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53화>
[옛 친구의 맹약(S. 소모품)]
- 옛 친구의 결코 저버리지 않는 약속이 담긴 물건. 깨트리면 옛 친구를 부를 수 있다.
‘옛 친구를 부른다고? 설마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건가?’
내 궁금증을 눈치챈 건지 옛 친구가 설명해 왔다.
“그걸 깨면 저와 만날 수 있어요. 제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서로 마음이 연결된달까, 그런 거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무 쓸모없는 것 아닌가?
순간 내 얼굴에 실망감이 드러났는지 옛 친구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안 되지만, 힘을 회복하면 그 구슬을 매개로 몸을 이동시킬 수도 있어요. 그러니 소중하게 간직하라구요.”
‘호오, 그렇다는 말이지?’
그 말이 사실이면 확실히 보관할 가치가 있었다.
더 없나 싶어 옛 친구를 바라보니,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듯 옛 친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사용해도 돼요. 사용하고 나면 하나 다시 드릴게요. 물론 제가 보고 싶다고 막 낭비하진 말구요. 만들기 쉽지는 않으니까요.”
표정을 보니 이게 진짜 끝인 모양.
아쉽지만 이쯤 해서 끝내기로 하고, 다음 용건을 꺼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세계의 정수가 도대체 뭡니까?”
내 질문을 들은 옛 친구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가만히 옛 친구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옛 친구가 직접 도와주는 것만큼이나, 세계의 정수에 대한 정보도 내게는 중요했다.
잠시 후, 옛 친구의 입이 열렸다.
“그건 이 세상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하던 것이에요.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 때 사용한 근원이죠.”
뭔가 대단한 이야기인 것 같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왜 마왕의 화신체에서 튀어 나왔습니까? 그리고 라로프의 전설에 정수에 관해 전해지는 것은 왜고?”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옛 친구가 대답해 왔다.
“그건 저도 몰라요. 제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은 맞지만, 세상의 근원에 관여할 정도의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세상의 균형이 무너져 있다는 것이에요. 세계의 정수가 제자리에 있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세계의 정수의 제자리가 어디죠? 내가 정수를 거기 가져다 두면 되는 건가요?”
“제자리는 원래 그걸 가지고 있던 분께 돌려 드리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 방법은 저도 모르겠네요.”
잠시 아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옛 친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그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생각해요.”
뭔가 굉장히 스케일이 큰일에 말려든 기분이었다.
‘세상을 창조할 때 쓰는 물건이라니. 그럼 황제는 이걸 왜 탐내는 거지?’
여전히 황제의 의도에 대해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내 개인의 복수로 끝낼 문제가 아니란 것은 알았다.
나는 복잡해지려는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노르트로 가서 눈앞에 닥친 두 번째 재앙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옛 친구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내보내 줘요. 기왕이면 라로프 말고 바깥으로.”
옛 친구는 몸이 크니 살짝만 움직여도 대륙에 닿을 것이다. 웬만하면 노르트에 가까운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옛 친구의 얼굴이 신비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당신을 보내야 하는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다가오며 내 뺨에 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이야말로 제가 이때까지 살아온 이유예요.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세요. 그러면 돼요. 잊지 말아요, 구원자님. 당신의 일을 하세요.”
옛 친구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라로프의 어머니가 예언을 할 때 보였던 기운이 수백 배쯤 증폭된 느낌.
내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그 기운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옛 친구도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신비한 느낌이 여운이 남아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어느새 이전처럼 돌아온 목소리로 옛 친구가 말했다.
“나가는 건 걱정 말아요. 대륙에 내려 드릴게요. 근데 벌써 가시게요? 저랑 이야기라도 좀 더 하고 가시지.”
나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간은 끌 만큼 끌었다. 빨리 가야 돼.’
한시가 바쁜 상황. 나는 옛 친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 없으니 빨리 내려 줘요. 웬만하면 노르트 쪽으로 부탁합시다.”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옛 친구가 풀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라 성격이 저 모양인 것도 다 저 핏줄 때문이었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딛고 선 바닥이 울렸다.
그으응-
옛 친구의 본체가 움직이는 모양.
그러길 잠시, 옛 친구의 입이 열렸다.
“도착했어요. 아마 노르트 쪽이긴 할 텐데, 정확히 어디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말이 끝나는 순간, 사방이 일순 떨리더니 몸이 어디론가 이동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벽이 쩍 벌어지며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가만 보니 이곳은 옛 친구의 입속.
옛 친구가 입을 벌리자 햇빛이 새어 들어온 것이었다.
그때 옛 친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 잘 가요, 구원자님. 언제든 제가 보고 싶을 때 연락하세요.
그것은 내 머릿속을 바로 파고드는 소리였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어느새 인간형 옛 친구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알았습니다. 필요하면 연락하지요. 몸이나 열심히 회복시켜 놓으세요.”
내가 옛 친구에게 말을 마쳤을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 씨, 이제 가는 건가요? 너무 아쉬워요.”
“다시 볼 날이 있겠죠?”
라라와 리첼이 연이어 말해 온 것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래, 머지않아 또 보게 될 거야. 너희 라로프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그 말에 라라가 대답했다.
“당연하죠. 라로프인은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는다고요! 그러니 꼭 또 만나요!”
그러더니 확 다가와 내 몸을 껴안았다.
‘으음, 악어랑 껴안는 기분이군.’
그녀는 아직 변신 상태인지라, 몸에 닿는 감촉이 썩 좋지는 않았다.
“아마 옛 친구를 통해서 연락하게 될 거야. 어머니한테 준비 잘하고 있으라고 전해. 그럼 잘들 지내라.”
나는 말을 마치고 옛 친구의 입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옛 친구의 입안에서 라라와 리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주 손을 한 번 흔들어 준 나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 * *
나는 적당히 방향을 잡고 이동 중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모르니, 일단 내륙 쪽을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일단 사람을 만나야 뭐든 할 텐데.’
라로프로의 여정은 내 마음에 상당한 파문을 남겼다.
회귀 직후 가졌던 복수심은 시간이 지나며 황제의 음모와 진실에 대한 궁금증으로 변했다.
그리고 라로프에서 내가 전설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이제는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의문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후우, 이제 본격적으로 두 번째 재앙을 맞이해야 하니, 정신 바짝 차리자.’
쿠쿵-
잠깐 마음을 다잡는 사이,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다 죽여!”
“이 나쁜 놈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사람들의 고함 소리였다.
‘누가 싸우고 있나 본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여유롭게 걸어갔다.
어차피 누가 되었든, 하나는 살아남아 있을 터. 굳이 급하게 갈 필요가 없었다.
내가 천천히 걸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싸움은 끝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죽어 나자빠진 시체 몇 구와 부서진 마차,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십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도적단인가? 하긴 노르트에 저런 놈들이 제법 있지.’
노르트는 부족 연합 국가인 데다 척박한 환경 때문에 확실한 중앙 집권이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수도 밖으로만 나가면 곳곳에 도적단 비슷한 것들이 난립해 있었다.
그때 막 도적단 중 하나와 내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어? 넌 뭐야?”
복장도 다르고 생김새도 완전히 다른 내가 나타나자 당황한 것 같았다.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놈들. 딱히 길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도 없었다.
도적들도 이제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중 덩치 큰 한 놈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봐, 외지인 같은데 끼어들지 말고 갈 길 가라.”
무작정 칼부터 휘두르지 않는 것을 보니 안목이 아주 없지는 않는 모양.
‘그래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대답 없이 놈에게 씩 웃어 준 후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말없이 다가가자 놈들도 무기를 빼 들었다.
“이 자식이, 곱게 보내 주려고 했더니 기어코 죽고 싶은가 보구나!”
나는 덩치 큰 놈이 뭐라 말을 하는 틈을 타 스킬을 사용했다.
‘바람의 걸음.’
순간 누가 밀어주는 것처럼 내 몸이 쭉 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는 언브레이커블을 뽑아 든 상태.
첫 목표는 앞에서 떠들던 덩치 큰 놈이었다.
내가 칼을 휘두를 때까지도 놈은 반응을 못 하고 있었다.
“어, 어?”
서걱-
놈이 막 움직이려는 찰나, 이미 내 칼이 놈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데구르르-
놈의 머리통이 굴러떨어졌다.
“으, 으어어!”
“미, 미친!”
그제야 도적놈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왔던 놈들이니, 단순히 굴러가는 머리통을 보고 놀란 것은 아니니라.
놈들이 놀라든 말든, 내 칼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서걱- 서걱-
몇 분 지나지 않아, 자리에는 딱 한 놈의 도적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놈을 무릎 꿇고 벌벌 떨고 있는 상태.
나는 여유로운 태도로 놈에게 물었다.
“야, 여기가 어디냐?”
“여, 여기는 보툼 산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지명. 이것만으로는 길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지도 있지? 내놔 봐.”
놈이 후들거리며 일어나더니 얼른 덩치 큰 놈의 품을 뒤져 지도를 찾아왔다.
그걸 받아 든 나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뭔지 모를 가죽에 폭포, 우물, 등이 이곳저곳에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너무 조악하고 범위도 좁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나는 살아남은 도적놈에게 다시 물었다.
“이게 다야? 제대로 된 지도는 없어?”
“예, 그, 그거밖에 없습니다.”
“그럼, 수도가 어느 쪽이야?”
놈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대답했다.
“서쪽입니다. 확실합니다. 제가 저번 달에 어떤 노인을 털다가 들었습니다.”
골치가 아파 왔다.
수도가 어느 쪽인지도 기억을 되짚어야 알 정도면, 이놈에게 얻는 정보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하필 만나도 이런 것들을 만나서. 차라리 저 덩치 큰 놈을 살려 둘 것을 그랬나?’
그나마 우두머리로 보였으니 좀 낫지 않았을까?
끼이익-
잠깐 후회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부서진 마차 문이 삐거덕거리며 열리고 있었다.
‘다 죽은 게 아니었나?’
인기척이 없어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생존자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윽고 마차 밖으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보기에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유복한 집안의 자식인지 뽀얀 피부와 대조되는 빨간 머리가 눈에 띄었다.
소년은 마차에서 나오자마자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길 찾는 중이죠?”
목소리가 맹랑했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는데도 또렷한 눈빛을 빛내는 모습이 보통이 아니었다.
내가 소년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래, 수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지. 혹시 아니?”
“네, 알아요.”
소년은 대답을 하더니 이내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잠깐의 시간이 그대로 흘렀다.
답답한 마음이 살짝 들려는 순간,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알지만, 공짜로는 안 알려 드릴 거예요.”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소년은 처음부터 맹랑해 보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배짱이 있었다.
“어이, 꼬맹아. 아저씨가 도적놈들 처리하는 소리 못 들었니?”
내 말에 소년이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가다듬더니 대답해 왔다.
“마차 안에서 다 들었어요. 근데 제가 봤을 때 아저씨는 자기 목표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도적들에게 왜 죽였냐라거나 뭐 하는 거냐라거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요.”
녀석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다 죽이고 한 놈만 살려 둔 것도 대답할 입이 필요해서구요. 그러니 아저씨는 저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저 도적은 아무 쓸모 없으니까요.”
그것까지 다 생각하고 숨어 있던 마차에서 나온 모양.
‘똑똑한 꼬맹이구만.’
그래도 생각이 어리다.
“내가 널 고문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안 해 봤냐?”
그러자 소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안 그러실 거죠?”
나는 말을 듣자마자 칼을 휘둘렀다.
서걱-
“허억!”
옆에 있던 도적의 목이 잘리는 순간, 소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내가 소년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어떨 거 같냐?”
소년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소년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농담이다. 긴장하지 마라. 근데 너, 수도 어딘지는 아냐?”
사실 소년의 빨간 머리를 보자 루스가 떠올라 한 번 장난을 쳐 본 것뿐, 애초에 녀석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 아니요.”
하지만 금세 나온 대답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거 참, 그럼 시간 낭비만 한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지려는 찰나, 소년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수도로 갈 방법은 알아요.”
뭔 소린가 하고 내가 쳐다보고만 있자 녀석이 다시 이야기했다.
“저를 우리 마을까지 데려다주시면 제가 말이랑 지도를 구해 드릴게요. 보니까 맨몸이신 거 같은데, 음식이나 옷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인벤토리의 존재를 모르는 소년의 눈에는, 내가 맨몸으로 척박한 노르트를 방황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옷가지를 비롯한 생필품은 백작에게 여러 번 보급을 받아서 여전히 넉넉했다.
‘하지만 말과 지도가 필요한 건 맞지.’
나는 생각을 정하고 소년에게 말했다.
“혹시 또 마을에 가서 딴소리하면, 그때는 재미없을 줄 알아라.”
내 단호한 목소리에 소년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해 왔다.
“우리 아빠가 부족장이에요. 작은 부족이지만, 그 정도는 넉넉하게 챙겨드릴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일단 다른 방법이 없으니 나는 소년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 그럼 너희 마을이 어느 쪽이냐?”
소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몇 시간을 걸었다.
저 멀리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보통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도 같이 눈에 들어왔다.
“저거 혹시, 너희 마을에서 키우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