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내가 뽑은 S급들이 배신했다 47화>
라로프의 딸은 한 부족의 후계자에게만 붙여지는 칭호였다.
그것은 이 근방에서 제법 영향력이 있다는 말. 당연히 알고 있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라라, 혹시 라로프섬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질문을 들은 라라의 얼굴이 굳었다.
‘음? 질문에 무슨 문제가 있나? 그게 큰 비밀이란 소리는 못 들었는데?’
잠시 고민하는 중에 라라가 되물어 왔다.
“정해수, 당신은 혹시 밖에서 왔나요? 생김새를 보면 라로프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혹시 최근에 라로프로 들어왔나요?”
최근에 들어오긴 했다. 한 몇 분 전에…….
“예, 얼마 전에 우연히 들어오게 되었습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라로프인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시 은혜의 길에서 라로프인을 보지 못했나요?”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은혜의 길이 뭐죠?”
“……은혜의 길을 모르나요? 라로프 섬으로 들어와 놓고?”
자꾸 말이 헛도는 느낌.
저들의 태도가 심각하니 자세히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저는 은혜의 길이 뭔지 모릅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어떤 던전을 통해서입니다. 던전을 통과하자 이곳으로 보내졌어요.”
어리둥절해하는 라로프인들에게 말을 이었다.
“당신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곳이 라로프섬인 것도 몰랐습니다.”
“그럼 당신은 은혜의 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군요?”
자꾸 언급되는 저 은혜의 길이란 것이 뭐지? 설마 한 달에 한 번 썰물 때 열린다는 길을 말하는 건가?
“은혜의 길이 혹시 매달 한 번씩 열리는 육지로의 길을 말하는 겁니까? 그게 맞는다면, 전 거기로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내 말을 들은 라라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혹시나 당신이 우리 부족을 해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했어요.”
“그게 무슨?”
놀라는 내게 라라가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는 교역을 하러 갔던 부족원들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가던 길이었어요. 당신이 그 길로 들어왔다면, 혹시 당신과 다툰 것이 아닌가 하고……. 당신은 강하니까…….”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어쨌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라라, 은혜의 길이 언제 다시 열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열린 지 열흘이 좀 안 되었으니, 앞으로 20일 좀 더 있으면 다시 열릴 거예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문득 떼어 놓은 루스와 휴고도 떠올랐다.
‘녀석들, 잘하고 있겠지……?’
그때, 내 눈치를 보던 라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정해수, 안 그래도 도와주었는데 염치없다는 것은 알지만……. 부탁 하나만 하면 안 될까요? 저희한테는 너무 중요한 문제라.”
무슨 말일까? 어차피 20일은 꼼짝없이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 일단 들어는 볼까.
“일단 들어 보죠.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으니까요.”
“저와 은혜의 길까지 같이 가 줘요. 부족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되겠어요. 몬스터들이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서, 지금 인원으로는 안 될 거 같아요.”
안 그래도 은혜의 길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했으니 나로서도 괜찮은 제안.
하지만 저들을 모두 보호하며 데려가는 것은 썩 편한 일이 아니다.
“음, 제가 일행분들을 모두 지켜 드리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아, 그건 걱정 말아요. 저만 갈 거니까. 일행들은 마을로 돌아갈 거예요. 몬스터의 이상도 마을에 알려야 되니까요.”
그럼 나야 나쁠 것 없지.
막 수락하려는 찰나, 라라의 말이 한발 빨랐다.
“일이 잘 끝나면, 꼭 보답하도록 할게요. 라로프인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은혜의 길까지 보호해 드리지요.”
나는 문득 돌아가는 사람들의 안전이 궁금해져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다.
이곳에서 마을까지는 하루 거리.
몬스터를 아예 만나지 않는 길이 존재했고, 순찰대도 지나다닌다고 했다.
그렇게 머지않아 다른 라로프인들과 헤어진 나는 라라와 함께 길을 나섰다.
“정해수,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제국에서 왔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던전을 통과했더니, 이곳에 떨어졌지요.”
“플레이어는 뭐예요?”
“재앙을 막기 위해 이 세계에서 소환된 존재지요.”
“이세계요? 그럼 당신 다른 세상 사람인가요?”
길을 가는 동안 라라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처음 보았던 여전사의 모습과 영 매치되지 않았다.
‘엄청난 수다쟁이잖아? 자기 부족들과 있을 때는 조용했던 거 같은데…….’
라라는 눈동자를 엄청나게 빛내며 내게 끝없이 질문을 던져 왔다.
‘그 덕에 심심하지 않아서 좋긴 한데…….’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문제들이 있는 와중에 라라 덕에 잠깐 생각을 돌릴 수 있어 기분 전환은 되었다.
우리는 중간중간 노숙을 해 가며 나흘을 걸어 바닷가에 도착했다.
그러자 라라가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다 와 가요. 해안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은혜의 길이 보일 거예요.”
이제 목적지가 눈앞.
나는 은혜의 길이 떡하니 열려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헛된 상상을 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꾸준히 걷다 어느 순간, 라라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서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자 망연자실한 표정의 라라가 보였다.
“왜 그래, 라라?”
그간 친분이 쌓인 라라에게 내가 편하게 질문했다.
“……말도 안 돼!”
라라의 눈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뭐지?’
가만 보니 무언가 커다란 것이 해수면 근처에 떠 있었다.
굉장히 멀리 있는데도 저 정도 크기면, 거의 섬이라고 봐야 될 정도.
집중해서 보자 형태가 겨우 보였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데? 시커먼 점이 찍혀 있군.’
“설마…… 말도 안 돼!”
말을 내뱉은 라라가 갑자기 해안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라라를 한참이나 뒤쫓아 도착한 곳은 역시나 바닷가.
그곳에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간단한 시설이 지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라라의 같은 말이 또다시 들려왔다.
‘일단 은혜의 길이 이곳인 걸 알았으니, 목적은 달성했는데…….’
내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건 별 상관은 없다. 보름쯤 후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일.
그때 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혜의 길이 막히다니……. 운명의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말았어.”
‘뭐라고? 뭐가 막혀?’
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라라의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라라에게 물었다.
“라라! 은혜의 길이 막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지만 라라는 멍하니 바다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살짝 나간 상태 같았다.
나는 라라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라라, 정신 차려! 은혜의 길이 막히다니 무슨 소리냐고!”
내가 몇 번을 되묻자 라라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옛 친구가 오염되는 날, 은혜의 길이 막힐 거라고 했어요. 그때가 라로프의 존망이 결정될 운명의 시기라고 전설에 전해 내려와요.”
다른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혜의 길이 막혔다는 말만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젠장! 한동안 운이 좋다 했더니…….’
자칫하면 여기 갇혀서 아무것도 못 할 상황.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라라. 라로프섬에서 나갈 다른 방법이 없을까? 나는 바깥에 중요한 할 일이 있어.”
“은혜의 길이 막히면 나갈 수 없어요. 라로프에는 바다를 건널 배가 없거든요. 옛 친구가 있기 때문에 굳이 만들 필요가 없었죠.”
라라의 설명에는 옛 친구라는 단어가 자꾸 등장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옛 친구가 도대체 뭐야?”
“저기 바다에 보이는 거북이요. 천 년 전, 선조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매달 해협을 몸으로 막아 주죠. 그래서 뭍으로의 길이 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썰물 때 길이 열린 것이 아니고, 큰 거북이가 바닷물을 막아 줘서 길이 열렸다는 소리.
게다가 지금 그 거북이가 아파서, 앞으로 아무리 기다려도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아니, 천 년이나 되었으면, 배를 좀 만들어도 되잖아! 거북이 늙어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해 봤냐?’
속으로 외쳐 봤지만 소용없는 일. 사실 저 거북의 크기를 보면 쉽게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보통 영물이 아닌 건 틀림없어 보이는데. 근데 왜 하필 지금 아프냐고!’
아마 옛 친구가 오염된 것도 마왕에게서 뿜어진 기운과 연관이 있을 터.
그렇다면 전설은 이미 재앙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그것도 이 작은 라로프섬에서 말이다.
‘회귀 전에 라로프가 어떻게 되었더라?’
그들을 만난 것은 두 번째 재앙이 후였고, 라로프인들은 아주 소수의 인원만 전투에 참여했었다.
‘설마…… 멸망한 건가?’
보통 전설에는 위기에 대한 해결책도 따라 내려오기 마련.
나는 골치가 아파지려는 것을 참으며 라라에게 물었다.
“그 전설에 말이야, 혹시 어떻게 해결하란 소리는 없었어?”
저 거북이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두 번째 재앙을 해결할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다.
“세계의 정수를 가진 구원자가 올 거라고 했어요. 그를 도와 옛 친구의 심장을 되돌리면 오염이 회복된다고 했어요.”
‘하아, 빌어먹을 전설!’
좀 구체적으로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전설이라는 건 늘 저 모양이었다.
뭔 소린지 알 수가 있어야지.
“해수 씨, 마을로 가야겠어요! 어머니께 이 사실을 빨리 말씀드려야 해요.”
말을 마친 라라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현재로서는 같이 가는 게 최선인가.”
답답하지만, 일단은 따라가야 된다.
배를 만들든 다른 방법을 찾든 라로프인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
그나마 친분이 있고 빚을 지워 둔 라라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라면…… 부족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 가 보면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라라의 뒤를 쫓아갔다.
* * *
마을까지는 닷새 거리. 하지만 전력을 다해 달린 라라 덕에 우리는 사흘 만에 마을에 도착했다.
변해 버린 몬스터 탓인지 마을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라라와 마을로 들어서자 달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라라! 무사해서 다행이야.”
달려와 얼싸안는 또래 여성은 라라의 친구인 듯 보였다.
“리첼,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빨리 어머니를 뵈어야 해. 중요한 일이야.”
“응, 안 그래도 몬스터가 이상해져서 어른들이 이야기 중이셔. 얼른 들어가 봐.”
라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데리고 마을 중앙의 큰 건물로 향했다.
그 앞에 도착한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 앞에 서 있던 자가 창을 들어 막아섰다.
“라라 님, 외부인을 부족 회의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이분은 이번 일을 같이 해 준 분이야. 많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아주 중요한 일에 증인이 되어 줄 분시기도 하니 괜찮아. 내가 책임질게.”
‘증인? 아, 거북이가 오염된 것을 말하는 모양이군.’
남자는 미심쩍다는 눈을 보냈지만, 더 제재하지는 않았고, 그제야 나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건물 안의 모습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계 중심 사회인 라로프답게, 나이 많은 여자들이 바닥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가 앉아 있었다.
그때, 나와 라라를 발견한 노파의 입이 열렸다.
“라라, 돌아왔구나.”
“어머니, 큰일이 났어요!”
라라는 인사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소리부터 질렀다.
좌중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라, 괜찮다. 이번에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올 거라는 예언이 있었단다.”
“어머니, 진짜 큰일이 났다니까요? 옛 친구가 오염되었어요!”
좌중이 웅성거리는 걸 보니 이들에게 진짜 큰일은 큰일인 모양.
당황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차분한 노파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다들 너무 정신없이 굴지 말거라.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인사도 없이 세워 놓다니, 쯧쯧.”
잠시 후 소란이 가라앉자 노파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보오, 젊은이. 다들 경황이 없어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시오.”
뭐 나야 상관없다. 오히려 이쪽이야말로 아쉬운 것이 있는 상황이니 언행을 조심해야 할 처지.
“괜찮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질문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해 줄 테니, 원하는 만큼 물어보게나.”
노파가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나는 가장 급한 것부터 물었다.
“혹시 은혜의 길 말고 이 섬을 나갈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배를 만들어야지. 하지만 우리에겐 배를 만들 기술이 없네. 아마 오랜 시간이 걸릴 게야. 그리고 자네라면 왠지 알 것 같은데, 지금 세상이 변하고 있네. 배를 만드는 것이 과연 자네가 가진 문제의 답이 되겠나?”
노파가 심유한 눈빛으로 내게 되물어 왔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지만, 감이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무엇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곳 라로프의 전설은 말한다네. 옛 친구가 오염되는 때에, 세계의 정수를 가진 구원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영문을 몰라 내가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노파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때맞춰 이방인인 자네가 나타났군.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소리지? 설마 내가 구원자라는 소린가?’
옛 친구의 오염이 나와 연관이 있는 것은 맞다.
마왕이 내뿜은 기운이 옛 친구를 오염시킨 것 같으니까.
하지만 내게 세계의 정수 같은 게 있을 리가…….
그러다가 불현듯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