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50화>
라라의 온몸이 푸르게 빛나더니 무언가에 감싸였다.
그것은 거북이의 등껍질 같기도 했고, 전에 봤던 드래곤의 비늘 같기도 했다.
푸른색의 딱딱한 갑각이 라라의 몸을 감싸고 빛나길 잠시, 나타난 것은…….
‘파워 레X저……는 아니고, 어디서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기계 느낌은 없으니 아이X맨은 아니고, 뭔가 생체 병기 느낌이 물씬 풍겼다.
순간 일어난 변화로 엘파바가 멈칫했다.
그사이 나는 상황을 살폈다.
막상 변신을 한 라라는 멍한 상태.
반면 리첼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싸울 생각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거면 되었다.
어리바리하다 방해만 되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전의가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세계의 정수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검을 뽑았다.
순간 엘파바도 내 태도를 눈치채고 주문을 외웠다.
“서리의 원한!”
엘파바를 중심으로 주위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옛 바람님, 막아 줘요-!”
그때 리첼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바람이 불어와 리첼과 라라의 앞에서 냉기를 밀어내었다.
‘급하니까 주문이고 뭐고 없잖아!’
순간 어이없는 마음이 일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바람의 걸음.’
몸 상태가 안 좋을 뿐, 마력은 충분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바람의 걸음을 써 빠르게 엘파바에게 달려들었다.
엘파바에게 다가갈수록 날카로운 냉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 몸은 아프지도, 얼어붙지도 않았다.
그제야 나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냉기 면역! 좀 전에 무시해서 미안했다.’
나는 냉기 면역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엘파바에게 접근해 칼을 휘둘렀다.
냉기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내 모습에 엘파바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검이 막 놈의 몸을 갈라 놓으려는 순간.
엘파바가 급하게 주문을 외웠다.
“심장을 움켜쥐는 손.”
동시에 내 몸이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크윽!’
힘을 써 보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엘파바의 저주 마법에 당한 것이다.
심장을 움켜쥐는 손은 한 달에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엘파바의 필살기였다.
‘라라, 리첼. 빨리 움직여라!’
내가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을 때, 엘파바가 차가운 얼굴로 다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떨어져라, 얼…… 컥!”
엘파바가 막 공격 주문을 마치려는 찰나.
뒤에서 나타난 그림자가 엘파바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계속 멍하게 있던 라라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해수 씨, 괜찮아요?”
다행히 라라의 공격으로 엘파바의 주문이 풀렸다.
시전자를 공격하는 것이, 심장을 움켜쥐는 손을 파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굳이 큰 피해를 줄 필요도 없기 때문에 공격하려는 의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싸우기 전에 라라와 리첼이 전의가 있는지 살폈던 것이다.
“그래, 고맙다.”
라라에게 짧게 대답한 후, 나는 엘파바 쪽으로 달려갔다.
놈은 막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엘파바가 다시 주문을 사용하게 둘 수는 없다.
‘점멸.’
나는 놈의 근처로 이동한 후,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서걱-
엘파바의 상체가 크게 베어졌다.
하지만 언제 사용했는지, 놈의 몸에 얼음으로 된 갑옷이 생겨나 있었다. 그 때문에 놈을 즉사시키지는 못했다.
‘젠장!’
간신히 살아남은 엘파바의 입에서 무언가 주문이 흘러나오려 하던 그때.
쾅-!
때마침 가세한 라라의 발차기가 놈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후우…….”
연이은 싸움이 끝나자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 결정적일 때 도움이 되었네. 설마 이걸 다 예측한 건가?’
의미심장하게 웃던 노파의 표정이 떠올라 헛웃음이 지어졌다.
‘그나저나 저건 정말 뭐지? 그래, 옛날에 만화에서 본 강식인가 뭔가, 그거랑 비슷하네.’
나는 라라를 쳐다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서 있기엔 너무 피곤했다.
그러고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는 중에 라라와 리첼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변신 상태인 라라에게 말을 걸었다.
“라라, 그건 도대체 뭐야?”
라라가 울상을 지으며 대답해 왔다.
“이건 은혜의 관문의 어머니와 딸에게만 이어지는 비술이에요. 우리는 이걸 라로프의 핏줄이라고 해요.”
포션을 마셔 가며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옛 친구의 피가 먼 조상에게 섞여서, 이렇게 변신할 수 있어요. 강해지는 건 좋은데, 한번 변신하면 온종일 이러고 있어야 해요.”
울상을 짓고 있는 이유가 변신을 스스로 풀 수 없어서인 모양.
‘하긴, 썩 보기 좋진 않네.’
얼굴까지 갑각에 둘러싸여 있으니, 저래서야 종일 어떻게 지내나 싶었다.
“그러고 밥은 먹을 수 있어?”
“여기로 먹으면 돼요.”
그 순간 갑각의 입 부분에 구멍이 동그랗게 뚫렸다.
“그것참, 신기하군.”
울상 짓는 라라에게 피식 웃으며 대답하는데, 리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수 님, 아까 그 여자는 어떻게 된 거예요? 수호자와 싸울 땐 열심히 도와줬는데, 왜 갑자기 돌변했는지……. 그리고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궁금하네요.”
가만 보니 아직까지 엘파바와의 관계를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일종의 도우미야. 플레이어들에게는 각자 기술이 존재하는데, 영웅을 소환하는 것이 내 기술이지. 하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내 동료라고 할 수는 없어.”
라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그럼 그 사람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한 건 뭐 때문이에요?”
설명하기 복잡했기에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회귀를 말할 수도 없고, 놈들의 음모를 줄줄 늘어놓을 수도 없다.
게다가 놈들의 목표를 내가 명확하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놈들에게 뭔가 좋지 못한 의도가 있어. 그래서 날 돕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배신하는 거야. 그러니 싸움에 당장 써먹을 수는 있지만, 여차하면 제거해야 돼.”
결국 대충 뭉뚱그려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라라가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하, 알았어요! 일단 모른 척하고 있다가, 배신할 낌새가 보이면 팍! 맞죠?”
“그래, 맞아.”
이럴 땐 단순한 것이 도움이 된다. 딱히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납득해 주니…….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근데 놈이랑 싸워야 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변신한 거야?”
그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리첼이 대답해 왔다.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와 영문 모를 상황에서 싸워야 할 거라고요. 그때가 되면 망설이지 말라고 하셨죠.”
리첼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라라가 끼어들었다.
“맞아요, 어머니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어요. 저한테도 핏줄의 힘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어요.”
역시 어머니의 예언이 있었던가.
‘어머니의 말대로 내 일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몸을 회복시키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응? 저건 뭐지?’
엘파바가 죽은 곳에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아!”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런 경우가 자주 없어 잊고 있었지만, 영웅이 죽으면서 아이템을 떨어트리기도 했었다.
나는 피곤함도 잊고 얼른 다가가 아이템을 주워들었다.
[대형 얼음 폭탄(S. 소모품)]
- 얼음 마녀 엘파바가 자신의 기운을 모아 제작한 마법 폭탄. 사용 시 주위에 강력한 냉기의 폭풍을 일으킨다.
‘오, 쓸 만한 게 나왔네.’
회귀 전에 본 적 있는 아이템이었다.
이것을 터트리면 주위에 강력한 냉기가 퍼지면서 사방이 얼어붙고, 얼음 파편이 쏘아져 나가며 적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하나뿐이라 좀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바간부터 레오비크까지는 아이템 자체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위니에게 얻은 망토는 지금껏 정말 유용하게 사용 중이었다.
‘놈들이 주는 물건이 참 유용하단 말이야. 매번 주면 좋을 텐데.’
즐거운 상상을 하는 사이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슬슬 이곳에 온 목적을 실행할 차례.
나는 옛 친구의 심장을 향해 다가갔다.
‘이게 진짜 살아난다고?’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돌덩이였다.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틈에 라라와 리첼이 다가왔다.
“해수 씨, 얼른 세계의 정수로 심장을 되살리세요.”
라라의 보채는 소리를 들으며 인벤토리에서 세계의 정수를 꺼냈다.
우우웅- 우웅-
순간, 동굴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심장으로부터 강력한 진동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울림은 어느새 손에 들린 세계의 정수와 공명하고 있었다. 빨리 가져다 대라고 보채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세계의 정수를 심장에 가져다 대었다.
번쩍-
순간 세계의 정수에서 상서로운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마치 혈관처럼 심장에 박히더니 기운을 전하기 시작했다.
두근-
그러자 돌덩이에서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두근- 두근-
몇 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쩌저저적!
심장의 표면에 금이 가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와! 이게 옛 친구의 심장이구나.”
“드디어 심장이 깨어났군요.”
라라와 리첼의 감탄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세계의 정수는 심장에 한동안 더 기운을 전했다.
어느 순간 빛이 잦아들더니, 차분하게 박동하는 심장이 남았다.
[옛 친구의 심장(S. 재료)]
- 천 년을 산 영수, 옛 친구의 심장 반쪽이다. 맹약을 위해 천 년간 잠들었다가 #%&@$!#의 조각에 의해 깨어난 상태. 강력한 생명력이 담겨 있다.
‘호오, 이것도 재료로 분류되네. 그나저나 세계의 정수는 여전히 저렇게 표시되는구만.’
잠시 생각을 하다 세계의 정수와 옛 친구의 심장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다 됐다. 이제 섬에서 나갈 수 있겠지?”
그러자 리첼이 조용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통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지 않나요?”
‘옛 조상 중에 야구 선수라도 계셨나?’
괜히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는 리첼을 보며, 잠시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동굴을 나섰다.
* * *
은혜의 관문까지 돌아가는 길은 평안했다.
추방자들의 마을에서도 더 이상 시비를 거는 놈들은 없었고, 대로를 따라가다 보니 몬스터들을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걸려 마을로 돌아왔을 때, 라로프의 어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구원자시여, 일은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호칭 통일 좀 합시다, 할머니. 말투도 그렇고요. 그냥 젊은이라고 계속 부르세요. 갑자기 영 적응 안 되네.”
노파가 웃으며 대답해 왔다.
“클클, 그래도 큰일 하고 온 사람인데, 한번 말로라도 대접해 봤다네.”
“말로 하는 대접 말고, 만질 수 있는 걸 주세요.”
“갈 때 미리 챙겨 주지 않았나?”
갈 때 받은 것이 딱히 없는데?
내가 궁금해하는 듯하자 노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만지면 기분이 좋은 걸로 둘이나 챙겨 줬지 않나? 클클클.”
노파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라라와 리첼을 바라보았다.
‘이 할망구가!’
“뭔 헛소리를 하십니까? 너무 오래 사셔서 어디 안 좋으세요? 그게 자기 후계자를 놓고 할 말씀입니까?”
노망났냐고 외치려다, 보는 눈이 많아 말을 좀 순화했다. 노파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옛 친구의 핏줄에 구원자의 피까지 섞인다면, 우리 일족의 미래에 영광이 있지 않겠나? 클클클.”
더 놔뒀다가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나는 말을 돌렸다.
“괜한 소리는 그만하고, 심장 되살려 왔으니, 얼른 물길이나 열어 주세요.”
노파가 눈을 크게 뜨더니 되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그러나? 구원자가 하셔야지.”
그 말에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후우, 또 뭘 하란 소립니까? 심장 가져왔으면 됐잖아요?”
“당연히 옛 친구에게 심장을 전해 줘야지.”
어차피 물길을 열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니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노파에게 물었다.
“그냥 심장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되는 것 맞습니까?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닙니까?”
그러자 노파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가져다주면 되네. 자기 심장을 제자리로 돌린다는 데 무슨 불만이 있겠나? 전설로도 전해진 일이네. 힘든 일했으니, 오늘은 푹 쉬게.”
노파가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그러자 라라가 다가왔다.
“해수 씨, 제가 쉴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얼른 가요.”
‘뭐 어차피 그리 가야 섬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 상관은 없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라라를 따라 하루 머물 곳으로 향했다.
하루를 푹 쉬고 난 다음 날.
나는 옛 친구에게로 출발했다.
“해수 씨는 밖에 나가면 뭐 할 거예요? 왜 그렇게 급하게 나가려고 해요?”
“라라, 해수 님이 곤란해하잖아. 너무 질문만 쏟아붓지 마.”
이번에도 라라와 리첼이 나를 따라왔다.
시작을 함께했으니, 마무리까지 함께하라는 어머니의 말이라나.
‘이 콤비도 참…….’
도움이 되는 듯 안 되는 듯, 오묘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면서도 나는 어서 밖으로 나갈 생각뿐이었다.
* * *
며칠의 여정 끝에, 멀리 옛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몸에 검은 기운이 퍼지고 있는 상태.
거대한 몸을 꼼짝도 하지 않고, 해수면에 가만히 떠 있었다.
나는 바닷가로 다가가며 인벤토리에서 심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걸 여기서 주면, 거북이가 어떻게 받아 가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장면이 상상이 안 되었다.
그래도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나는 바닷물이 막 발을 적시기 시작하는 곳에 멈추어, 심장을 들고 소리쳤다.
“어이, 옛 친구. 심장 가져왔다. 받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