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59화>
여전히 뒤에서 공간이 얼어붙어 왔지만, 앞으로 걷기만 해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휴고도 얼른 옆으로 따라붙었다.
나는 그를 보며 말했다.
“휴고, 얼음이 다 녹으면 길을 뚫어라.”
휴고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왔다.
“예, 한 방 날리겠습니다.”
“그래, 크게 한 방 날려라.”
그러고는 틈이 생기기를 기다렸고, 드디어 얼음이 녹으며 생긴 길이 다크엘프 주술사에게 닿았다.
“헥, 헤엑- 주인, 나 이제 힘들어.”
힘을 많이 쓴 루스는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래, 고생했다. 이제 뒤에서 쉬고 있어라.”
막 루스에게 말했을 때 다크엘프 주술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놈은 적잖이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구나, 하찮은 피조물이 이 정도의 불길을 만들어 내다니.”
놈이 루스를 보며 한마디 하더니 이윽고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어차피 놈은 드라코리치의 노예에 불과했다. 놈을 통해 뭔가를 더 알아내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니 놈이 더 이상 마음대로 하게 둘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얼른 휴고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휴고가 앞으로 달려 나갔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다크엘프 주술사가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달리는 휴고의 앞으로 얼음으로 된 장벽이 생겨났다.
놈은 일단 얼음벽으로 방어를 한 뒤 다른 주문을 외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휴고의 망치가 휘둘러졌다.
콰콰콰앙-!
얼음 성이 부르르 떨리더니 눈앞의 얼음 장벽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휴고가 멸세폭을 날린 것이다.
나는 멸세폭의 반동으로 굳어 있는 휴고의 어깨를 잡아 뒤로 던지며 외쳤다.
“루스, 받아라!”
그 후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바람의 걸음.’
그사이 다크엘프 주술사가 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놈의 앞에는 다시 얼음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점멸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으니까.
‘점멸.’
얼른 얼음 장벽 너머로 순간 이동했다. 그러자 놈이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그 순간, ‘바람의 걸음’의 효과를 받은 내 몸이 쏜살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놈의 앞에 도착한 나는 검을 휘둘렀다.
‘멸세폭.’
콰콰콰콰쾅-!
가히 압도적인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안 통했다!’
멸세폭이 명중하려는 찰나, 놈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에서 빛이 나더니, 앞에 반투명한 얼음의 막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과 충돌한 멸세폭은 반동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찰나에 생명이 오가는 전투 중. 계속 신경 쓸 수는 없다.
멸세폭이 막히는 짧은 순간 놈은 뒤로 몸을 뺀 상태.
나는 얼른 따라붙으며 다시 한번 스킬을 사용했다.
‘언제까지 막나 한번 보자. 멸세폭!’
콰콰콰콰쾅-!
다시 한번 세상을 파괴하는 폭발이 터져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놈의 앞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든 직격만은 피했는지,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여전히 입을 웅얼거리는 것이, 그 와중에도 무언가 수를 쓰려는 모양.
‘쓰게 둘 것 같으냐?’
하지만 나도 두 번 연속 멸세폭을 사용한 상태. 몸이 빠르게 움직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거리를 격하고도 상대를 처치할 만한 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왼손을 들며 외쳤다.
“죽어라!”
순간 원혼의 거울에서 검푸른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다크엘프 주술사의 눈이 놀라 치떠지는 순간.
스아아앗-
광선이 놈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다.
털썩-
잠시 후 머리가 사라진 다크엘프 주술사가 옆으로 쓰러졌다.
“후우- 어째 쉬운 놈이 하나도 없네.”
나는 잠시 툴툴거린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주술사가 죽었음에도 얼음 성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사실, 냉기 면역과 루스의 불길을 믿고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그래도 무사히 끝냈으니 된 거지.’
순간적으로 심장 수호자의 내단을 생각해 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쉬는 사이 일행이 다가왔다.
“주인, 휴고 여기 있어.”
가만 보니 멸세폭의 후유증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휴고를 루스가 질질 끌고 온 것.
“그래, 거기 잘 놔둬라.”
휴고도 그간 스탯이 많이 올랐다. 그만큼 멸세폭의 반동도 더 커진 상태.
한 번 사용 후 저렇게 시체처럼 꼼짝도 못 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도대체 왜 다음 스킬이 개화하지 않는 거지?’
분명 회귀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회귀 전, 첫 번째 재앙 때 이미 휴고는 두 번째 스킬을 개화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늦어도 너무 늦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성장세만 놓고 보면, 딱히 뒤처지지 않는데……’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루스를 시켜 휴고에게 포션을 좀 끼얹어 주게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통제하던 존재가 사라진 상황에서 몬스터들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지독하긴 하겠지만, 일사불란하게 성벽을 공략하려 들지는 않을 거야.’
막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머리가 사라진 다크엘프 주술사가 입고 있는 갑옷.
놈이 죽었음에도 갑옷은 푸르스름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다가가 갑옷을 벗겨 내자 정보가 떠올랐다.
[빙정의 수호자(S. 갑옷)]
- 북쪽 땅끝의 지배자, 블루 드래곤 벨커시모탈이 천 년 동안 녹지 않은 얼음의 정수를 이용해 만든 갑옷. 하루에 한 번 어떤 공격이라도 막을 수 있는 얼음 보호막을 만들어 낸다.
“오오! 대박이군.”
아이템을 확인한 순간,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만큼 갑옷은 훌륭했다.
게다가 예상외의 소득이라는 점에서 더욱 흡족했다.
‘하지만…… 내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내게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절대불변이 있기 때문이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별 의미가 없어. 그래, 차라리 잘되었군.’
안 그래도 두 번째 스킬의 개화가 늦어지는 휴고 때문에 신경이 쓰였는데, 이걸 입혀 놓으면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갑옷은 휴고의 차지가 되었다.
잠시 후, 겨우 몸을 일으킨 휴고가 내게 말했다.
“대장, 저한테 너무 과분한 아이템 같습니다. 대장이 쓰십시오.”
“그런 말은 루스보다 강해지고 나서 해라. 주면 주는 대로 좀 받고.”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휴고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큭, 크억. 알았습니다. 이제 그만……!”
녀석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루스의 심통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못 먹어. 요즘 다 이 모양이야!”
녀석은 죽은 다크엘프 주술사의 다리를 들어 보더니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재앙의 기운이 세상으로 퍼져 나간 이후, 루스의 입맛에 맞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염된 드래곤 비늘도 잘 소화시켰었는데, 이건 못 먹는군. 재앙이 독하긴 독한 모양이야.’
당장 어쩔 수 없는 문제.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그래도 내단 먹었잖아. 너무 섭섭해하지 마라. 또 맛있는 게 나오겠지.”
“앗, 맞아. 그거 엄청 맛있었어. 주인, 하나만 더 주면 안 돼?”
주고 싶어도 더 이상 없으니 방법이 없다.
나는 아쉬워하는 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모처럼 녀석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호문쿨루스 - 루스(A. 키메라)]
소유자 : 정해수
근력 : 6(S)
민첩 : 4(S)
체력 : 52(S)
마력 : 89(A)
스킬
-신체 변형
-포식
-초재생
확실히 많이 성장한 것이 보였다.
특히, 굉장히 뒤쳐져 있던 마력이 내단을 먹고 많이 오른 것이 눈에 띄었다.
‘A등급인데 벌써 스탯이 세 가지나 S급에 들어섰군. 정말 잘 큰단 말이지. 그나저나 포식으로 얻은 능력들은 상태창에 표시되지 않아서 어느 정돈지 알 수가 없군.’
사실 소환수를 키워 본 적이 없다 보니 녀석의 성장이 어떤 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 시에 발목 잡지 않고 오히려 한 번씩 큰 활약을 해 주니,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바깥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난간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호오, 벌써 성 밖으로 치고 나왔군. 그나저나 저 양반, 잘 싸우네.’
다크엘프 주술사가 죽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산만해졌다.
수도 성벽 가까이 있던 놈들은 여전히 성벽을 공격했지만, 뒤쪽에 있던 것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흩어진 상태.
그 모습을 수도 안에서도 눈치챈 모양인지, 라넬디드가 직접 병력을 끌고 성을 나와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는데, 옆에서 휴고가 다가왔다.
녀석은 이제 좀 살 만한지, 표정이 편해 보였다.
나와 나란히 난간에 서서 밑을 보던 휴고가 라넬디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 엄청 강하시네요. 그리고 일반 병사들도 진짜 강하고요. 노르트인이 타고난 전사라고 넬도르가 엄청 자랑했었는데, 허튼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장.”
휴고의 말대로 노르트 인들은 확실히 강했다.
하지만 제국의 병사들과는 좀 다른 느낌의 강함이었다.
“진짜 야성적으로 잘 싸운단 말이야.”
“맞습니다. 하필 털가죽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언뜻 누가 몬스턴지 모를 지경입니다, 대장.”
잠시 바깥의 전투를 구경하다 보니, 휴고의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된 것 같아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후, 일행을 이끌고 얼음 성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수도 성벽 주위의 몬스터들은 거의 박멸된 상태였다.
‘우두머리만 처치하면 그 뒤는 문제없다고 하더니, 진짜 장담대로 되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수도로 다가가자 때마침 전투를 끝낸 라넬디드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이보게, 해수. 정말 고맙네. 자넨 진짜 우리 노르트의 은인일세.”
사실 내가 그들에게 베푼 은혜가 절대 가볍지 않다. 가만두면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할 테니까.
하지만 여기서 그걸 말할 수는 없으니, 조금 겸양을 떨었다.
“괜찮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차후에 재앙과 싸울 때 써야 할 힘을 여기서 허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부르면 달려와서 열심히 싸워라. 그때 가서 딴소리하면 안 된다.
내 말의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라넬디드의 표정이 한층 더 진중해졌다.
“물론이네. 자네에게 은혜를 갚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노르트는 이 땅을 재앙에게 뺏길 생각이 없네. 걱정하지 말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라넬디드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그 안에 있는 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자네 진짜 대단한 전사군. 다시 한번 말하지. 노르트의 대부족장으로서 정식으로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겠네.”
말과 함께 라넬디드가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있던 노르트인들이 그 모습에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환호를 내질렀다.
“와아아- 노르트의 은인 만세!”
“노르트 만세! 우리는 이긴다!”
라넬디드도 어느새 고개를 들고 노르트인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는 전사다. 우리는 친구를 저버리지 않는다! 노르트는 승리한다!”
라넬디드의 외침에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역시 보통이 아니야. 그 와중에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다니, 대부족장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군.’
한동안 재앙이나 이주 등의 문제로 노르트에는 괴로운 일만 있었다.
이번 싸움으로 재앙을 물리친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상황.
라넬디드는 싸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나의 이미지를 사기 진작에 이용한 것이다.
‘이런 이용이야, 기분 좋게 받아들여 주지.’
우리는 전장을 정리하고 수도로 들어왔다.
내부는 여전히 이주 준비로 바빴다.
‘당장 할 일은 다 했으니, 좀 쉬어야 되겠다.’
이주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크게 할 일이 없을 것이다.
* * *
며칠이 지난 후, 드디어 이주가 거의 끝났다.
라넬디드는 이미 라로프로 떠났고, 수도에는 마무리를 위해 넬리언이 남아 있었다.
이제 아주 소수의 일반인을 제외하면 전사 몇 명만 남은 상황.
넬리언은 성문 근처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넬리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군요. 이제 저들을 이끌고 출발하시는 겁니까?”
넬리언이 웃으며 대답해왔다.
“그렇네. 이게 다 자네 덕분이네. 고맙네, 고마워. 자네를 볼 때마다 진짜 여동생이 있었어야 된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다른 곳에 눈 돌릴 틈도 없습니다.”
사실 농담이나 하려고 그에게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계속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넬리언에게 팔찌의 스킬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