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54화>
내가 물었을 때 소년은 이미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
“아저씨, 한 번만 도와주세요!”
녀석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동안 애써 침착함을 유지해 왔지만, 아직 애는 애였다.
녀석은 마차가 습격당한 데 이어 마을까지 난리가 나자 더는 참지 못하고 내게 매달려 왔다.
나 역시 그런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살려 놔야 지도든 말이든 얻을 수 있으니.’
길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해서, 나는 빨리 처리하기로 했다.
‘바람의 걸음.’
스킬을 걸고 달리자 몸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나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괴물의 뒤를 향해 접근해 갔다.
괴물의 정체는 머리 둘 달린 오우거.
놈은 재앙에 오염되어 시커먼 기운을 줄줄 흘리면서 마을을 부수고 있었다.
앞쪽에 전사로 보이는 자들이 막아서고 있었지만 역부족인지 벌써 여럿이 다치고 죽은 자도 보였다.
‘확실히 오염되면 너무 강해진다. 이러니 몰살을 당했지.’
회귀 전 노르트를 비롯한 군소 국가들은 두 번째 재앙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멸망했다.
두 번째 재앙이 발발하면 이제껏 보유한 전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막아야 해.’
그사이 나는 오우거의 바로 뒤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놈은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한 상황.
나는 달리는 기세를 빌려 놈의 등을 향해 점프했다.
그리고 놈의 두 개의 머리 정중앙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멸세폭.’
콰콰콰쾅-!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폭음이 터졌다.
그리고 시커먼 살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위력이 많이 증가했군.’
라로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스탯이 더욱 상승했다. 특히 심장 수호자와 어인족 족장은 큰 기운을 주었고, 그 바람에 멸세폭의 위력도 더 증가했다.
쿵-
잠시 생각하는 중에 두 개의 머리가 한꺼번에 사라진 오우거가 쓰러졌다.
그 너머로 놀라 굳어 버린 표정의 사람들이 보였다.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아빠-!”
꼬맹이가 내 옆을 지나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목표는 오우거를 상대하던 전사 중 한 명.
‘저자가 부족장인가 보군.’
아마 그가 소년의 아빠인 것 같았다.
꼬맹이가 적절한 타이밍에 달려간 덕분에 이야기는 한결 쉬워졌다.
잠시 부자상봉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족장의 집에 초대받게 되었다.
추운 기후와 척박한 환경 탓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식사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부족장이 말을 걸어왔다.
“아들놈과 마을을 구해 주신 것은 다시 한번 감사드리겠습니다. 말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식사 끝나는 대로 바로 준비해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들을 구해 주고 마을의 위기까지 막아 주어서 그런지 그의 태도는 굉장히 정중했다.
나도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고맙습니다. 근데 여기서 수도까지 며칠이나 걸립니까?”
루스와 휴고를 떨어트려 놓은 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그동안 녀석들에 대해서는 일부러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걱정해 봐야 어쩔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곧 노르트의 수도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하고 있겠지……. 휴고, 믿는다.’
휴고라면 어떻게든 루스를 데리고 다니며, 잘 처신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수도까지는 말을 타고 열흘쯤 걸리는 거리입니다. 다만 요즈음 몬스터들의 상태가 이상해져서…….”
족장의 말꼬리를 흐렸다.
두 번째 재앙이 시작되면서 몬스터가 변해 버렸으니, 장거리 여행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시간이 문제가 아니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하겠지.’
그때 부족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 플레이어님이시라면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저기 근데…….”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표정.
“왜 그러시는지?”
내가 묻자 족장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몬스터들이 이상해진 후, 수도에서 전언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각 부족이 수도에서 모여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지요. 혹시 수도에 가실 거면, 저희 부족 인원들과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
그 말에 나는 이들과 같이할 때의 손익을 잠깐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이득이라고는 없군. 괜히 시간만 더 걸린다.’
나는 마음을 정하고 부족장에게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서 이동하는 것이 빠르겠군요. 죄송하지만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부족장은 잠깐 실망한 표정이었지만, 예의를 잃지는 않았다.
“역시 그러셨군요. 바쁘신데 저희가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요.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인벤토리에 물자가 남아 있어, 딱히 더 필요한 건 없었다.
“아닙니다. 오늘 하루 묵고,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겠습니다. 지도와 말만 준비해 주십시오.”
“예, 아들 녀석이 쉬실 곳을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부족장은 살짝 웃었다.
다음 날 아침, 부족장과 아들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마을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굳이 안 나오셔도 됩니다. 말만 내주셔도 되었는데…….”
“아닙니다. 은혜를 입고 마땅히 갚지도 못하는 처지에 예의까지 없어서야 쓰겠습니까.”
부족장이 예의 바르게 대답해 왔다.
소년이 부족장에 이어 말했다.
“아저씨, 감사했습니다. 저는 아돌이에요.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어요.”
가만 생각하니 가장 먼저 만난 소년의 이름도 묻지 않았었다.
이름을 듣자 왠지 녀석과는 또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또 보자.”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나는 말을 타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 * *
며칠 후, 나는 높은 목책으로 둘러진 노르트의 수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더 이상 특별한 일은 없었다.
‘몬스터만 빼면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을 나선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말을 잃었다.
밤중에 몬스터가 떼로 나타나 습격을 하는 바람에 말을 지킬 수 없었다.
그 후는 행군과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이제 도착했군. 넬도르를 찾아가면 되겠지?’
부디 휴고와 루스가 무사히 있기를 바라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는 경비병이 열 명도 넘게 서 있었다.
그런데 경비병들은 제국의 도시에서 사람을 검문하는 것과는 태도가 달랐다.
‘사람을 감시하는 게 아니군.’
그들은 편한 자세로 앉아 먼발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체력을 비축하다가 몬스터가 나타나면 바로 달려들려는 모습이다.’
경비병들은 오늘도 이미 전투를 치렀는지, 장비에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들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나를 쳐다봤다.
얼른 성 안으로 안 들어가고 뭐 하냐는 듯한 표정.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걸었다.
“저는 노르트의 이 왕자 넬도르의 친구 정해수라고 합니다. 넬도르에게 안내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경비병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이내 대답해 왔다.
“당신이 바로 그 정해수였군! 하하, 잘되었소. 넬도르 님이 아침저녁으로 어찌나 물으시는지. 이제 당신이 왔으니 그만 시달려도 되겠군.”
그가 반색을 하더니 뒤에 있던 다른 이에게 말했다.
“난 이분 안에 모셔다 드릴 테니, 너흰 일하고 있어라.”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를 끌어당겼다.
“얼른 갑시다, 정해수 님.”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의 뒤를 따랐다.
‘이거 넬도르가 뭐라고 얘길 해 놓은 거야? 그나저나 내가 올 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마 휴고와 루스도 무사히 이곳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내심 안도하며 한참 걸음을 옮기는 중에 경비병의 말이 들려왔다.
“아차, 넬도르 님은 지금 수도에 안 계시오. 아침에 무슨 일이 있다고 급히 나가셨는데……. 이걸 어쩐다? 일단 대족장님 거처로 안내해 드릴 테니, 거기서 물어보시오.”
‘넬도르가 없다고? 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경비병에게 물었다.
“혹시 넬도르가 데려온 외부인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이곳에 있습니까?”
“그들도 아침에 넬도르 님이랑 같이 나가는 거 같던데……. 정확히 기억이 잘 안 나니 그것도 가서 물어보시오.”
몇 분이 지나 큰 건물 앞에 도착했다.
경비병은 기별하러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안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응? 닮았네. 가족인가?’
나타난 자는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남성.
얼굴은 넬도르와 닮았는데, 몸이 넬도르에 비해 훨씬 날렵했다.
남자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귀한 손님을 세워 뒀군.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나는 라넬디드의 첫째 아들 넬리언이오. 만나서 반갑소.”
‘역시 형제였어. 어쩐지 닮았다 했지.’
“저는 정씨 가문의 해수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넬리언과 마주 앉자 미리 준비한 것인지 말린 고기와 술이 바로 나왔다.
음식들을 보며 넬리언은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상황이 썩 좋지 않아 제대로 대접을 못 하는군. 미안하오. 넬도르가 돌아오면, 대족장님과 함께 잔치를 열어 드리겠소.”
몬스터들이 날뛰니 식량 사정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특히 소부족들이 죄다 수도로 모여들고 있는 중이니, 식량 문제는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익히 사정을 아는 입장이니, 나는 정중하게 제의를 거절했다.
“아닙니다. 잔치는 되었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식사나 하지요. 그나저나 넬도르가 밖으로 나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혹시 제 일행들도 따라 나갔습니까?”
그러자 넬리언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새벽에 몬스터 때문에 고립된 부족이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소. 넬도르가 구조를 위해 출동하면서 일행분들을 같이 데리고 간 모양이오.”
‘넬도르……. 내 일행을 공짜로 막 써먹는군.’
마뜩잖았지만, 내 쪽에서 노르트에 원하는 것이 있는 입장이니 넬도르에게 빚을 지워 두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단 먼 길 오셨으니 이곳에서 푹 쉬시오.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다시 합시다.”
“예, 그러도록 하지요.”
나는 넬리언과의 대화를 마치고 숙소를 안내받았다.
저녁에 있을 식사 자리까지는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모처럼 푹 쉴 수 있었다.
똑똑-
한참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해수 님, 대부족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대부족장? 넬도르의 아버지인 라넬디드를 말하는 건가?’
대부족장이면 이곳 노르트의 왕이었다.
안 그래도 그와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따라 나섰다.
안내된 곳은 커다란 원탁이 놓인 넓은 방.
그곳 정면에 말 그대로 거인이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라넬디드인가? 진짜 사람이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라넬디드는 털가죽 조끼를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곰의 대가리로 만든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확실히 왕보다는 대부족장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군.’
라넬디드의 외모를 살피는 사이, 그쪽도 나를 살폈는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크흠. 아버지, 손님 모시고 뭐 하십니까?”
옆에 있던 넬리언이 보다 못해 말을 한 것이었다.
그제야 라넬디드의 입이 열리며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노르트의 대부족장 라넬디드다. 자리에 앉아도 좋다.”
목소리에 기운이 펄펄 끓어 넘쳤다.
‘넬도르의 아버지면 못해도 50살은 넘었을 텐데, 기운이 엄청나네.’
그의 말대로 자리에 앉으며 나도 인사했다.
“저는 정씨 가문의 해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가 앉자 넬리언도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넬도르가 돌아오는 것이 늦어지는지, 셋이서 이야기를 할 모양이었다.
라넬디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플레이어지? 혹시 지금 이곳에 일어나는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몬스터들이 검은 기운에 오염되었지요? 훨씬 더 강해지고 습성도 바뀌었고요.”
“알고 있군. 혹시 그 원인도 알고 있나?”
“예, 그것은 재앙의 기운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재앙이 제국 수도 인근에서 처치되었습니다. 그놈이 죽어 가며 뿌린 기운이 세상의 몬스터들을 오염시켰습니다.”
라넬디드와 넬리언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전조에 불과합니다. 혹시 대륙 북쪽 땅끝에 있는 존재를 아십니까?”
내 말을 들은 라넬디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후 그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저주받은 존재를 말하는 것이냐?”
‘저주받은 존재라. 노르트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군.’
“예, 바로 그 죽어도 죽지 않는 드래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라넬디드의 표정은 더더욱 굳어졌다.
“좀 전에 지금 상황은 전조에 불과하다 했지. 그 말과 저주받은 존재와 관련이 있느냐?”
“예, 바로 그 저주받은 존재가 깨어날 것입니다.”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가 한 말의 의미가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다.
한참 후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라넬디드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쿵쿵쿵-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