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56화>
나는 몰려드는 나가를 보며 협곡의 입구로 내달렸다.
막 나가의 무리와 마주칠 찰나, 내 양옆의 바닥에서 빛이 솟아났다.
그것은 아나투스가 사용한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에서 주먹만 한 불덩이가 연이어 생겨나더니 나가들에게 날아갔다.
쾅- 쾅- 쾅-!
불덩이에 맞은 나가들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별 준비 과정이나 재료 없이 만들어진 마법진인만큼 위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앞쪽의 나가들을 몇 마리쯤 처치한 것이 끝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공간이 생겼다.
나는 그 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협곡 깊숙이 들어서자 나가들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몰려들었다.
‘바람의 걸음.’
나는 스킬을 사용하여 속도를 한층 더 높였다.
속도가 최고점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나가들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때를 맞춰 나는 왼손을 들어 올렸다.
‘원혼의 거울.’
쓰아아앗-
손바닥에서 발사된 광선이 빼곡하게 뭉친 나가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광선의 경로에 있던 나가들이 단숨에 녹아 사라졌다.
그러자 내 눈앞이 뻥 뚫리며 길이 생겨났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전력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이 다시 틀어 막히기 시작했다.
‘후우, 완전 스킬 사용 능력 테스트받는 기분이야.’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눈앞의 나가가 주먹을 휘둘러 오고 있었다.
쾅-
나는 검을 휘둘러 놈을 날려 버린 후 한 걸음씩 나아갔다.
쾅! 쾅! 쾅-!
연이어 덤벼드는 놈들을 베고 또 베면서 꾸역꾸역 앞으로 나갔지만, 얼마 못 가고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는 안 되겠다.’
너무 많은 수의 나가가 빼곡히 모여들었다.
더는 지금처럼 뚫고 나갈 수 없는 상황.
결국 나는 먼발치를 향해 스킬을 사용했다.
‘점멸.’
스팟-
순간, 사라졌던 내 몸이 점멸의 최대 사정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이제 동굴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던 덩치 큰 놈이 이쪽의 이변을 눈치채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막 놈의 주먹이 내게 휘둘러져 오는 순간, 나는 검을 횡으로 휘두르며 스킬을 사용했다.
‘멸세폭.’
콰콰콰콰쾅-!
강력한 폭발과 함께 놈이 옆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꿈틀거리는 것을 보니 아직 죽지는 않은 모양.
‘재앙에 오염되어서 그런가, 엄청 질기군.’
손에 느껴지는 반동도 장난이 아니었다.
어쨌든 앞쪽에 다시 길이 뚫렸고, 나는 계속 나아갔다.
머지않아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나가들이 보였다.
그 틈으로 루스와 휴고가 분전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주인!”
루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순간 루스의 몸에서 시뻘건 불길이 나가들을 향해 쏟아졌다.
이제껏 상황을 생각해 힘을 아끼고 있었던 모양.
하지만 나를 발견하자 자제력을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옆에서 뭐라고 얘기하는 휴고의 모습도 보였지만, 루스의 불꽃에 가려 잘 들리지 않았다.
‘녀석, 엄청 반가워하네.’
내 입에도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앞에는 한 무리의 나가가 남아 있었다.
‘어차피 동굴에 들어가면 다시 재정비를 해야 될 테니 아끼지 말자.’
나는 루스의 불길에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가 무리의 뒤에 다시 한번 멸세폭을 날렸다.
‘멸세폭.’
콰콰콰콰쾅-!
나가들이 혈편이 되어 사방으로 날아갔다.
‘원혼의 거울.’
싸아아-
나머지 잔당을 원혼의 거울로 녹여 버린 후,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동굴로 들어갔다.
“주인! 주인!”
동굴로 들어서자마자 루스가 철퍼덕 안겨 왔다.
“오랜만이다, 루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휴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은 여전히 입구 쪽에 서서 고개만 슬쩍 돌리고 있었다.
“대장, 진짜 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위기 때 딱 나타나 주시는군요. 왠지 이쯤 되면 대장이 나타나서 구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하!”
녀석도 어지간히 반가웠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래, 그나마 때맞춰 온 것 같아 다행이다. 몸은 좀 괜찮냐?”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탈출하는 게 문제라 그렇지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다 방법이 있다.”
“역시 대장. 그럴 줄 알았습니다.”
휴고와 대화 중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해수. 진짜 고마운 시점에 나타났군. 그 방법이란 거, 나도 좀 들어 볼 수 있을까?”
어느새 넬도르가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생을 적잖이 한 듯, 넬도르의 몸에도 곳곳에 상처가 보였다.
“넬도르, 몸은 좀 괜찮나? 나갈 길은 내가 만들어 줄 테니, 일단 몸부터 추슬러라.”
“하하하, 제국에서 자네와 만난 건 진짜 큰 행운이었던 거 같군.”
넬도르는 이쪽을 한 번 콱 하고 껴안더니, 자리를 잡고 쉬기 시작했다. 떠들 체력을 아껴 탈출에 쓸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수가 많지 않았다.
‘음, 다해서 스물도 채 안 되는군.’
출발한 병력만 수십 명이었고, 고립된 부족원들도 최소한 수십은 되었을 텐데.
게다가 남아 있는 소수 부족원들은 대부분 어린아이였다.
아무래도 부족의 미래를 위해 어른들이 먼저 희생한 것 같았다.
‘어차피 도주가 목적이니, 수가 적은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조금 씁쓸하네.’
오기 전까지는 여차하면 버리고 갈 생각도 했었지만, 아이들만 살아남은 것을 보자 어떻게든 살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어오면서 한바탕 쓸어버린 덕에 입구는 휴고 혼자서도 지킬 만했다.
루스는 여전히 내 옆구리에 딱 들러붙은 상태.
나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면서 그리폰의 사체를 같이 꺼내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나면 루스에게 주기로 했었던 것이 기억난 것이다.
“루스, 이거 먹어라. 뚫고 나가려면 먹고 힘내야지.”
딱 붙어있던 녀석은 그제야 떨어져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앗, 아앗! 고기!”
밖에 나가가 잔뜩 있는데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녀석 입에는 이쪽이 더 맞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자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나는 넬도르와 일행을 불러다 놓고 작전을 설명했다.
“밖에 아군이 있다. 내가 신호탄을 쏘면 그가 마법으로 길을 열어줄 거야. 하지만 무한정 지속되지는 않아. 그러니 작전이 시작되면 최대한 빠르게 달려서 벗어나야 해.”
이야기를 들은 넬도르가 물어 왔다.
“아군? 그건 누군가? 그러고 보니 자네 여긴 어떻게 찾아왔나? 휴고 말로는 자네한테 뭔 특별한 능력이 있다던데. 그걸로 찾은 건가?”
“자네 부친과 만나 이야기하는데 전령이 뛰어 들어왔어. 그래서 내가 먼저 출발했지. 곧 있으면 자네 부친이 군대를 이끌고 오실 거야. 하지만 여기서 그때까지 버티긴 힘들어 보이는군.”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입구에서는 나가들이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것을 몇 남지 않은 넬도르의 부하들이 힘겹게 막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넬도르가 말해 왔다.
“그렇군. 자네 말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근데 그 아군이란 자는 믿을 만한가?”
“실력은 의심할 필요 없어. 일은 확실하게 할 테니 걱정 마.”
순간 루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인, 소환한 거야?”
“그래.”
내 대답에 루스가 씩 웃었다. 아마도 내 계획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길을 뚫은 후야. 협곡을 나가면 나가들이 쫓아오기 힘들게 협곡 입구에 마법을 쓸 거야. 하지만 영원히 막아 놓을 수는 없으니까, 그동안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해.”
넬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스가 다시 물어 왔다.
“주인, 그럼 평소처럼 할 거야?”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왔다.
“그래, 나는 혼자 남아서 뒤처리를 하고 갈 테니, 너는 열심히 달려라.”
“응, 그 대신 또 사라지면 안 돼!”
“알았다. 이제 떨어질 일 없으니 걱정 마라.”
그때 휴고가 끼어들며 말했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대장 없는 동안 루스가 얼마나 보채던지. 제가 돌보느라 얼마나 고…… 컥!”
“이 돼지야, 조용해!”
휴고의 옆구리에 어느새 루스의 주먹이 파고들어 있었다.
‘여전하구만.’
티격태격하는 녀석들을 보자,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푸근해져 왔다.
잠시 후 동굴 입구에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자, 이제 시작하자!”
나는 인벤토리에서 신호탄을 꺼내 쏘아 올렸다.
삐유우우-
신호가 올라가고 조금 뒤.
우우웅-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가자!”
나는 앞장서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나가들이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칼을 휘둘러 앞쪽의 몇 놈을 날려 버린 순간.
콰드드드드-!
협곡 입구 쪽에서부터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름이 2미터 정도 되는 반투명한 원기둥이, 이쪽을 향해 밀고 들어오며 나가를 쓸어버리고 있었다.
빠르게 다가온 원기둥의 끝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끝부분이 열리며 거대한 빨대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달려!”
나는 일행을 재촉해 앞으로 뛰었다.
사람이 다 들어오자 원기둥의 입구가 다시 막혔다.
쿵! 쿵!
그사이 나가들이 밖에서 원기둥을 두드리고 있었다.
‘내구도의 한계가 있다. 빨리 움직여야 해.’
원기둥은 충격이 누적되면 결국 깨어진다.
그러니 통로가 부서지기 전에 서둘러 협곡을 벗어나야 한다.
“뛰어! 뛰어! 깨지기 전에 못 나가면 다 죽는다!”
나는 계속 재촉해 가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다들 아이를 안고 있어 원하는 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쩌저적-
어느 순간 통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를 본 나는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빨리! 빨리! 빨리!”
계속 일행을 닦달한 결과, 다행히 통로가 부서지기 전에 겨우 협곡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일행들이 계속 달려나가는 동안, 나는 미리 얘기 한 대로 멈춰 섰다.
“주인, 빨리 처리하고 와!”
달리며 말하는 루스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후, 아나투스에게 향했다.
“아나투스, 빨리 발동해!”
“예, 마스터. 이미 발동 중입니다.”
말대로 아나투스의 몸에서 시작된 기운이 땅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바닥에서 불길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불은 협곡 입구를 막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대포로 불의 장벽을 만들다니, 신기하군. 장비에 포함된 마나만 뽑아 쓴 건가?’
마법진이 완전히 활성화되자, 불길은 이제 협곡 입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치 그 무엇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듯이.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아나투스에게 다가갔다.
“잘했다, 아나투스. 훌륭하구나.”
아나투스는 칭찬이 기꺼운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주신 재료가 생각보다 뛰어나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놈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푸욱-!
재빨리 뽑힌 내 칼이 놈의 심장에 틀어박혔다.
아나투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나는 칼을 감싼 강기공에 마력을 더했다.
칼끝에서 놈의 심장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 어째서…….”
쓰러지는 놈의 표정에는 의문과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그 어째서가 문제야. 나도 그걸 알아내기 위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라고. 도대체 나한테 어째서 그런 짓을 했냐는 말이지.”
놈의 시체를 향해 잠시 혼잣말을 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얼른 놈의 시체를 들어 불의 장벽 너머로 집어 던졌다.
소환 영웅들의 시체는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툭-
날아간 시체가 협곡의 벽 옆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에 맞춰 내가 스킬을 사용했다.
‘시체 폭발.’
콰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협곡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완전히 막혀 버린 것은 아니지만 이동에 방해는 될 것이다.
“여기까진 계획대로 잘되었는데…….”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려 기분이 흡족했다.
그 과정에서 아나투스를 죽인 것도, 놈의 기운을 흡수한 것도 좋았다.
하지만 아직 탈출이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그렇게 한동안 달린 끝에 무사히 일행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잘 처리하고 왔다.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나는 궁금해하는 루스와 휴고에게 말해 주고 다시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 * *
재앙의 기운에 오염된 나가 무리는 예상대로 집요하고 끈질겼다.
거의 따라잡힐 뻔한 순간, 때맞춰 등장한 노르트의 군대 덕에 우리는 무사히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넬도르와 소수 부족의 생존자를 구한 것은 내게 큰 이득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까지 넬도르의 친구 정도였던 내 위치가, 목숨을 걸고 이 왕자와 노르트의 아이들을 구한 은인으로 격상한 것이다.
그 덕에 왕궁에서도 가장 좋은 방에서 이렇게 쉬고 있는 중이었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