도름이 손아귀로 올리버를 움켜쥐어 버렸다.
그러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너희들은 정해수를 도와라. 이번에도 나를 실망케 하면, 그때는 너희의 이름이 더 이상 이 땅에 남지 않을 것이다.”
노즈도름의 말에 왕족들이 몸을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
그리고 왕은 날아오른 노즈도름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 * *
노즈도름이 남긴 말 덕분에 나는 왕과 독대를 할 수 있었다.
갑과 을이 너무도 명확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드라코리치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최대한 뜯어내려 노력했다.
먼저 로치데일에 남겨져 있던 병력을 최소한만 남겨 두고 바리살로 보내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왕가 소유의 마력이 포함된 아이템들을 모조리 수거했다.
드래곤의 레어에서 얻은 것들이 충분했지만, 많아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인벤토리에 아이템을 모조리 긁어 넣고, 왕실 소유의 최고의 명마들이 끄는 마차를 준비시켰다.
내가 이것저것 요구하는데도 왕은 순종적이었다.
드래곤의 분노만 피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정해수 님, 제발 잘 부탁드립니다. 부디 위대한 분께 저희가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공손한 태도로 직접 배웅하는 왕의 인사를 받으며, 우리는 바리살로의 여정에 올랐다.
“주인, 이 마차 엄청 편해. 하나도 안 흔들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지, 루스의 말대로 마차는 굉장히 편했다.
게다가 명마가 끄는 마차답게, 속도도 빨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살까지는 열흘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거리의 한계와 틈틈이 달려드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막 바리살의 성벽이 먼발치에 보일 즈음, 바리살의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