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71화>
준비해 놓았던 마법 함정은 모조리 사용해 버렸다.
연합에서 받은 아이템은 물론이고, 내가 가지고 있던 재료도 대부분 써 버렸다.
‘아이템을 다시 구할 방법이 없을까?’
일단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가 아는 던전을 모두 공략하면 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정보는 대부분 제국 내의 던전에 관한 것이다.
게다가 일일이 던전을 돌며 아이템을 모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히드라를 보냈으니…… 보름 정도?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 전에는 직접 움직일 거야.’
재미 삼아 보내는 병력들이 모두 막히면, 결국 드라코리치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막 고민이 깊어질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해수 님, 혹시 깨어나셨습니까? 저, 아델입니다.”
목소리의 정체는 부하라의 사절 대표인 아델 바두르였다.
“일어났습니다. 들어오세요.”
곧 문이 열리고 아델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델의 옆에는 매부리코의 음침한 인상을 한 중년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음? 저 사람은…….’
중년인은 이전에 연합 회의에서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서쪽 군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 로치데일의 삼 왕자이자 사절단 대표였다.
이름은 올리버 라스본.
의아해진 내가 그를 쳐다보는 사이, 아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올리버의 인사도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로치데일의 올리버 라스본이라고 합니다. 회의에서 뵌 적이 있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몇 마디 인사가 오갔을 때, 아델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그 붉은 옷을 입은 자들에 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황가수호대의 정체를 알려 줘도 될 것인가?
괜히 그들의 정체를 알렸다가 연합이 내게서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드라코리치가 들이닥칠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와서 제국 측에 붙어 봐야 연합에 이로울 것이 없으니, 말해도 상관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아델 님, 그들은 제국의 황가수호대입니다. 황제 직속 전투 부대라고 할 수 있지요. 아시다시피 저와 제국의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몬스터와 싸우는 중에 들이닥쳐 공격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으음, 그렇군요. 굉장한 강자들 같던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델은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는데,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해수 님.”
그것은 올리버의 목소리였다.
내가 돌아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말씀하세요.”
“며칠 전 전투에서 엄청난 폭발을 보았습니다. 혹시 연합에서 드린 아이템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예, 맞습니다. 연합에서 받은 아이템으로 설치해 두었던 마법 함정을 사용했습니다. 워낙 위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왠지 득의한 표정을 지은 올리버가 재차 질문해 왔다.
“혹시 여분의 아이템이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안 그래도 함정을 다시 설치하기 위해 아이템을 구해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아쉽다는 듯 대답하자, 올리버는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저한테 아이템을 구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껏 연합에서 드린 것보다 더 좋은 물건을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내가 놀라는 사이 올리버의 말이 이어졌다.
“본국의 변방에 큰 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버려진 드래곤의 레어가 있습니다. 그곳에 살던 드래곤은 이미 예전에 죽어 버렸고, 레어만 남은 상태지요.”
입술을 한 번 핥은 올리버가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정해수 님이라면 분명 가디언을 뚫어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 안에 든 보물은 모두 우리의 것이지요.”
결국 버려진 드래곤 레어를 털어서 아이템을 구하자는 말이었다.
올리버의 말대로만 된다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법 함정을 만들 아이템뿐 아니라, 일행이 사용할 장비와 루스에게 먹일 것까지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올리버 님, 이제 드라코리치가 쳐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레어에 다녀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본국 수도로 바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 스크롤이 있습니다. 본국 수도에서 레어까지는 이틀 정도가 걸리는 거리이니 이동 시간을 절약할 수 있지요.”
자신만만한 올리버의 말에도 나는 당장 답하지 않았다.
레어까지 이틀이지만, 돌아올 때는 스크롤을 사용할 수 없으니 시간이 더 걸린다.
로치데일에서 이곳 바리살까지는 빠르게 이동해도 열흘은 잡아야 한다.
‘이동 시간만 해도 왕복 보름 가까이 걸리는군. 시간이 너무 빠듯해.’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돌아보니 휴고가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서 있었다.
“대장, 식사부터 하시지요. 이틀이나 굶으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녀석이 음식을 내려놓자 아델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거, 제가 마음만 급해서 죄송합니다. 얼른 식사부터 하십시오.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자 올리버가 이어서 말했다.
“제가 드린 말씀은 잘 생각해 보세요. 다녀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둘이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자 휴고가 슬쩍 물어 왔다.
“무슨 말씀 나누셨습니까? 분위기가 심각하던데, 방금 막 일어난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인지. 거참.”
녀석은 내가 식사도 못 한 채,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얼른 음식을 먹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나는 차분히 식사를 하며 올리버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루스도 방으로 돌아왔다.
볼이 볼록한 것이 입안에 음식이 가득 든 것 같았는데, 손에도 한가득 먹을 것을 들고 있었다.
“주인, 여기 밥이 너무 맛있어! 주인도 많이 먹어.”
물자가 풍부한 서쪽 지방 음식이 녀석의 마음에 든 모양.
“그래, 너도 실컷 먹어 둬라. 곧 있으면 또 떠나야 할 것 같으니.”
“응? 왜 또 어디 가게?”
루스가 깜짝 놀라 물어 왔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일.
나는 녀석에게 그저 미소만 지어 주고는 식사를 계속했다.
* * *
결과적으로 올리버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
그렇다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만히 앉아 허비할 수도 없으니, 드래곤의 레어로 가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바로 다음 날, 우리는 스크롤을 사용해 로치데일의 수도에 도착했다.
이미 이곳으로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딱히 번거로운 절차 없이 바로 드래곤의 레어로 향하게 되었다.
일행은 우리를 제외하면, 올리버와 그를 수행하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로치데일의 삼 왕자인 올리버가 위험한 여정에 굳이 동행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드래곤 레어의 위치가 워낙 은밀하여, 로치데일에서도 왕족 중 몇 명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이틀 동안 빠르게 이동하자 험준한 산맥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들 힘을 냅시다.”
올리버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일행을 독려했다.
오는 길에 재앙에 오염된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몇 번 있었다.
그 와중에 위험한 적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올리버는 의연하게 버텨 내었다.
‘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긍정적인 성격이군.’
왠지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던 첫인상과는 달리 올리버는 생각보다 밝고 적극적이었다.
사실 어딘지 들떠 보이기까지 해서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험준한 산맥을 몇 시간쯤 오르자, 우리는 드래곤 레어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워낙 산이 깊고 근처에 강한 몬스터가 많아, 위치를 알아도 웬만한 사람은 찾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저기 움푹 파인 위치에 올라서시면 됩니다. 그럼 저절로 동굴 안으로 이동될 거예요.”
올리버가 레어로 들어가는 방법을 설명했다.
로치데일의 왕가와 이곳에 살던 드래곤과는, 오랜 옛날 모종의 사건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곳에 대한 정보가 로치데일 왕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고 올리버가 말했었다.
나는 휴고와 루스를 데리고, 올리버의 말대로 바위 위로 이동했다.
그러자 발아래에서 희미한 빛이 솟아오르더니 마법진이 가동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올리버가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잘 가요, 정해수 님.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후후.”
웃고 있었지만, 왠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그리고 오는 길에 보였던 밝은 표정과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찜찜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전에 나와 일행은 레어 안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주인, 아까 그놈 냄새가 안 좋아. 오는 길에도 좀 이상하긴 했는데……. 방금 전엔 진짜 안 좋은 냄새가 났어.”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는지, 바로 루스의 말이 들려왔다.
“대장, 어떻게 합니까?”
루스의 직감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이제 휴고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휴고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갈 수는 없다.
그리고 나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가자. 되돌아가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내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가리키자 휴고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엇, 진짜 나갈 길이 없네요.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대장.”
주위는 어두운 동굴이었는데, 뒤는 꽉 막혀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나, 마법진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래, 일단 가 보자.”
그렇게 말한 후 나는 일행을 이끌고 앞을 향해 걸었다.
동굴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았다.
인공이 가미된 듯, 반듯하게 닦인 통로가 한길로 쭉 이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시계 방향으로 한 번씩 꺾는 것이, 아마도 위에서 보면 각진 달팽이 껍질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루스, 혹시 주위에 사람이나 몬스터 냄새 나?”
“아니, 아무 냄새도 안 나. 살아 있는 게 없는 거 같아.”
가디언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물어본 질문에 루스가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마음으로 한참을 더 나아갔을 때, 통로 저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잠시 후 반대편 모퉁이를 돌아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황동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다.
“골렘……이라기엔 좀 달라 보이는군. 저게 뭐지?”
2미터 정도 되는 키에 단단해 보이는 금속 외피를 두른 모습.
오른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는데, 걷는 모습이 금속답지 않게 굉장히 부드러웠다.
“대장, 저게 가디언인 것 같은데요? 꼭 사람같이 생겼네요. 근데…… 덤벼들 것 같습니다.”
철컹-
휴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디언은 맞은편에 멈춰섰다.
그리고 장검을 들어 우리를 가리켰다.
적당히 굽힌 무릎과 균형 잡힌 상체의 모습이 잘 단련된 기사를 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곳까지 온 이상, 가디언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상황.
나는 칼을 뽑아 들며 놈에게 짓쳐들어갔다.
챙-
여의검과 가디언의 칼이 부딪치자 경쾌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두 쪽 모두 오러를 뽑아 올린 상태인 것을 생각하면 소리가 너무 가벼웠다.
‘이 자식, 엄청 빠르잖아! 게다가 검술이…….’
가디언은 민첩할 뿐 아니라 굉장히 뛰어난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교묘하게 날을 틀어 충격을 흘려 낸 탓에 충돌음이 약했던 것이다.
잠시 놀라는 사이, 놈의 검이 내 가슴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이번에도 몬스터와의 싸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예리한 기술.
‘황가수호대나 마스터보다도 훨씬 더 윗줄이다.’
가디언은 내뿜는 기운도 강했고, 검술 또한 굉장히 뛰어났다.
하지만 나는 가디언의 찌르기를 굳이 피하려 들지 않았다.
찔러 들어오는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언제든 방향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내가 피하는 순간, 놈의 검은 언제든 방향을 바꾸어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커져라.’
나는 대신 여의검의 크기를 조금 키웠다.
그리고 검면으로 찌르기를 막았다.
쾅-
충돌 순간 놈이 검을 비틀어 나를 노렸지만, 그 또한 이미 예상하고 있어 막아 낼 수 있었다.
콰르르르-
그때 옆에서 루스의 불꽃이 가디언을 덮쳤다.
그러자 가디언의 신형이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